영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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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 픽, 시간과 빛: 각자의 궤도를 따라> : 부산과 부산 사람들
김현진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빛과 열: 부산 남구 유엔평화로>
오승진 감독의 <빛과 열: 부산 남구 유엔평화로>는 피란수도 당시의 부산의 기억을 만화로 그리는 만화가 남정훈의 작업기다. 남정훈 만화가의 작업이 1차 기록이라면 오승진 감독의 작업은 2차 기록, 기록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겠다. 유엔묘지로 불렸던 유엔평화공원과 그 근처에서 뛰놀던 남정훈의 어린 시절은 이제 그가 가진 사진들로만 남아있다. 그 사진들 너머로 그때 사진이 미처 담지 못한 기억을 남정훈은 만화라는 매체로 붙잡으려 한다. 영감을 얻기 위한 남정훈의 발걸음과 멈춰 섰을 때의 드로잉 작업. 오승진의 카메라는 이 과정을 담아내며 부산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가보았을 법한 유엔평화공원에 대한 관객들의 기억과 추억을 건드린다. 남정훈의 펜이 텅 빈 태블릿 화면에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나갈 때, 그곳에 가본 적이 있는 관객이라면 아마 각자의 어린 시절 기억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구구맨>
오나연 감독의 <구구맨>은 기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삶을 담은 TV 프로그램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를 떠올리게 만드는 인물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는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비둘기와 함께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일명 ‘둘기 아빠’ 김현태 씨의 일상을 담고 있다. 앞서 언급한 그 방송과 이 영화의 차이점이라면 사람을 대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 방송은 방송에 담긴 기인에 대한 현재와 과거를 (시청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구구절절 설명을 한다. 방송 속 기인은 쉽게 말해서 우리가 ‘알아가야 하는’ 이해의 대상이다. <구구맨> 역시도 김현태 씨에 대한 어느 정도의 설명을 하지만, 김현태 씨의 실제 삶이 그의 말대로 사실인지 아닌지 검증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다만 오나연 감독은 김현태 씨가 비둘기와 함께 어울리며 행복해 하는 모습에 주목한다. 기인의 과거와 사연과 실생활이 궁금하신가? 감독은 그것을 부드럽게 차단시킨다. 그건 당신의 알 권리가 아니고 알 바가 아니라는 듯이. 그 덕에 김현태 씨는 뭔가 사연이 있는 이상한 사람이 아닌, 그저 남다른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남는다. 이 태도가 이 영화의 킥이다.

<부산 소네트>
정은섭 감독의 <부산 소네트>는 부산 곳곳의 재개발을 앞둔 철거 대상 지역과 번듯하게 곳곳에 들어선 아파트와 빌딩숲, 이 풍경들의 집요한 대조를 통해, 부산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철거를 기다리고 있는 텅 빈 공가, 곳곳에 써 있는 ‘철거’라는 붉은 글씨들, 이미 부서져 폐허만이 남은 원래의 모습이 영영 사라져 버린 동네들. 한편으로 어딘가에서 무심히도 계속 번듯하게 지어져 올라가는 아파트와 빌딩숲들. 이 대조된 풍경들 사이로 미분양 아파트들이 점점 늘어가는 부산, 인구소멸 위험지역으로 몰린 부산, 아이들은 점점 태어나지 않고, 젊은이들은 떠나며, 점점 노인들만 남아서 고령화되어 가는 부산에 대한 뉴스들이 의미심장하게 들려온다. 고정된 카메라와 절제된 사운드, 간헐적으로 낮고 슬프고 무겁게 깔리는 음악. <부산 소네트>는 매우 차갑고도 엄정한 태도와 시선을 가진 다큐멘터리다. 하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따듯해 보인다. 그 시선에는 결국 겉보기에는 번듯하게 변해가는 것 같지만 점점 살기 힘들어지고 있는 도시 부산에 대한 깊은 근심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49재>
정시연 감독의 <49재>는 감독의 외할머니의 49재의 과정을 담담하게 찍은 다큐멘터리다. 외할머니의 49재를 맞아 가족들이 모인다. 음식을 준비하고, 납골당에 도착해 49재를 지내고, 외할머니의 납골함이 담긴 자리를 모두 쳐다보고, 외할머니의 유품들을 정리한다. 가족들이 뿔뿔히 집으로 돌아가고 적막한 집 안에서는 외할아버지 혼자 TV를 보다 잠이 든다. 이 과정에 어떤 반전이나 의외의 순간이 끼어들 리가 없다. 49재는 매우 엄숙한 의식이다. 음주가무, 여행, 경조사 참여, 기타 즐겁고 재미있게 노는 일이 모두 금기시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화면도 상(喪)을 상징하는 검은색을 연상시키는 흑백화면이다. 이 영화는 세상을 떠난 외할머니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전달할 의도가 없다. 다만 부재한 망자를 추모하는 산 자들의 시간에만 오롯이 집중한다. 아직 죽음과 부재의 의미를 알지 못할 나이인 어린 손자의 무표정과, 그 의미를 너무나 사무치게 잘 아는 노인 외할아버지의 무표정. 영화를 보고나면 이 두 무표정의 차이가 쓸쓸하게 기억될 것이다.

<겨울 숲을 혼자 걸어간다>
배회라는 단어가 있다. 목적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말한다. 보통 사람들은 이 단어를 쓸 일이 좀처럼 없다. 목적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닐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김종한 감독의 <겨울 숲을 혼자 걸어간다>는 이 배회란 단어가 잘 어울리는 영화다. 감독이 직접 출연한 영화지만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그가 어릴 적 성장한 영도구에 있는 청학동이란 동네 자체다. 영화의 대부분이 우선적으로 동네의 풍경을 크게 보여주는 구도로 촬영되어 있고 그 화면 안에서 작게 잡힌 그는 영화의 중심을 차지하지 않고 느릿느릿 동네를 배회할 뿐이다. 그는 그 동네에서 전셋집을 구하려는 목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핑계에 가깝다. 그저 그는 동네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에 잠긴 것으로 보인다. 동네는 그대로 있지만 어린 시절의 친구들과 이웃들은 남아있지 않다. <겨울 숲을 혼자 걸어간다>의 배회는 이 막막한 감정의 지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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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된 연출 그리고 역동하는 연기, <파란>
윤필립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화 <파란>(강동인 감독, 2025)은 겉보기에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 안에 담긴 감정의 결이 놀라울 만큼 풍부하고 깊다. 이 영화는 극적인 사건보다 인물의 내면에 천착하며 관계의 미세한 균열과 그로 인한 감정의 파장을 탁월하게 포착한다. 이야기의 골격 자체는 비교적 단순하고 일부 관객에게는 다소 예측 가능한 전개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강동인 감독은 이와 같은 이야기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 결핍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연출적 선택을 한다. 감독은 불필요한 설명을 배제한 채 침묵과 여백, 공간의 호흡을 통해 인물들의 정서를 관객이 느낄 수 있도록 이끈다. 이러한 점에서 섬세한 감정 묘사는 결과적으로 이 작품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이 되며, 그 미덕은 배우들의 연기력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무엇보다 강동인 감독의 연출은 절제에 방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대사에 의존하지 않고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주변 풍경을 통해 감정을 끌어올리는 방식은 때로는 다큐멘터리적이기까지 하다. 예를 들어, 클로즈업을 통해 포착한 배우들의 표정, 그 안에 잠재된 감정의 흐름은 이 영화가 얼마나 인물 중심적이며 감정 중심적인 작품인지 잘 보여준다. 더불어 감독은 빛과 그림자의 대비, 자연광을 활용한 촬영기법 등을 통해 인물의 내면 상태를 시각적으로 강화하며, 그것은 마치 한 편의 정제된 사진첩을 넘기는 듯한 인상을 준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배경음향 또한 과하지 않게 사용되어 감정을 이끌기보다 감정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역할을 한다. 결과적으로, 이런 연출의 힘은 배우들이 각자의 역할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며, 그 결과 영화 속 인물들이 스크린 위에 존재하게 만든다.

이러한 연출적 특징을 바탕으로 이수혁은 그간의 이미지와는 결이 다른, 보다 정제되고 농축된 연기를 선보인다. 이수혁은 작품 속에서 ‘태화’라는 인물을 연기하는데, 이 캐릭터는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실의 무게 사이에서 조용히 침잠해 가는 인물이다. 그 과정에 이수혁의 스타 페르소나 그 자체가 기여한 바도 있으나 이수혁은 그 이미지에 안주하지 않고 ‘태화’라는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구현해낸다. 특히, 감정이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에서도 과장하지 않고 감정을 응축시키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총을 들고 있는 장면에서도 단순한 폭력의 상징이 아니라 태화의 복잡한 심경과 윤리적 딜레마가 동시에 전해진다. 다시 말해, 이수혁의 연기는 감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 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의 내면으로 천천히 스며들게 한다.

한편, 하윤경이 연기하는 ‘미지’는 얼핏 보면 감정 표현이 적은 인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마음속에서 수많은 갈등이 교차하는 인물이다. 하윤경은 이러한 내면의 복잡성을 섬세한 감정 조절과 절제된 제스처로 표현해낸다. 그녀의 연기는 감정의 파고가 극에 달할 때조차 과장되지 않으며 오히려 침묵과 정지의 순간에서 더욱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특히, 이수혁과의 대면 장면에서는 시선과 숨결, 반항 어린 눈빛만으로도 인물의 심리 상태를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인 연기를 넘어 인물과의 깊은 교감 속에서 탄생한 진정성 있는 연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수혁과 하윤경의 연기가 이 영화의 정서를 지탱하는 기둥이라면 권다함, 김현, 임영주 등의 조연 배우들은 그 정서를 다양한 결로 확장시키는 중요한 축이라고 할 수 있다. 권다함이 연기한 ‘요한’은 태화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상실과 불안을 마주하는 인물로, 그의 존재는 이 영화 속 불안한 청춘들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한다. 김현은 현실의 무게를 상징하는 ‘천영주’ 역으로 등장해 극의 긴장을 이끌며, 임영주는 짧지만 강렬한 등장으로 관객의 기억 속에 잔상을 남긴다. 이처럼 조연 배우들 모두가 자신의 역할을 명확히 인식하고 극의 리듬을 섬세하게 조율하고 있다는 점에서 <파란>은 배우 앙상블이 만들어낸 미스터리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다.

궁극적으로, 영화 <파란>은 서사 구조보다는 감정의 흐름에 집중하는 작품이다. 인물의 말보다 침묵, 사건보다 분위기, 결론보다 여운을 중시하는 이 영화는 보는 이에 따라 느껴지는 무게가 다르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감정의 영화’이자 ‘기억의 영화’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힘이라고 볼 수 있겠다. 강동인 감독은 이처럼 명확하게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말하고, 감정을 억제함으로써 더 깊은 감정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관객과 조용한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배우들은 그 대화의 중심에서 진심을 다해 응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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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는 아이> 혹은, 울지 못하는 아이
김경욱(영화평론가)
이혁종 감독이 연출한 <울지 않는 아이>는 2022년, 충남 아산의 한 빌라에서 발생한 아동 학대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이 사건에서 지적장애가 있는 6살 남자아이가 굶어서 숨진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30대인 엄마는 보름 넘게 아이를 혼자 방치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6살 여자아이 수아는 엄마 다영이 집에 있을 때는 세탁기 안에 갇혀있다. 수아의 허리에는 집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쇠사슬이 묶여있는 상태다. 다영은 자신의 팔자가 풀리지 않는 건 모두 수아 때문이라며 걸핏하면 폭언과 폭력을 행사한다. 그러다 다영은 라면 한 개를 던져 놓고 수아를 혼자 내버려 둔 채 오랫동안 집을 비운다. 애인을 만나 사기행각을 벌이는 다영의 관심은 오로지 돈뿐이다. 이혼하면서 수아를 맡은 이유도 예전의 시어머니에게서 매달 양육비를 뜯어내기 위해서인 것 같다. 심지어 다영은 수아의 장기까지 팔아 돈을 벌 계획을 세운다. <더 글로리>(2022) 같은 드라마에서, 돈에 눈이 멀어 딸을 위험에 빠뜨리는 엄마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아마도 다영은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통틀어 가장 악랄한 엄마가 아닌가 싶다.

수아는 엄마의 방치 속에 굶주리다 결국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다. 두 인물이 이를 알아채게 되는데, 하나는 옆집에 혼자 사는 아저씨 정민이고, 다른 하나는 수아의 할머니 순임이다. 정민은 옆집에서 나는 소리와 창가에 서 있던 수아의 모습을 얼핏 보고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추정한다. 영화가 시작한 지 40분 정도 되었을 때, 앞으로 정민이 가련한 수아를 구하기 위해 행동에 나서는 이야기가 전개될 것 같았는데, 이때부터 순임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순임은 수아의 생일에 선물을 사 들고 빌라에 찾아왔다가 정민으로부터 다영이 집을 비운 지 오래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수아의 위기 상황을 직감한다. 순임은 정민의 도움을 받아 죽어가던 수아를 병원에 데려가 목숨을 구해낸다. 그러나 순임은 다영의 손아귀에서 수아를 완전히 구해내기 위해 큰 결심을 하게 된다.

이후 영화는 순임이 다영을 제거하는 이야기로 흘러간다. 이 과정에서 순임은 기절한 상태로 시신 가방에 넣어진 다영을 깊은 산속의 동굴로 혼자 죽을힘을 다해 끌고 간다. 이 장면이 무려 5분 동안 지속된다. 그런 다음 순임은 다영이 수아에게 한 것처럼, 그녀를 쇠사슬에 묶어 놓고 굶어 죽게 만든다. 순임이 독약을 먹고 먼저 죽는다면, 다영은 동굴에서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수아를 위한 할머니의 복수이자 수아를 위한 희생이다.
아마도 감독은 이 장면의 아이디어로 인해 영화를 연출할 생각을 한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영화를 보면, 엄마의 학대로 고통받는 수아 보다는 순임이 다영을 해치우는 치밀한 계획을 생각해내고 악전고투하며 실천하는 과정을 그리는 데 훨씬 더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정민이라는 인물이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질문하게 된다. 순임이 수아를 직접 찾아가기 전까지 정민이 주인공처럼 이야기를 끌고 가기 때문이다. 그러다 주요 인물이 아닌 것 같았던 순임이 영화의 중반 이후에는 주인공으로서 이야기를 주도해나간다. 나이 많은 순임이 다영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성공시키려면 정민 같은 조력자가 필요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비중 있게 다루어져서 주인공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차라리 영화의 시작부터 순임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처음에는 다영의 속임수에 넘어가 양육비를 보내다가 차츰 수아의 상황을 알게 되는 과정으로 플롯이 구성되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그런데 시골에서 오빠와 함께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평범한 할머니처럼 보였던 순임은 젊었을 때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길래 그토록 치밀한 살인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일까?
영화는 거의 어른으로 자란 수아가 동굴 입구에 꽃다발을 놓은 다음 밑에서 기다리던 큰할아버지에게 밝은 표정으로 “할머니를 만나고 왔다”고 말하고,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친엄마에게 죽을 정도로 학대받아 울지조차 못했던 아이가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자란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주며 안도하게 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수아의 고통이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기 때문에 그 호소력은 그다지 크지 않다. 오히려 수아의 엄마와 할머니의 시신이 외부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은 채 여전히 그 동굴에 남아있나 하는 다소 엉뚱한 의문이 들게 하는 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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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존재 증명의 섬뜩한 결과 – 영화 <침범>이 날 세워 그린 순간들
송아름(영화평론가)
*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라는 질문이 어떠한 힘도 발휘하지 못할 때가 있다. 아무리 오래, 어떤 수를 써서 생각을 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 앞에선 오랜 경험도, 이성도, 판단도 무가치하다. 게다가 어떻게 해도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면 절망이 앞서는 것을 막을 방법도 없다. 영화 <침범>의 영은(곽선영)에게 닥친 현실이 그렇다. 의심의 여지 없이 사랑스러워야만 할 딸 소현(기소유)은 피곤함을 넘어 공포스러운 존재가 된 지 오래다. 유치원을 다니는 딸을 바라보는 영은의 눈은 경계와 불안을 오간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는 영은을 해하고 반응을 살피면서도, 친구들을 위협하는 행동으로 몇 번이나 유치원을 옮겨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면서도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는다며 오히려 영은을 다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아이는 왜 이러는 것일까,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얼마나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영화 <침범>은 ‘이미 그렇게 태어난 아이’ 소현과 이를 견뎌내는 영은의 지친 모습을 오가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이 아빠는 아이가 무섭다며 떠났고, 영은은 하루하루를 그저 버텨내는 중이다. 아이의 행동으로 여러 피해자가 생기고 자신조차 피해자의 대열에 들어섰지만 영은은 ‘사랑하는 딸’에 대한 당위로 혹은 책임감으로 그 시간을 꿋꿋히 견뎌 나간다. 영화는 어디에도 소현의 성격을 영은의 탓으로 돌릴 여지도, 소현의 행동에 이해를 구할 이유도 남겨두지 않으면서 관객 역시 영은의 당혹스러움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도저히 소현을 감당할 수 없던 영은이 자신의 손을 놓고 뛰어 나가는 소현을 잡지 않았을 때, 소현은 바로 그 행동을 질타하며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의무를 다하지 않은 영은을 다그친다. 이 장면이 너무나 무서운 것은 바로 이것이 소현이 사랑을 갈구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끔찍한 일들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소현에겐 없다.
소현은 우리에게 혼란을 주었던 <케빈에 대하여>(2011)의 케빈이나 <소년의 시간>(2025)의 제이미를 떠오르게 한다. 케빈과 제이미, 그리고 소현은 아이의 얼굴을 하고 자신의 논리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상대가 아플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는, 스스로가 아이라는 사실이 어떠한 알리바이로 작용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아는 이들이 보여주는 섬뜩함은 그 이유를 알 수 없기에 그만큼 많은 이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과 소현이 다른 점이 있다면 소현은 성인으로 성장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일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케빈과 제이미가 자신만의 범죄를 완성하고 남은 이들에게 충격과 혼란을 주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면 <침범>은 그 이후, 그러니까 그들이 사회에서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겠다는 욕망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드러내는지에 집중하려 했던 것이다. 영은이 소현을 포기해버렸던 그때에서 20년 후, 영화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영화는 마음을 굳게 닫고 특수청소업체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민(권유리)과 이곳에 갑작스레 끼어든 해영(이설)을 등장시키며 두 사람 사이에서 과거 소현의 흔적을 찾게 한다. 영화 속 민은 동명의 웹툰 <침범>에서의 민과 성격을 달리하면서 폐쇄적이면서도 냉소적인 인물로 분하고 타인에게 사근사근한 해영보다 훨씬 소현과 가까운 듯 그려진다. 그러나 민과 그를 둘러싼 이들에게서 민을 구하겠다는 이유로, 한편으로는 이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이유로 점차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해영의 행동들은 천천히 소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러한 혼란스런 힌트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위험한 인물로의 연결이 얼마나 피상적인 것이었는지를 짚어내면서 내면을 숨기며 누군가의 삶에 침범하려 드는, 아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섞이고 싶어하는 이들의 모습을 섬뜩하게 그려낸다.

영화의 후반에 접어들수록 해영의 악행은 강도를 더해가지만 해영은 이것이 자신이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반작용인 듯 움직인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자신을 그렇게까지 밀어내려 하지 않았다면, 자신의 과거를 파헤치지 않았다면 아마도 해영은, 그러니까 소현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는 완벽하게 소현의 알리바이이며 이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며 또 누군가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를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의 해결법일 뿐이다. 영화는 해영의 행동이 섣부른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민과 현경(신동미)의 고통을 배치하며 자신만의 논리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영화가 도달한 곳은 이러한 해영을, 그리고 소현을 개인이 결코 말릴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벽 앞이었다. 결국 누구에게도 녹아들지 못했던 소현은 큰 상처를 입은 채 이미 세상을 떠난 영은을 만난다. 환상이면서도 너무나 현실의 만남처럼 연출된 이 순간 영은은 마치 자신의 업보처럼 남은 이 아이와 자신의 운명을 함께 하려 한다. 나와 같이 가자고, 더 이상 사람들을 해치지 말자고. 그러나 소현은 그런 영은을 다시 한번 잔인하게 외면하며 끝까지 자신만의 존재 증명을 할 것이라는 암시를 남긴다. 이 영화가 가장 무섭게 그린 현실은 바로 이 순간이다. 가족이든 혈연이든 어떠한 개인적 관계로도 ‘이미 그렇게 태어나버린’ 이들을 막을 수 없다는 것, 이제 여기에서부터는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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