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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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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 스페셜 2017 <광란의 사랑>2017-08-10

 


90년대 미국으로 되돌아오는 불안 - <광란의 사랑> 

 이지원 부산시민평론단


Dureraum summer special 2017 서머 스페셜 2017 2017.08.03목 ~08.31목


1989년 <트윈픽스>의 파일럿 에피소드 편집을 막 끝낸 린치는 우연히 맡게 된 새로운 프로젝트에 매혹된다.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세계 속에서 희망을 품고 있는 한 연인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광란의 사랑>은 린치에게 당대 미국을 다루는 시의적절한 이야기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연인이 폭력적인 세계에 굴복하여 결국 이별을 선택하게 되는 원작의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린치는 그의 특기인 무의식처럼 틈입하는 강렬한 이미지, <오즈의 마법사>에서 빌려온 동화적 낙관성, 50년대 엘비스 프레슬리 스타일의 터프함으로 영화 <광란의 사랑>을 직조해낸다. 


영화는 로드무비의 형식을 빌려 한 연인의 여정을 그리고 있지만 일반적인 영화처럼 그들의 만남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고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그들이 처한 상태를 보여주는 한 시퀀스로 시작한다. 파티장에서 걸어 나오는 두 주인공, 세일러와 룰라의 모습이 보이고, 한 남자가 그들에게 접근한다. 남자가 룰라에게 추근대는 듯하더니 세일러에게 다가가 그를 죽이고 룰라를 차지할 거란 말을 하자, 분노한 세일러는 남자를 죽음에 이를 때까지 구타한다. 룰라는 울부짖고 먼발치에서 이 모든 사건을 꾸민 장본인인 룰라의 어머니가 그 광경을 지켜본다. 세일러라는 인물이 가진 야성적인 기질, 그런 세일러와 함께하면 항상 위협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는 룰라, 세일러를 룰라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계략을 꾸미는 룰라의 어머니, 격식 있는 파티장소가 순식간에 살인현장으로 변모하는 기이한 상황까지, 첫 시퀀스는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된 에너지를 이상하지만 요약적인 방식으로 제시한다. 실질적으로 이야기의 진행과 관련된 사건은 아직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본 것만 같은 돌연한 느낌을 준다는 점은 데이빗 린치 영화의 고유한 인장과도 같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세일러가 남자를 죽인 죄로 감옥에서 2년간의 수감생활을 한 끝에 가석방된 뒤, 룰라와 함께 캘리포니아를 향해 미국을 횡단하는 여행길에 오르면서부터 시작된다. 린치가 그들의 여정을 그리는 방식은 하나의 선형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마치 반복강박과도 같다. 두 사람이 차를 타고 달려서 도착한 어느 도시의 호텔방에서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고, 침대 머리맡에서 기억 속에 떠오르는 그들의 불행했던 과거 이야기를 나눈 뒤에 호텔방을 나서면 도시의 갱스터들과 연루되어 사건이 벌어지고, 또다시 두 사람이 도시를 떠난다는 일정한 사건 구조의 반복을 통해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복성은 그들이 대화를 나눌 때 피우는 담뱃불을 비롯한 붉은 이미지의 강렬함을 통해서 관객의 뇌리에 새겨진다. 붉은 이미지, 그리고 이야기가 반복강박적으로 전개된다는 점은 두 사람의 트라우마적인 의식세계와도 연결된다. 룰라는 13살에 엄마와 알고 지내던 남자에게 강간을 당한 뒤에 낙태한 경험이 있고, 과거에 룰라 어머니의 애인인 산토스의 운전기사로 일하던 세일러는 우연히 두 사람이 작당하여 룰라의 아버지를 죽이고 시신을 불태우는 현장을 목격한 바가 있다. 그러나 과거의 사건들은 여전히 현실의 사건들로서 그들에게 반복적으로 돌아오고, 여전히 그들을 위협하고 있다. 룰라는 여행길에 맞닥뜨리는 폭력적인 남성들에게 성적으로 대상화되고, 임신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세일러는 룰라의 어머니가 고용한 사설탐정과 산토스에게 쫓기는 처지가 된다. 이때 룰라의 어머니는 두 사람 모두의 트라우마적 사건의 근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그녀 또한 히스테리컬하고 불안정한 존재이다. 그녀가 세일러를 죽이고자 하는 것이 자신의 딸을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영화의 도입부 이전에 일어난 사건, 즉 세일러가 그녀의 유혹을 거부했던 일 때문에 질투하는 것인지조차 영화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한편 중반부까지는 그녀가 주도적으로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음모를 꾸미지만 이후로 음모는 그녀의 손을 떠나서 암흑세계의 논리대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세일러를 쫓던 사설탐정이 의문사하자 두려움을 느낀 그녀가 세일러를 죽이려는 계획을 접은 뒤에도 다른 누군가는 여전히 계획을 세우고 있다. 


룰라와 세일러의 반항적인 여정을 끝내는 것은 베트남 참전용사 출신인 갱스터 페루이다. 그는 최종적으로 세일러의 목숨을 끝장내는 임무를 맡은 자로, 두 주인공에게 위협적으로 접근해서 룰라를 강간하려 함으로써 또다시 그녀의 트라우마를 끄집어내고, 세일러를 유혹해 강도 사건에 가담케 한다. 이때 세일러는 페루에게서 불안한 기운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사람처럼 그의 유혹에 넘어간다. 영화는 원제인 ‘야성적인 기질(Wild at heart)’과도 같이, 세일러가 이러한 성격을 가진 탓에 비극을 자초하는 것과 갱스터 세계의 무자비함이 세일러를 삼켜버리는 두 가지 방향성을 동시에 그리고 있다. 앞 세대의 온갖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들이 사회의 암적인 존재로 묘사되고, 이들이 두 주인공을 향해 마수를 뻗을 때 같은 속력으로 달려가서 충돌하는 주인공은 그 자체로 기이한 시대적 불안을 담고 있다. 1970년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와 같은 영화에서는 방종한 남녀 주인공이 끝내 법의 심판을 받음으로써 아메리칸 드림의 불가능성을 다루었다면 1990년대 <광란의 사랑>에서 비슷한 유형의 주인공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표백된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이는 동화적 차원에서만 성립 가능한 요원한 희망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돈도 없고 잃을 것도 없는 자들 사이에서 피어난 연대가 무모한 사랑으로 발전해나가는 이전 시기의 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두 인물이 서로를 사랑한다는 점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 연인이 결별하는 원작의 결말을 거부했던 린치는 이토록 사랑하는 연인이라면 결국에는 결합하는 것이 더 진실한 결말이라 보았다. 한편 두 사람의 사랑은 사회에 대한 도피처일 뿐만 아니라 사회와 마찬가지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가정에 대한 도피처로서의 사랑이기도 하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서쪽마녀를 피해 여행을 떠난 도로시는 구두 뒷굽을 맞부딪히며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한 번도 이루어보지 못한 새로운 가정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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