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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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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 스페셜 2017 <안개 속의 풍경>2017-08-10

 


목적도 없고 갈 곳도 없는 여행 <안개 속의 풍경>


한동균 부산영화평론가협회

   

Dureraum summer special 2017 서머 스페셜 2017 2017.08.03목 ~08.31목


그리스 모처에 사는 어린 남매, 볼라(타니아 팔라이올로구)와 알렉산드로스(미카리스 제케)가 아버지를 찾아 독일로 향한다. 이 간략한 로그 라인은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1988년 작 <안개 속의 풍경>이 로드 무비임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리고 대게 로드무비가 그렇듯이, <안개 속의 풍경> 또한 두 남매가 여정을 따라 그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여주는 성장 영화의 방식을 취한다. 갈매기를 흉내 내는 동네 바보, 공장의 노동자,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경찰서의 여자, 도망치는 신부, 죽어 가는 말, 공연할 극장을 잡지 못하는 유랑 극단 등, 당시 그리스의 시대적/사회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배경들이 두 남매가 걷는 여정의 배경을 채우고, 아이들은 세상의 따뜻함과 가혹함을 함께 알아가기 시작한다.


다만 <안개 속의 풍경>과 여타 다른 ‘엄마 찾아 삼만리’부류의 영화들과 다른 점은 주인공 볼라가 스토리의 초반부에 이미 자신에겐 찾아갈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 버렸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볼라 자신 그리고 이 남매의 여정은 목적을 잃은 채로 목적지로 나아가는, 우리 대부분의 삶을 연상하게 한다. 볼라의 첫사랑 오레스테(스트라우 초조글로우)는 이들과 함께 밤의 골목을 걸으며 말한다. “너희들은 재밌는 아이들이야. …… 갈 곳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디론가 가고 있어. …… 나는 공허 속으로 기어들어 가고 있는 달팽이일 뿐이야. 한때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라.” 곧 그들은 거리에 버려진 영화 필름 조각을 발견한다.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은 안개 속의 풍경이다. 오레스테는 안개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프레임의 너머에 나무가 보이지 않느냐고 남매에게 묻는다. 안개 너머에 나무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풍경은 볼라와 알렉산드로스가 향하는 그들만의 ‘독일’ 그리고 ‘아버지’와 맥락을 같이 한다. 독일에 도달하더라도 그곳엔 그들을 기다리는 아버지가 없을 것이란 사실과 그들 자신조차 독일의 어느 지방으로 향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며 맹목적으로 앞으로만 나아가는 그들은 모습은 삶의 저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일단 생을 소비하며 어딘가로 떠내려가는 우리의 모습과 다름없다. 그리고 아버지의 부재를 부정하는 볼라의 모습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우리의 모습 같기도 하다.  


몰래 탄 기차에서의 어느 밤, 볼라는 아버지에게 말한다. ‘친애하는 아버지, 당신은 이토록 멀리 있네요. 알렉산드로스가 꿈에서 본 당신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웠다고 합니다. 우리는 계속 나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것이 너무 빨리 스쳐 가고 있어요. 도시들과 사람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지쳤습니다. 당신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에요. 우리는 목적지를 잃었습니다’. 수신자에게 전달 될 리 없는 발화를 마음속으로 행하는 볼라의 나래이션은 얼핏 관객을 위한 친절한 장치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일종의 기도문 같이 들리기도 한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아이들이 찾아 헤매는 ‘아버지’가 신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심증은, 테오 앙겔로풀로스가 자신의 침묵 삼부작 중 마지막 작품인 이 영화에 ‘신의 침묵’이라는 부제를 달았다는 사실에서 좀 더 힘을 받는다. 영화의 초반부와 후반부, 아버지를 찾는 여정의 전날 밤과 그들이 마침내 안개 너머의 나무에 도착한 순간 볼라와 알렉산드로스가 각각 창세기의 맨 앞 구절들을 읊는 장면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신이 누구인지 추측할 수 있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앞선 문단에 옮겨 놓았던 볼라의 기도는 보이지 않는 희망과 구원을 갈망하며 나아가지만, 돌아오지 않는 응답에 지쳐 방황하는 신자들의 모습과 겹친다. 


야속하게도 볼라와 알렉산드로스의 신과 아버지는 이 여정 내내 그들에게 응답하지 않는다. 도망가던 신부는 다시 잡혀가고, 볼라가 트럭 운전사에게 강간을 당할 때, 우리가 신적 존재에게 바랄 수 있는 종류의 구원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구원 대신 앙겔로풀로스가 영화 속에 배치한 것은 어떠한 종류의 냉소이다. 볼라와 알렉산드로스가 끌려가던 말의 죽음을 목격하고 눈물 흘릴 때, 마을 어딘가에선 떠들썩한 결혼식의 소음이 들려 오고, 곧이어 자신의 운명을 체념한 듯 다시 웃고 떠드는 신부를 비롯한 잔치의 군중이 몰려나온다. 볼라가 트럭 운전사에게 강간을 당하는 장면의 원경에 갑자기 등장한 젊은 여행자들의 떠들썩한 카 오디오 소리 또한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나의 슬픔과 고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잘 돌아가기만 하는 세상의 존재를 끊임없이 각인시키고, 앙겔로풀로스가 전경과 원경으로 나눠 놓은 비극과 희극 사이엔 마치 헤쳐 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 안개가 존재하는 듯만 하다. 


영화의 말미, 국경에서의 총성이 울린 후 마치 판타지와 같은 공간에서 볼라와 알렉산드로스는 안개 뒤편의 나무를 발견한다. 남매는 독일에 사는 아버지가 아닌 것은 자명하지만, 그들의 여정 내내 어떠한 희망의 지표가 되어 주었던 국경의 나무로 달려가 포옹한다. 마치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버지를 찾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원하는 지점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안개 뒤편의 나무가 정말로 그들의 아버지라고 하더라도, 그토록 무수한 고난을 겪어 내며 찾아낼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결국, 앙겔로풀로스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것이 희망일지 냉소일지는 감히 단언하기 어렵다. 각자의 안개 속에서,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혹은 더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확신조차 없이 매 순간의 기로에 서 있는 우리는 자신의 결론을 내리는 것만으로도 버겁지 않은가. 행복은 과연 안개 속의 나무처럼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느 지점에 위치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아 우리의 나무를 심어야 하는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마치 나로서는 아직도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이제는 안개 너머 원경에 자리 잡은 두 남매가 진정으로 웃고 있었기만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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