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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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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마노 올미&마르코 벨로키오 <우든 클로그>2018-06-11
review 5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유네스코 영화 창의도시 특별전 에르마노 올미 & 마르코 벨로키오 ermanno olmi & marco belloechio 2018. 5.27(일) ~ 6.17(일)

 

평범하기에 비범한 영화 <우든 클로그>

 

김지연(부산영화평론가협회)

 

  영화 속 인물들을 사랑하지 않고도 영화를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같은 영화를 만들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에르마노 올미는 생전에 여러 편의 장편영화와 그보다 몇 배많은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고 알려졌다. 그 가운데 내가 본 것은 <직업>(1961), <약혼>(1963), <우든 클로그>(1978) 고작해야 세 편에 불과하다. 이 미약한 지평 위에서 작가에 대해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고 또 어설프게 그렇게 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심정으로 최소한 내가 본 영화들에 한해서라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올미는 자기의 영화 속 인물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아가, 이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다소 건방진 발언이 허락 된다면 보지도 못한 그의 영화들 전체에 걸쳐 이 주장이 유효할 거라고 추측한다. 개인과 삶, 사람과 사람의 유대, 사람들의 관계, 나아가 그들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서 작가가 갖추는 태도란 쉽게 변질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든 클로그>의 오프닝 시퀀스로 이 영화, 나아가 올미의 세계관이 설명될 수 있겠다. 추수를 앞둔 옥수수 밭, 푸른 들판과 개울, 단정하게 앉은 집들. 아름다운 농촌 마을 곳곳의 풍경이 몽타주로 이어지며 아이들의 찬송가가 들려온다. 지주의 소유이기 이전에 이 세계는 신의 영토다. 가톨릭 색채가 덜한 나머지 두 영화를 아우른다면 우주와 자연, 세상의 이치에 따라 흘러가는 공간이라고 바꾸어 말해도 좋다. 때가 되면 땅을 일구고 짐승들을 먹이고 결실을 수확하는 농부의 모든 일들이 그 질서 아래에 놓여 있다. 그래서 이후에 거위나 돼지를 잡는 장면에서 놀랄 수는 있지만 그 쇼트들이 잔학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생명의 순환이 그 범주에 포함되고 있다는 걸 상기시키는 영화의 태도가 이를 가능하게 한다. 카메라는 농가의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사건의 하나로 도축의 과정과 결과물을 바라보고 있다. 죽음의 이미지들을 착취하거나 거기에 탐닉하는 과오를 결코 범하지 않는다.

남은 시퀀스에 대해서 마저 이야기하자. 풍경들에 이어서 곧바로 난처한 바티스티의 얼굴 쇼트가 나타난다. 그는 신부님으로부터 아들을 학교에 보내라는 말씀을 들은 참이다. 언제나 열심히 일하지만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농부는 신부님의 권위 앞에 소심하게 저항한다. 학교까지는 거리가 너무 먼데요, 아이가 집안일을 도와야 할 텐데요, 저는 학교 근처에도 안 가보고 잘 컸는데요…. 신부님은 거기에 번번이 일축을 날리다가 하느님의 뜻이라는 최종 카드를 꺼내 승리를 관철한다. 그들의 대화는 속도가 빠르거나 대사가 많지도 않지만, 두 인물, 나아가 두 세계, 현실과 이상이 각축하는 현장이라 스크루볼 코미디 같은 느낌마저 준다. 그들의 대화 안에서 공유되는 가치는 사람들 각자에게 부여된 역할, 사명, 운명 같은 것들이 있고 사람들은 그 테두리 안에서 머무른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올미의 세계관은 순응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혹 그들을 수동적이거나 세상의 규칙에 안주하거나 세상과 타협하는 데에 그치는 비자주적인 인간 군상이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영화 속 인물들이 변화와 혁명의 선두에 서거나 그에 동조해 목소리를 낼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올미의 관심은 그렇게 비범한 이들에게로 향해있지 않다. 엄밀히 말해 그의 인물들은 그럴 겨를이 없이 하루하루가 고달픈 사람들이다. 그들은 뜨거운 연설문보다 발치에 떨어진 금화에 눈이 번쩍 뜨이고, 추수한 옥수수의 무게를 늘리려고 슬그머니 돌을 싣는 농부들이다. 노래와 이야기를 조르는 천진한 아이들이고, 빠듯하게 살아도 떠돌이에게 먹을 것을 내주고, 산파를 대신해 출산을 돕는 아낙들이다. 보통이거나 어쩌면 평균치보다 더 형편이 어려운 노동자, 약자들이라는 말이다.

한 편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의 인물들은 찻잔 속 태풍에 불과할지라도 각자 그들의 삶 안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가기에 나름대로 비범하다. 바티스티는 부모 된 마음으로 먼 길을 통학하는 아들의 나막신이 망가진 걸 두고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지주의 나무를 베어 나막신을 깎는 모험을 감행한다. 안셀모 할아버지에게는 남들보다 이르게 토마토를 수확하는 비법이 있다. 그것은 어린 손녀에게 전해질 것이다. 룬크 부인은 수의사가 포기한 소를 간절한 마음으로 살려내고, 성당에 갈 틈도 없이 삯빨래를 해서 자식 여섯을 건사한다. 열다섯 살 밖에 안 된 그의 장남은 제가 밤낮으로 일할 테니까 동생들을 고아원에 보내지 말고 함께 살자고 한다. 어린 아이들도 어떻게든 일을 돕는다. 빨래를 실어 나르고, 옥수수를 털거나 담을 때 자루라도 벌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바티스티 가족이 쫓겨나는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훌륭한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올미가 진정 포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부분일 것이다. 이웃들은 섣불리 바티스티에게 말을 붙이거나 다가가지도 못한다. 농부로서 집과 땅을 잃는 고통, 앞으로 그들 가족이 짊어질 까마득한 생의 무게에 대해서 감히 아는 체 할 수도 없거니와 무슨 말로도 위로할 길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토지 관리인도 가축을 회수하는 업무에 충실할 뿐 침묵을 지킨다. 그로서는 자기 지위에서 표시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존중일 것이다. 카메라도 선뜻 바티스티의 곁으로 가지 못하고 망설인다. 그래서 창가나 문가에 붙어 바티스티의 살림이 나가는 걸 지켜보는 이웃들 근처에서 맴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마차가 떠난다. 이웃들은 비로소 문 밖으로 나와서 배웅을 한다. 타인의 불행을 호기심과 구경거리의 대상으로 소비하지 않고 도리로써 그들의 존엄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야말로 얼마나 비범한가.

주지하다시피 그것은 격동하는 당시 사회와 정치적 지형을 형성하는 데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요소다. 하지만 그 대수로울 것 없는 삶들과 사람들이 가지는 유대에는 품위가 깃들어 있다. 영화는 이 같은 가치를 귀히 여긴다. 저 멀리 바티스티의 마차에 매달린 호롱불이 깜박이며 사위어가는 저녁 어스름의 프레임을 횡단한다. 그리고 바흐의 장엄한 오르간 연주가 흐른다. 이 가난하고 외롭고 숭고하고 쓸쓸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익스트림 롱 쇼트 앞에서 우리가 옷깃을 여미고 경건해지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실낱같은 희망을 심어주며 누구도 속이지 않고 쉽사리 동정하고 연민하기를 거부하면서 그들을 그저 바라보는 것뿐인 이 영화의 시선, 올미의 결정에는 대상에 대하여 숨길 수 없는 사랑이 담겨 있다. 영화는 감상주의를 배격하지만 관객의 정서에 빚지고 추억이라 부를 수 있는 보편적 감성들과도 접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일은 관람자로서도 즐거운 것이리라. 한 마디 말이 없어도 좋아하는 사람과 시선을 마주치길 반복하다가, 이내 한쪽이 수줍어 고개를 숙이면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는 쇼트/리버스 쇼트를 보라. 그리고 이에 신이 난 청년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의 얼굴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지만 그 표정이란 안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장작이 타는 겨울의 벽난로는 얼마나 따뜻한 것인가. 옹기종기 그 곁에 모여 불꽃이 튀는 걸 보는데 할아버지가 지어내는 이야기는 얼마나 재미있는 것이고, 악마들이 굴뚝으로 도망간다고 하니까 몸을 기울여 유심히 굴뚝 안쪽을 보는 아이들은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피어오르는 불꽃들, 아니 도망치는 악마들, 일렁이는 난롯불에 빛나는 착하고 순수한 사람들의 얼굴. 세자르 자바티니는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현실은 그 자체로 굉장히 풍부하고, 영화는 그것을 직접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예술가의 과업이란 정교하게 짠 은유적인 상황들 속에서 사람들의 감정을 촉발하지 않고, 그저 실제로 사람들이 하고 있는 행동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관객을 숙고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그것이 사람을 감동하거나 분노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는 덧붙였다. 186분 동안 펼쳐낸 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서사를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가 거기에 동의할 것이다. 미학이 있기 전에 세계와 사람들을 대하는 고귀한 태도가 있다. <우든 클로그> 단 한 편만으로도 이 위대한 시네아스트는 충분히 그 성취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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