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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마노 올미&마르코 벨로키오 <호주머니 속의 주먹>2018-06-07
review 5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유네스코 영화 창의도시 특별전 에르마노 올미 & 마르코 벨로키오 ermanno olmi & marco belloechio 2018. 5.27(일) ~ 6.17(일)

 

<호주머니 속의 주먹> - 포스트-호모폴리티쿠스를 위하여

 

김영광 부산영화평론가 협회 

 

  마르코 벨로키오의 <호주머니 속의 주먹>(1965)은 ‘가족 살해’를 다루고 있다. 도심에서 떨어진 붕괴한 중산층 가정, 아버지는 부재하고 어머니는 장님이며 동생들은 간질 환자이다. 홑벌이 중인 장남은 결혼으로 부양의 책임을 벗어나려한다. 일을 벌이는 쪽은 정신 병력이 있는 무능력한 차남이다. 부양의 부담을 줄여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이없게도 가족을 위해 가족들을 살해한 것이다. 개봉 당시 격렬한 찬반논쟁을 일으킨 이 영화의 쟁점은 주인공 차남의 행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 감독 벨로키오가 차남의 행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있었을 것이다. 상부구조의 파급에 따른 피해자의 것이다, 감독은 피해자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찬성). 상부구조의 영향이 있을지언정 윤리⦁도덕적으로 가해자의 것에 해당한다, 상부구조를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인 것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반대). 가족 살해가 보통 경제적 여건으로 발단된다는 점, 그 발단이 대개 국가의 재정 상태 혹은 복지 정책과 연관된다는 동시대적 관점에서 말이다. 당대 이탈리아는 거대 공산당이 존재했으며(벨로키오는 1968년 공산당에 가입했다), 가족을 신성시하는 로마 가톨릭이 국교였으니 하등 이상할 게 없는 논쟁인 것이다.

 

  저 찬반논쟁을 보며 승리했다고 생각한 사람은 벨로키오 자신이었을 것이다. 벨로키오는 이 영화에서 차남의 행위를 첫 번째로 살해된 어머니가 평생 모은 잡지(“가족을 위하여”)의 비극 버전이란 느낌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을 실족사로 둔갑시킨 차남의 거짓말에 침묵, 호응, 중립을 지킨 가족들의 반응은 물론, 경제적 부담이란 명분을 넘어 가족 살해에서 희극적 느낌을 갖는 차남의 행실도 부정하지 않았다. 벨로키오는 한쪽의 이해에 기운 행위가 아니라 양극단의 이해가 모순되지 않는 ‘느낌’의 존재로서 차남을 보여줬던 것이다. 그러니 찬반논쟁은 예고된 것이며 조장된 것이다. 경제적 부담이나 가족이란 명분은 차남의 행위를 설명할 수 있을 뿐 그 ‘느낌’의 존재를 설명할 순 없을 테니까. 그런 사정으로 차남의 존재를 설명할 단서는 행위의 인과관계가 아니라 인과관계로 설명되지 않는 느낌의 사건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첫 번째 사건, 영화 초반 자신을 포함한 모든 부양가족을 몰살시키려했던 차남의 계획은 별 시답지 않은 사건으로 무산된다. 가족들을 태우고 절벽으로 차를 몰던 중 무뢰배들과 뜬금없는 추월 경쟁을 벌인 것이다. 평소 소심한 차남은 웬일로 경주에서 승리한다. 차남은 왜 계획에도 없는 사건에 자신이 몰입했는지 어리둥절한 눈치다. 다만 사건 과정에서 자신을 유령 취급하던 여동생의 지지를 얻은 것이 나름 성과라고 여기지만 말이다. 이 첫 번째 사건의 느낌은 차남이 가족 대 외부라는 일종의 적대 관계, 자신도 모르게 동지와 적이 나뉘는 상황에 빠져들고 주력하는 존재임을 내비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세웠던 계획도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차남은 자신을 포함한 부양(가족)들이 가장(가족)의 적이라고 생각해 몰살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사건은 이 영화의 느닷없는 결말이다. 차남은 어머니 다음으로 남동생을 살해했고, 차남을 지지하던 여동생은 충격을 받아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이에 장남은 고민에 빠지고 만다. 마침내 장남을 가족 부양에 붙들려했던 차남의 목적이 거의 달성된 것이다. 자기 방에서 희열에 몸을 가누지 못하던 차남은 갑자기 찾아온 두통에 몸부림치며 비명(“내 머리를 잡아줘!”)을 지른다. 이 두 번째 사건이 주는 느낌은 꽤나 노골적이다. 가족 내부에서조차 적과 동지를 끊임없이 나누고 서슴없이 살해까지 행하는 그놈의 머리, 차남은 바로 그러한 문제적 사유체계를 타고난 존재인 것이다. “정치적인 것”이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행위라는 칼 슈미트의 개념이 그대로 적용되는, 말하자면 선악, 미추,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한 명의 “정치-인간”, 태생적인 “호모폴리티쿠스”인 것이다.

 

  벨로키오가 <호주머니 속의 주먹>을 장편 데뷔작으로 삼은 건 두 가지 맥락에서 추측될 수 있다. 하나는 찬반논쟁에 걸쳐진 맥락이다. 가족 혹은 집은 정치적인 것으로부터 결단코 보호해야 할 보루로 여겨지지만 외부에 잘 노출되지 않는 관계로 가장 정치적인 곳일 수 있다는 문제제기다. 다시 말해 국가 이탈리아의 근본이라 여겨지던 정신적 상부구조(신성-가족-사회), 그 삼위일체에 난 심각한 흠결(문제적인 사유체계)을 처음부터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중요한 건 두 번째, 찬반논쟁에 반하며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개념에도 반절하는 맥락이다. 알다시피 국가 이탈리아는 수많은 국민이 정치-인간이었던 파시즘의 역사를 통과했다. 그런데 파시즘 이후 등장한 정치-인간, 이른바 “포스트-호모폴리티쿠스”들에게 돌아오는 건 앞서 말한 찬반 논쟁 같은 이해의 범주인 것이다. 문제라면 포스트-호모폴리티쿠스들은 반성의 주체도 될 수 없지만 존재 자체가 찬반의 대상으로 취급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포스트-호모폴리티쿠스에 관한 찬반논쟁은 브루디외의 “구별짓기”에 가까운, 모종의 부르주아적 마인드에 기반한 무시의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포스트-호모폴리티쿠스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존재의 영역에서 배제시키는, 그들을 배제하면서 자신들을 존재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단합인 격이다. 사실상 존재의 배제를 논하는 단합 자체가 너도나도 호주머니 속에 “정치-인간”을 웅크려 놓았다는 무의식적 고백이련만, 의식적인 자백은 스스로가 배제의 대상임을 자인하는 최후진술이 돼버리는 것이다(영화 제목이 괜히 <호주머니 속의 ‘주먹’>이 아닌 것이다. 호주머니 속에 주먹을 넣어둔다고 주먹이 아닌 게 되는 것도 아니고 주먹을 넣어 둔다고만 해서 주먹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벨로키오는 그 담합의 격렬한 양상만은 영화적으로 조장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포스트-호모폴리티쿠스들이 존재의 영역에서 배제되는 것이 현실일 때 그들을 존재의 영역으로 포함시킬 현실적인 방법이란 없기 때문이다. 벨로키오가 포스트-호모폴리티쿠스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한편 극중 배경과 상황을 위악적으로 조성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 격렬한 단합만이 <호주머니 속의 주먹>의 생명을 연장하고 포스트-호모폴리티쿠스의 배제를 연기시키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영화가 논해지는 동안 포스트-호모폴리티쿠스는 찬반도 적대도 아닌 ‘배제적 포함 관계’가 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 <호주머니 속의 주먹>의 관계로, 아감벤이 슈미트 개념의 나머지 절반으로 제안한 정치적인 것의 두 번째 맥락으로 말이다.

  이 두 번째 맥락은 왜 중요한가? “정치적인 것”에서 최소한의 공생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저 두 번째 맥락은 왜 벨로키오에게 중요한가? 이 영화의 주도면밀함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벨로키오 본인이 파시즘 이후의 정치-인간, 포스트-호모폴리티쿠스이기 때문이다. 벨로키오는 극중 차남이 벌인 가족 살해조차 느낌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어떤 정치적 보호도, 누구의 관심도, 대부분 배제된 느낌으로 살아온 차남의 존재를 정말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호주머니 속의 주먹>을 장편 데뷔작으로 삼은 벨로키오의 근본이자 이 논쟁적인 영화가 승리했다고 생각하는 벨로키오의 본질이다. 자신을 배제하지 않고도 존재 증명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벨로키오는 자신의 ‘문제적인 사유체계’에서 공생을 조장하는, 공생의 조장이 자신의 ‘태생적인 사유체계’와 다름없는 “영화적 호모폴리티쿠스”인 것이다.

 

  벨로키오는 2009년작 <승리>를 만들고 나서야 그 정체성에 어울릴 만한 평가를 얻은 듯하다. 「정치적 영역 안에서 시네마틱한 자아」(2010, 클로다프 J. 브룩).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영화적 호모폴리티쿠스”였으며 <호주머니 속의 주먹>은 그 정체성에 해당하는 영화이다. <승리>는 그 정체성에 대한 노골적인 커밍아웃에 가깝다. 무솔리니에게 버려진 연인 달세르가 영화 주인공이지만, 그녀는 자기 말마따나 무솔리니와 “생각과 원칙”이 같은 존재인 것이다. ‘사랑=승리’의 등식을 가진 정치-인간 달세르가 ‘승리=이상’의 등식을 가진 정치-인간 무솔리니를 탐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 관계로 이 영화는 무솔리니를 제법 매력적인 구석이 있는 정치-인간으로 보이게끔 만들고, 결국 그 위험한 매력에 취한 달세르를 따라가면서 너도나도 호주머니 속 정치-인간을 고백하게 되는 꼴이다. 극중 정신과 의사의 말처럼, 벨로키오가 “태도와 방법, 시기”를 달리하여 노골적인 조장에 나선 것일 뿐이다. 물론 조장의 포인트는 같다. 적과 동지를 나누는 행위는 폭력의 여지를 가시적으로 준비시키지만, 포함과 배제로 나누는 행위는 폭력의 가능성을 비가시적으로 비준시킨다는 점이다. 해서 자신에게 존재하는 정치-인간의 느낌을 고백하는 것, 나아가 자백을 시도하는 것이 최소한의 공생을 조장하는 유리한 방책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승리>보다 중요한 영화는 2003년작 <굿모닝, 나잇>에 해당할 것이다. 벨로키오가 자신의 정체성과 다른 이면의 정체성을 제기하고 요청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극좌세력이 우파 정당의 전직 당수를 살해하고 종신형을 받은 실화를 다루고 있지만, 상호비판이나 재현의 문제는커녕 예기치도 못한 기묘한 틈을 만들어낸다. 그 틈은 양쪽이 공생의 길을 포기한 순간 Pink Floyd의 “The Great Gig In The Sky”가 흐르는 전기 충격 같은 시퀀스에서 벌어진다. 그 틈으로 벨로키오는 흔히 말해지는 재현된 영화를 보는 행위, 재현된 영화의 시선으로부터 (자아가) 보여지는 느낌을 넘어 그 영화의 시선을 느끼며 다시 보는 쪽의 시선으로 응수하는 동안만 (배제적 포함 관계로) 존재하는 영화적인 자아를 제기한다. 놀랍게도 “비평적인 것”이 포함될 틈을 영화 속에 조장한 것이다. 비평critic은 ‘판단하다’, ‘분별하다’, ‘기준’이란 뜻을 포함한 그리스어 크리네인에서 나왔다. 그리고 예술이 인간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기준을 마련한 미학의 역사는 비평과 함께 출발한 것이다. 결국 비평은 종교가 아닌 ‘인간의 것-정치’를 떠나서 논해지기 어렵고, 그렇기에 비평은 ‘예술적인 것-미학’의 기준을 마련할 수도 있는 것이다. 벨로키오가 <굿모닝, 나잇>에서 요청하는 “비평적인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제기다. 그조차도 모순적인 제목과 비현실적인 결말을 가진 주제에 재현이라는 윤리⦁도덕적 문제, 재해석이라는 미학적 문제, 열린 결말 같은 자폐적 취미판단은 (배제할 순 없지만) 비평적으로 부정하겠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것’의 두 번째 맥락에서 양쪽이 공생할 수 있었던 판단, 분별, 기준을 주장할 수 있는 비평만을 (포함할 순 없지만) 영화적으로 긍정하겠다는 것이다. 『달의 이면(The Dark Side of the Moon)』처럼 취급되는 비평적인 것의 틈을 조장해줬으니 “천부적인 재능(The Great Gig In The Sky)”으로 목소리를 내보라는 것이다. 비평이 종교에서 인간적인 것을 분리해냈다면, 정치에서 예술적인 것의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비평이라고 말이다. 벨로키오의 <굿모닝, 나잇>은 영화적 공생을 위해 “비평적인 것”을 정치적인 맥락에서 비평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뭐라 할까? 한명의 “비평-인간”의 면모를 보여줬다고 할까? “영화적 호모폴리티쿠스”의 이면에 해당하는 “호모-크리티쿠스”를 도발했다고나 할까?

 

  다소 생소한 개념을 설정하게 된 건 벨로키오의 최근작 <나의 혈육>(2015), <달콤한 꿈>(2016)을 이해하는 데 “영화적 호모폴리티쿠스”와 “호모-크리티쿠스”의 공생관계, 혹은 이면관계라는 ‘남-같지-않음’이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 정도까지는 말할 수 있겠다. 두 영화에서 시간의 구조가 주름 접히게 된 건 벨로키오가 모종의 “트랜스-크리틱”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지점은 변함없이 단순한 것이겠다. 벨로키오는 앞으로도 공생을 바라는 “정치-인간”들, 문제적인 사유체계를 가진 “포스트-호모폴리티쿠스” 위하여 영화를 찍을 것이라는 점이다. 벌써 눈치 챘겠지만, 그 중에 포함된다는 게 정말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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