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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오퓔스 특별전 <말썽 많은 돈>2018-05-02

 

막스 오퓔스의 <말썽 많은 돈Komedie om geld>

: 오퓔스를 찾기 위한 블랙코미디식 추론

 

장지욱(부산영화평론가협회)

 

    이 글은 우선 내 스스로가 그다지 오퓔스를 열심히 만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시작해야 한다. 달리 말해 제한된 애정에 머물렀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게 있어 막스 오퓔스는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1948)나 <마담 드...>(1953), <로라 몽테>(1955) 와 같은 대표작들에서 드러난 만연한 우울과 아득한 낭만의 교차, 또는 비극적 단상들이 켜켜이 쌓여 암울의 시로 기억되는 감독이다. 그는 암울이 드리워진 베일을 벗은 적이 없었다. 독일인으로서 프랑스와 미국을 오가며 영화를 만들어야 했던 망명의 운명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불운한 시대의 그림자 때문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다 보게 된 <말썽 많은 돈Komedie om geld>(1936)은 여러모로 오퓔스에 대한 환기를 불러일으키는 영화이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도 오퓔스의 베일을 벗기려고 한 적이 없었다. 이것이 내 앞선 고백의 이유다. 직역하면 ‘돈에 관한 코미디’, ‘돈 때문에 벌어진 코미디’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브란트라는 은행원이 우연찮게 은행에 반납해야 할 돈을 잃어버리고서 회사에서 해고된 이후의 곡절을 따라가는 소동극이다. 또 영화 시작과 중간, 말미에는 광대 분장을 한 해설사가 나와 영화 전개를 정리하는 막간극 형식을 보인다. '코미디’라는 단어를 앞세운 제목과 우스꽝스러운 광대 모습의 포스터가 풍기는 분위기만 보아도 이 영화는 오퓔스 답지 않다. 그리고 '오퓔스 답지 않음'은 이 영화에 주목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그동안 투박하게만 품고 있던 막스 오퓔스의 세계가 이 영화를 통해 조금은 더 넓어지기를, 그럴만한 게 이 영화에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다행이 ‘혹시나’라는 기대에 대한 충족이 있다. 그리고 그보다 큰 ‘역시나’도 공존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로 그는 암울이 드리워진 베일을 벗은 적이 없다.

 

    오퓔스의 '혹시나'를 만나는 장면을 살펴보자. 우선 <말썽 많은 돈>에서는 공격적인 오퓔스를 만날 수 있다. 은행장인 무어맨이 브란트를 불러 대화한다. 무어맨은 억지인 듯 궤변인 듯 관념적인 자본론을 늘어놓는다. 브란트는 평범과 상식의 일상을 살아온 소시민이고 무어맨은 전문가이며 권력자다. 돈을 잃어버린 일을 계기로 마주하는 두 사람은 좁혀지지 않는 괴리의 대화를 이어간다. 여기서 무어맨에게 다가가는 카메라는 전에 없이 적극적이다. 무어맨이 열변을 토할수록 카메라는 다가간다. 바스트 쇼트에서 클로즈업으로 그리고 카메라는 다가가기를 멈추지 않고 프레임 안의 무어맨의 얼굴이 프레임을 넘어설 때까지 지켜본다. 무어맨의 클로즈업은 영화 속에 두 번에 걸쳐 반복되는데 이들 장면으로부터 전해지는 고압적이고 일방적인 이미지는 오퓔스의 다른 영화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의 후반부에 리사가 피아니스트인 스테판 브란트의 집을 다시 찾아가고 그런 그녀를 남편이 마차에서 지켜보는 장면에서 남편의 분노가 관객에게 전달되기까지 몇 겹의 프레임을 거쳐 전해지는가를 상기시켜보면 <말썽 많은 돈>에서 무어맨의 클로즈업 쇼트는 오퓔스의 세계에선 파격이라 할 법하다. 인물을 상징적으로 포착하고 심리를 반영하는 시도와 더 나아가 브란트가 지점장이 되면서 나오는 그의 대저택의 왜곡된 양식 등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와 닿아있다.

    <말썽 많은 돈>에는 오퓔스 다운 '역시나'에 호응하는 장면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브란트의 딸이 국외를 넘어가 한 남자를 만나 데이트를 즐기고 사랑을 나누는 대목이다. 이 시퀀스는 어찌 보면 영화 전개상 의아할 만큼의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먼저 언급한 표현주의 영향 아래의 장면과는 달리 탐미적이고 서정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막스 오퓔스의 '역시나'에 부합하는 여러 부연 설명이 있겠지만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그만의 우아함일 것이다. 공간과 인물을 바라보는 탐미적 시선과 동선을 쫓는 카메라의 점잖은 움직임, 그리고 공간 속의 사람이나 사람과 사람, 혹은 그 모든 것을 여러 형식으로 변주하는 플랑세캉스는 오퓔스의 우아함을 설명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주유소와 호숫가로 이어지는 데이트에서 나무와 호수를 지나 누워서 담소를 나누는 연인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자 우리에게 친숙한 오퓔스 스타일의 연장선에 있는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언급한 두 장면이 드러내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퓔스는 상이한 두 이미지를 한 영화에 담았다. <말썽 많은 돈>의 전반적인 스타일은 영화 중반을 지나면서 표현주의적 요소가 강해지고 그 과정에서 표현주의의 도식적 이미지는 서정적인 이미지와 대비되어 나타난다. 이는 영화 속에서 계급적 구분이라든가 그에 따른 위계적 관계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발현된다. <말썽 많은 돈>이 다른 오퓔스의 영화와 차별되는 점은 영화 속에 드러난 그의 사회적 시선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자신의 딸이 교제하는 남자가 독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브란트는 이를 완강히 거절하는데 이 장면에서는 나치즘이 횡행하던 당시 독일에 대한 그의 일침이 핀잔처럼 녹아있다. 브란트라는 남자는 또 어떠한가? 외면 받는 소시민이자 노동자였던 그는 갑작스럽게 지점장이 되고난 후 권력을 휘두르고 탐욕을 드러내는 기득권자의 면모를 보인다. 앞서 브란트와 무어맨의 장면을 언급하면서 상식적인 일상과 전문가의 충돌이라고 말 한 바 있다. 그 연장선에서 봤을 때 노동자의 소외와 권력자의 전횡이 은행이라는 한 공간에서 일어난다는 설정으로부터 출발해 통제되지 않는 욕망과 왜곡된 질서에 대한 비판은 자본주의적 질서의 폐해를 겨냥한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다. <말썽 많은 돈>이란 영화는 나로 하여금 이상한 망상증을 유발시킨다. 여러 층위의 실마리 같은 것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오퓔스에게 어떤 전환기적 작품이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가진 방향성에 대한 고민. 그 고민은 영화적 스타일에 대한 고민을 포함한 영화 내부로부터 시작해 오퓔스와 그가 살던 시절과 시대로서 확장된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사라짐에 대한 오퓔스의 사유가 언뜻 비친다. 영화에 나오는 막간극에서 광대가 나와 영화해설을 하는 장면은 당대에 있었던 보드빌의 일부분이다. 보드빌은 대중 공연으로 여러 나라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던 하위문화의 한 형식이다. 그리고 보드빌은 공연 중간 중간 짧은 영화를 상영하는 방식으로 영화가 출연한 이후 그 보급과 성장에 있어 나름의 접점을 공유하고 있다. 처음에는 공연 사이의 막간으로 짧은 영화가 상영되다가 영화의 파급력이 커지자 보드빌은 영화 전편을 상영하면서 앞뒤로 짤막한 공연을 구성하는 형식으로 바뀐다. 아마도 <말썽 많은 돈>의 구성은 보드빌의 마지막 시절에 선보인 구성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보드빌은 영화에 기대어 연명하다 결국 사라지는데 이 영화가 만들어진 1936년은 보드빌이 막을 내릴 시점에 해당된다. 오퓔스는 영화를 시작하기 전, 연극 연출가로서 활동을 했으니 공연 예술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하위형식이라 할지라도 공연문화로서 보드빌이 몰락하는 것을 바라보는 그의 심정에는 어떤 반향이 있었을 수도 있다. 게다가 그는 보드빌의 몰락에 일역을 담당한 영화라는 필드에 이미 발을 들여놓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 당시는 오퓔스에게 또 하나의 사라짐을 감내해야 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동의할 수 없는 조국에 결별을 고하고 망명의 길로 들어선 상태였다. 하나의 문화가 소멸해가는 것을 목격하는 일, 때마침 나라를 떠나 망명자로 살아야 하는 그 자신의 불안한 처지와 미래. 이렇게까지 망상의 궤도를 돌고 돌아 다시 <말썽 많은 돈>으로 돌아오면 체념한 브란트의 암울한 얼굴이 떠오른다. 보드빌과 망명, 그리고 브란트, 여기에 각각의 갈래들을 하나의 세계 안에 담아내는 오퓔스의 모습이 포개지면 묘한 자전적 조응을 이룬다.

 

    <말썽 많은 돈>은 혼란의 시대와 혼재된 경계의 어디쯤에 뚫어놓은 물구멍 같다. 오퓔스는 독일인으로서, 영화감독으로서 1930년대 혼돈의 소용돌이를 이 영화에 녹여냈다. 아니 어쩌면 그 자신은 이토록 심오하거나 치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구멍을 뚫은 것이 오퓔스인지 물길에 휩쓸렸던 어느 감독의 생이 자신의 영화에 자국을 남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익히 알고 있는 오퓔스의 대표작들에서는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암울한 정서와 작가를 잇는 어떠한 매개를 찾기가 요원하다고 느낄 때 <말썽 많은 돈>은 막스 오퓔스라는 작가에게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는 위치에 놓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감독 자신의 체화된 숙명은 블랙코미디의 소격효과와 만나 담론으로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글이 나의 짐작, 앞서 말했듯 망상증이 야기한 장광설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라도 오퓔스의 암울한 베일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고 그 한결같은 암울의 매력을 조금 더 이해하고 싶었다. 이를테면 오퓔스의 영화에서는 왜 사랑하는 남녀가 그토록 떨어지지 못해 끝 모르게 춤을 이어가는지, 사랑하는 둘의 춤사위는 왜 그리도 쓸쓸했던가에 대해서. 비록 오퓔스의 베일 속을 들여다보고자 시도한 또 하나의 블랙코미디로 끝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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