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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 : 어머니의 안개2021-11-11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 스틸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 : 어머니의 안개

 

이상경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신동민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잘 안다. 영화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잘 모를 수 있냐고 항변한다면, 신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잘 말한다고 고쳐 쓰겠다. 자신의 영화를 잘 알거나 잘 말한다고 해서 그의 영화가 훌륭해지는 것은 아닐 거다. 그냥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서라며 상대의 질문을 눙치며 설명을 못 하는(사실은 설명을 안 하는) 감독들의 좋은 작품들이 많이 존재한다. 나는 내숭의 혐의가 짙은 감독들을 더 사랑해온 것 같다. 그래서인지 신동민 감독이 다소 예외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자신의 영화를 잘 말하는 감독의 영화는 평자에겐 위험하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기 전에 포털에 실린 영화 소개나 감독과의 대담을 보고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칫하면 이미 대중에게 다 말해진 것들을 동어반복할 뻔했기 때문이다. 감독이나 영화의 공식적 견해가 영화평에서 언급된다고 해서 하등 잘못될 것은 없겠지만, 그 천라지망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면 평자에겐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2021)는 감독의 내비게이션을 전적으로 외면할 정도로 단순한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일단 이에 의지하다 살짝 곁길로도 달려볼 작정이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 스틸

 

 

   영화는 감독의 첫 번째 장편이고 세 편의 단편영화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묶여 있다. 군산행’, ‘태평 산부인과’, ‘희망을 찾아서란 소제목을 단 단편영화들이 3부로 연결되어 있는데 영화 안의 배열순서와 제작순서는 다르다. 2태평 산부인과가 가장 먼저 제작되었고, 1부와 3부가 차례대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배열순서는 감독의 용인대학교 재학 당시 지도교수인 장건재 감독의 권유에 의한 것이고 장 감독이 직접 제작과 배급을 담당하였다. 영화를 특별하게 하는 것은 재배열 자체보다는 재배열을 의미 있게 하는 독특한 배역의 선택에 있다. 배역의 선택이 훗날의 재배열을 염두에 두고 시행된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1부와 3부에서 주인공인 혜정 역을 맡은 배우는 동일한 배우이나 2부의 혜정은 다른 배우이다. 더군다나 1, 3부의 혜정은 감독의 어머니로 연기 경험이 없는 김혜정이고 2부의 혜정은 배우 노윤정이다. 노윤정은 3부에서 실제 혜정의 아는 동생인 윤정으로도 나온다.

생김새나 배경이 다른 두 배우가 같은 배역을 연기하는데, 그 배역은 작중 이름에서 짐작되듯 감독의 어머니이자 배우의 한 명인 혜정이다. 21역과 12역의 혼합이 주는 혼돈을 더욱 증폭시키는 방법이 촬영순서와 다르게 각 영화들을 재배치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혜정의 배역은 영화 안에서 두 번이나 교체되는 효과를 갖게 된다. 1, 3부는 물론이고 2부조차도 감독의 기억과 경험에 있는 어머니를 재현하고자 한 영화이므로 영화는 자칫 다큐멘터리로 보여질 수도 있었으나 독특한 배역과 재배열로 인해 특별한 곳에 위치하게 된다. 이를 통하여 바람피워 다른 여자와 결혼한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그리워하거나 체념하는 어머니라는 자신의 가족사를 보다 보편적인 영화언어로 재구성한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 스틸

 

 

두 배우들의 아들인 동민 역을 맡은 배우 신정웅은 관객에게 곤경을 주는 존재이면서 그 역시 곤경에 빠진 존재였을 것이다. 1, 2부에서 다른 배우를 같은 어머니로 모시면서 우리의 혼돈을 증폭시키는 동시에 카메라 뒤에서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감독을 연기해야 했으니까. 그는 3부에 홀연히 사라지고, 실제 감독의 외삼촌이자 김혜정 배우의 동생인 김상돈이 혜정의 동생 역으로 누나를 상대한다. 카메라 앞에 선 적이 많지 않았던 연극무대 출신 노윤정, 신정웅과 비전문 배우들의 능청스럽고 자연스러운 연기는 발견의 기쁨과 놀라움을 선사한다.

 

   영화의 시작은 별로 아름답지 않다. 혜정이 잠자고 있는 동민에게 전화하여 보일러에 이상한 소리가 난다며 호출하는데 동민은 내일 학교 가야 한다며 전화를 끊는다. 영화의 시작이라 많은 것을 짐작하긴 힘들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전화를 불쑥하여 귀찮게 하는 존재이거나 아들은 어머니의 안타까운 부름을 귀찮아하는 존재로 보인다. 어쩌면 둘 다가 맞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를 소재로 영화로 찍었다는 짧은 정보로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어머니를 불러내도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감독의 위악적 고백인지, 진솔한 가족의 모습을 그리고 싶은 예술적 야망의 산물인지의 즉자적 물음을 뒤로하고 영화를 조금 더 보았다. 사정은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 어쨌든 어머니 집에 나타난 아들은 보일러를 확인하는데 보일러는 조용하기만 하다. 생수병을 들이키는 어머니를 보고 대번에 어제 술 많이 먹었지 하며 타박하는 아들의 모습은 익숙한 고단함이 배어 있는 듯하다. 동민이 나가서 누군가에게 전화하며 별일 아니고 괜히 온 것 같다고 할 때 그의 속사정은 훤히 드러난다. 계속해서 어머니는 술이 덜 깼는지, 중요한 가족사진을 버리는 물건으로 분류해서 버릴 뻔하지 않나, 동민의 동생 동휘에게 편지를 써달라며 내용을 불러주다 잠들지 않나, 다양한 모습으로 동민의 속을 시끄럽게 한다.

서로의 속마음이 간파된 탓인지 둘은 다소 데면데면해지고 길에서도 난간을 사이에 두고 앞뒤로 떨어져 걷는다. 그런데 혜정의 삶의 현장에 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수동적이고 의존적이며 아들의 사정을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혜정이 운영하는 노래방이 떡하니 존재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혜정은 아들에게 사다리를 갖다 주면서 화재경보기 설치의 도움을 받는, 책임 있는 존재처럼 보인다. 노래방에서 술을 마시며 혜정은 동민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한 동민의 아버지가 술을 마시자고 찾아왔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그러다 혜정은 노래방 기기를 이용하여 노래를 부른다. 영화는 혜정이 부르는 정훈희의 안개를 꽤 긴 시간 동안 들려준다. 앞서 동민을 속 태우던 혜정의 행동에 일정한 사정이 있다는 영화적 설명이지만 혜정의 노래는 그보다 더 강렬하고 그 자체로 온전하다.

2부에서 노윤정의 혜정도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라는 노래를 부른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라는 노래 가사를 읊으며, 혜정은 동민에게 만약 아빠가 그 여자와 헤어진다면 아빠를 데려오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혜정의 노래에 앞서, 스탠드바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혜정을 데리러 온 동민이 혜정과 승강이하는 동안 계속해서 바의 음악은 이미 화면을 적시고 있었다. 집에 가자, 한 잔만 더, 하는 긴 옥신각신과 음악만으로도 영화를 세울 수 있다는 믿음은 혜정의 노래로 완성되며 영화의 구심력이 된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 스틸

 

 

1, 2부에서 혜정이 부르는 노래(영화의 영어 제목은 ‘Mom’s Song’이다)와 뽕필로 충만한 음악들은 스테이지 위에 흐르는 연기나 안개처럼 화면을 감싸고 돈다. 정훈희의 안개가사에 이 영화 제목처럼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다오를 포함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영화 제목이 어머니와 감독 자신에게 닥쳤던 곤경에서 벗어나고픈 바람을 표현하고 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고단한 현실을 가려주기도 하고 미몽 속에 희망을 품게 했던 술과 노래, 담배 따위처럼, 안개같이 그녀를 감쌌던 것들이 혜정의 다른 정체성은 아니었을까. ‘안개노래가 삽입된 김수용 감독의 <안개>(1967)의 원작은 김승옥의 무진기행(1964)이고 김승옥은 안개의 작사가이기도 하다. 김승옥은 소설에서 안개는 무진의 특산품이라고 했고, 무진 혹은 무진의 안개는 주인공의 고향, 권태, 일탈, 해방, 비겁함 등 다양한 상징과 연결된다. 안개는 혜정의 신산한 삶일 수도 있지만 노래 부르는 그녀에게서 스며 나오는 안개는 현실을 견디는 몽환을 품고 있다.

 

   감독의 표준 안내서에는 4:3 화면비의 선택이나 고정된 카메라 등 스타일적 요소에 대한 설명까지 할애되어 있으니 이 영화가 좋은 분들은 찾아 읽으시면 좋겠다. 영화는 안개뿐 아니라 바람과 연관된 내러티브나 이미지들도 많이 담고 있으며 그것들이 스타일적 요소와 연관되기도 한다. 그래도 안개에 집중해서 이 글을 쓴 이유는 영화가 끝나도, 이 글을 쓰면서도 머리를 떠나지 않는 혜정의 노래 때문인 것 같다. 신 감독은 예외이지만, 안개처럼 영화 설명을 하는 감독들을, 그들의 영화를 좋아하는 나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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