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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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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얼굴 앞에서> : 새로운 믿음의 장소2021-11-03
당신얼굴 앞에서 스틸 이미지

 

 

<당신얼굴 앞에서> :새로운 믿음의 장소

 

서은주 (부산영화평론가협회)

 

    가진 거라곤 겨우 몇 달 남지 않은 시간만이 전부인 사람에게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좌절되고 무너진 상옥(이혜영),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얼굴 앞 ‘지금·여기’에서 다시 세상에 대한 믿음을 가져보려 한다. 행선지를 옮길 때마다 반복적으로 되뇌는 기도의 말은 바로 그 새로운 믿음에 대한 숱한 다짐들이다. 얼굴 앞 모든 것은 무수한 ‘지금·여기’들의 명멸에 불과하므로, 따라서 현실의 시간 및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과 상황이란 다만 즉흥적으로 결정되고 순간적으로 바뀌는 것들의 무상한 연속일 따름이다.

  습관적인 밥 대신 빵 먹으러 카페를 가자는 동생 정옥(조윤희)의 제안에 상옥의 호응이 즉각적이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서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문득 계획에 없던 공원 산책을 권하는 동생의 말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또 길을 가다가도 조카 승원(신석호)이 운영하는 떡볶이 가게를 무심코 들르고, 떡볶이 몇 점 집어 먹다가 양념 튄 옷 때문에 집에 돌아가려하다가도 다시 갑자기 생각을 고쳐먹기도 한다. 영화감독 재원(권해효)과의 예정된 약속장소가 돌연 변경되는 장면이나, 그 약속 장소를 가던 중 어린 시절을 보냈던 동네로 불현듯 발걸음을 옮기는 장면도 계획성 없이 벌어지는 일과 우연적 상황의 대표적 본보기다.

 

당신 얼굴 앞에서 스틸

  

  말하자면 홍상수의 <당신얼굴 앞에서>(2021)의 모든 것은 일어날 수도 있지만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과 임의성으로 연결되어 있다. 일과 상황들이 어떤 인과적인 맥락도 긴밀한 연관성도 없이 느슨하게 나열되어 있는 느낌이다. 그렇게 이 영화는 어떤 정해진 의도나 성취해야 할 목적으로서의 전체상이 텅 비어 있다. 이는 영화의 부분들이 서로를 동질적으로 만들거나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으로 환원되도록 하는 기준으로서의 중심이 없다는 말과도 같은 의미다. 아니 모든 일과 상황은 오히려 그 중심의 반대편으로 분산되는 파편 같다.

  그래서 인물들은 하나 같이 고독하고 외롭다. 인물들의 관계도 중심 없는 파편이기 때문이다. 둘도 없는 자매지간이건만 그다지 큰 유대감도 돈독함도 없는 상옥과 정옥을 떠올려 보라. 그렇게 단절적인 관계로 변한 데에는 상옥이 오랜 외국 생활로 왕래가 드물었던 게 가장 큰 원인이다. 결속의 구심체로서의 중심이었던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부터는 아예 서로 만난 적도 없는 듯하다. 그래서 둘은 서로의 기호나 성격을 잘 모른다. 때론 서로를 낯설어하기도 한다.

  심지어 정옥은 몇 달 후에 상옥이 죽으리란 사실조차도 알지 못한다. 상옥 역시 굳이 이를 털어놓지 않는다. 특히 카페에서 그들이 갑자기 소원해진 관계에 대한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는 말을 주고받는 갈등 상황에서는 공통의 중심에서 배제되고 고립된 인물의 파편 같은 모습이 더 역력히 느껴진다. 하지만 상옥은 그런 관계를 벗어나 다른 차원의 새로운 연대와 결속의 관계를 추구하려 한다. 승원의 작은 선물에도 새삼스런 감동의 뜻을 표하거나, 재원과의 만남에 배우로써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은 다 그런 맥락에서가 아니었을까.

 

당신 얼굴 앞에서 스틸

 

  그런데, 파편적 경향은 비단 내러티브 차원만의 문제가 아닌 듯하다. 특히 근래 홍상수의 영화들에 자주 배치되는 단절적이고도 평면적인 이미지들은 내러티브 차원보다 더 근본적이고도 전체적인 차원에서 작용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도 파편적 경향은 단순히 표층적인 의미 관계 차원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숙하고도 특별한 감각의 차원에까지 두루 발견되고 있다. 물론 언뜻 홍상수의 이미지들은 일반적이다. 어떤 새로움도 없어 보인다. 영화적 상황이 벌어지는 공간은 평범하고 상투적이기만 하다. 늘 익숙하고 구체적인 현실이자 일상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는 <당신얼굴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하다 병을 얻은 상옥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정리하고자 동생과 조카를 찾는다. 영화는 동생과 조카, 그리고 영화감독 과 함께 보내는 상옥의 평범한 하루 일상을 은근하고도 끈덕지게 재현한다. 여기서 상옥이 머무르는 동생의 집과 카페, 또 공원과 조카의 가게, 그리고 재원과의 약속 장소인 술집 역시 평범하고 일상적인 공간이다. 또 나누는 이야기의 내용이나 벌어지는 상황 또한 진부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피상적으로만 보면 상투적인 일상만이 나열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면적으로 깊이 들여다보면 그 익숙한 일상에 대항하는 모종의 낯설고도 이질적 차원을 발견할 수 있다.

  분명 익숙한 일상이 반복되고 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익숙한 일상 내에 일상을 거부하는 것들이 내재되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카메라 매체 특유의 방식으로 구축되는 홍상수식 이미지재료들, 곧 단절적이고 평면적인 이미지들이 내러티브 차원에서 상상되는 허구적 공간에 대해 갈등과 불화를 일으키고 있다. 예컨대 단절적인 공간 구성이나 망원렌즈 및 줌인 아웃 촬영 등으로 만들어지는 평면적인 이미지들은 그들만의 낯섦과 이질성으로, 즉 카메라의 시점이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으로 하여금 카메라를 의식하고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익숙한 일상을 구성하는 차원에서 무시로 버려지고 배제됨에도 불구하고 다시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 걸어온다.

 

당신 얼굴 앞에서 스틸

 

  낯섦과 이질성의 측면은 내러티브 차원으로는 절대 수렴되지 못한다. 하지만 공간의 층위에서 작용하면서 영화적 공간이 통일적이고도 전체적으로 조성되는 방향에 대해 끝없는 제동을 건다. 그래서 내러티브 측면으로 만들어지는 공간의 전체상은 곧 위태로워지지 않을 수 없다. 명백한 현실로 간주되는 영화의 시간과 공간이 여지없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 붕괴로 인해 영화를 보는 우리는 문득 다른 차원의 새로운 사유의 장으로 환대받는 느낌을 받는다. 내러티브적 시간과 공간이 무효화되면서 그보다 뭔가 한 층 더 승화된 초월이 도래하는 상황, 말하자면 우리의 얼굴 앞 ‘지금·여기’의 텅 빈 현실과 마주치는 체험 같은 것.

  이 영화가 곧 무너질 가건물 같아 보인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마치 깡마른 큰 키에 곧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상옥의 외모처럼, 죽음 앞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좌절되는 상옥의 운명처럼 영화는 도저히 완결되지 못한 느낌만으로 가득하다. 공교롭게도 상옥이 들려주는 기타 소리도 첫 소절만 거듭 반복될 뿐 끝내 완성되지 못한 채 끝나버리지 않는가. 그렇게 홍상수의 <당신얼굴 앞에서>는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부분들이 완전하고도 통일적인 전체상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무너지고 흩어짐으로써 불현 듯 ‘지금·여기’의 텅 빔을 환기시키고 있다. 붕괴와 파편, 그리고 그 순수한 텅 빔 자체로 다시 전체상을 넘어서고 있다.

  그래서 상옥의 말씨와 몸짓은 그토록 초연하고 담담할 수 있었다. 어떤 두려움 없는 자유로움과 기쁨, 그리고 경건함이 충만할 수 있었다. 집착할 과거도 미래도 없이 오직 자신의 얼굴 앞 ‘지금·여기’, 그 텅 빈 현실을 직관할 수 있는 사람은 치열하게 겨룰 대상도 아등바등 지킬 전체상도 없다. 상옥이 동생과 벌이는 작은 갈등 상황에도 휘둘려지지 않는 태연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어린 시절 살던 집에 들러 과거를 새삼 돌아보는 자기 자신을 책망하는 목소리가 그처럼 간명하고도 단정적일 수 있었다. 이는 재원에게 자신이 곧 죽으리란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보인 절제된 감정과 체념의 정서와도 일맥상통한다. 또한 엔딩에서 재원과의 여행이 무산된 내용이 담긴 음성 메시지에 대응되었던 넋 나간 웃음소리와도 같은 결이다.

 

당신 얼굴 앞에서 스틸

  

  그것은 허무도 냉소도 아니다. 과거와 미래, 그 어떤 헛된 꿈에도 머무르지 않는 무심함은 다른 한편으로, ‘지금·여기’의 짧은 단 한 순간의 그 무엇도 허투루 넘기거나 지나쳐버리지 않는 지극정성의 마음과 관통한다. 상옥이 조카 선물에 대해 무한한 감사를 느끼고, 재원의 영화 출연 제의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했던 것도 다 그 때문이다. 무릇 자신의 얼굴 앞 ‘지금·여기’를 진정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느껴야 할 것이라곤 오로지 감사함 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거머쥘 과거도 예측할 수 있을 미래도 다 허망하게 여기는, 오직 ‘지금·여기’를 직관하는 마음은 자신의 얼굴 앞 모든 것이 태초부터 이미 오롯이 완성되어 있는 것임을 본다. 그렇다면 우리의 얼굴 앞 ‘지금·여기’가 바로 세상의 유일한 중심이자 새로운 공통성이 부여될 공간, 곧 ‘새로운 믿음의 장소’이지 않을까.

  그처럼 홍상수는 우리의 상투적인 일상을 새로이 볼 수 있을 가능성의 시선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상투적인 일상 속에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우리의 일상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다시 그 일상을 새롭게 감싸고 돌파하는 양식 자체에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상옥이 무수히 되뇌던 기도들, 곧 오로지 자신의 얼굴 앞 ‘지금·여기’만을 목도하기를 바라던 말들은 곧 영화 밖 우리 자신을 향한 홍상수의 갈급한 전언이었는지도 모른다. 홍상수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감각을 따라 우리의 얼굴 앞에서 분명히 보고 있으나 스스로 놓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의 사유를 시작해볼 것을 권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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