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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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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로스트 메모리즈...최신 걸작 소환전 <대지와 그늘>2017-03-15

 



<대지와 그늘> 사라지는 순간의 기록


김지연 BIFF 시민평론단


로스트 메모리즈...최신 걸작 소환전 리뷰

 

유성영화가 발명한 것은 침묵이다. 이 영화는 그걸 알고 있다. 공간에 충실한 앰비언트 사운드가 대부분인 가운데 거기에서 섬세한 감정의 결들이 느껴진다. 카메라는 예의바른 침입자와 같이 움직인다. 그 응시에는 기다림이 있고 적정한 거리두기가 있다. 예를 들면 인물이 후경에서부터 전경을 지나 프레임아웃 할 때까지 카메라는 자리를 지키며 그를 바라본다. 해체 후 십 수 년 만에 만난 가족들을 방해하지 않으려 방 한 켠에 선다. 완고한 어머니의 등을, 손자와의 첫 만남을, 담담하지 않은 이야기를 담담히 나누는 부자(父子)를 미세하게 달리인(dolly in)/아웃 하는 형태도 있다. 서사는 플롯이 아닌 순간의 정서와 상황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세심한 시선에 따라 전개된다. 인위적인 광원도 제한돼있다. 인물이 문을 열거나 불을 켜기 전까지 관객은 암전 혹은 그에 가까운 화면을 맞닥뜨린다. 스펙터클은 차단되고 드라마틱한 장면은 생략된다. 죽어가는 아들이 홀로 앉아있을 때 카메라는 그 얼굴 대신 뒷모습을, 바람에 팔랑거리는 커튼을, 한술도 뜨지 못한 스프를 본다. 아들을 입원시켜달라고 언성을 높이는 아버지는 외화면 목소리로 표현되고, 그가 눈물을 참을 수 없을 땐 관객을 등지고 운다. 아니, 카메라는 그를 따라가지 않는다. 가장 큰 사건인 아들의 임종은 그의 몸을 닦는 부모와 반응 없는 손을 잡아보는 아이의 쇼트로 환유된다. 가족이 조금씩 유대를 형성하면 비로소 카메라도 이들에게 다가간다. 그래서 할머니와 이별을 앞둔 아이가 주르르 눈물을 흘리는 얼굴, 억지로 웃어 일그러지는 며느리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수 있고, 이제는 닫아둘 필요 없는 창을 연 집안 곳곳의 인서트 컷들이 가능해진다.



인물들의 걸음과 속도를 같이 하는 수평이동, , 스테디캠, 그리고 롱테이크는 주요 스타일로 지적할 수 있다. 삼대(三代)가 함께 벤치에 앉는 수평이동 롱테이크엔 새를 부르는 법에 대한 전승을 넘어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이 한 데 머문다. 그러나 이 기술(記述)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낀다. 영화에서 나에게 와 닿은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즉물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롱테이크가 갖는 미학과 그 의미 대신에 이렇게 이야기해야 한다. 전경에선 그들이 베어내고 헤쳐 나가야 할 장애물이며 후경에선 벽처럼 둘러싸 감금하려는 것 같았던 사탕수수 밭이 그 때만큼은 한가로운 전원 풍경으로 보였다고, 거대한 고목나무와 함께 동화 같이 아름다웠다고, 그 시간이 유효시점에 다다라 슬펐다고. 같은 방식으로 카메라는 아들이 죽어 가는데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는 주인공을 담아낸다.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일어서는 그를 따라가다가, 바깥으로 나오면 수평이동을 멈춘다. 어두운 귀갓길을 걱정하듯 카메라는 주인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도 한참 서 있다. 그사이 주인공 주변에 서성이는 동네 개들의 경쾌한 움직임과, ! 하고 짖는 소리, 뒤이어 또 나타난 개가 좋았다고 고백해야겠다. 그것은 연출이 어쩌지 못하는, 영화가 계산에 넣지 못했던, 그러나 영화에 담겨서 정서에 파장을 일으키는 순간이기도 하다. 유령처럼 부유하는 스테디캠의 움직임만큼(어쩌면 그보다 더), 모든 슬픔의 원흉인 재와 검불들이 너울너울 쏟아지는 낯선 풍경, 집 근처 사탕수수밭을 태울 때 잔뜩 흐린 하늘에서 작게 번개가 치는 찰나가, 아름다웠다고도 말해야 한다. 논리적 근거를 댈 수 없는 것일지라도.



영화의 구조, 스타일, 테크닉에 대한 논의보다 사람과 사물, 혹은 그 움직임이 감흥을 일으킨다는 발언은 자칫 영화에 실례가 되거나 덜 가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형식은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라는 보편명제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영화는 섣부른 감정이입을 경계했지 감정 자체를 배제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상기했으면 좋겠다. 오히려 이 영화는 매순간 그것을 담아내는 데 골몰하고 있다. 그러므로 차 한대가 지나갈라치면 흙먼지가 무시무시하게 일어나는 길 위에서, 주인공이 온몸으로 손자를 안고 아이스크림마저 손으로 감싸줄 때나, 마차에 환자를 태우고 재와 먼지를 덜 마시도록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줄 때, 또 그게 할아버지나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 중에 하나일 때, 그 다정하고 사려 깊은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관객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기는 할까? 이후 집으로 돌아오는 마차에서, 아이가 아픈 아빠의 팔을 베고 누워있는 장면이 있다. 그들을 덮은 이불 위로 때때로 나무 그림자가 비치고, 아이는 맥없는 아빠의 손 밑에서 제 손을 꼼지락거리며 작게 즐거워한다. 이 영화 도처에 그런 것들이 있다. 밥벌이의 엄숙한 무게 앞에 하나 둘 파업을 접고 일어서는 노동자들의 굳은 얼굴, 재를 쓸어 모을 때 생기는 고운 비질 자국, 나뭇잎을 닦는 정성스런 손길, 외지에서 온 표식같이 빛나는 주인공의 하얀 셔츠와 손수건, 말없이 제시되는 것만으로도 힘을 갖는 이미지들.



무성영화가 유성영화로 전환되는 시기에 채플린은 침묵이라는 아름다움이 사라진다고 우려했다. 훗날 고다르는 영화의 성장은 무성영화 시대를 기점으로 멈춰버렸다고도 했다. 그러나 사운드의 도래가 곧 무성영화 미학의 죽음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영화작가들이 다양한 형식으로 차용, 계승, 발전시켜 그들의 위대한 조상을 섬긴 흔적이 영화사()에서 증명된다. 그리고 필름의 입자가 픽셀이 된 시대에도 여전히 영화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다. <대지와 그늘>도 저 나름의 방식으로 그 계열의 끝에 서려 한다. 눈앞에서 사라지는 모든 것들을 견디지 못해 가족을 떠났지만 아들의 죽음을 보는 남자, 어쨌거나 집을 지키려는 부인, 어머니를 떠날 수 없어 그 땅에서 병을 얻은 아들, 아이의 장래를 위해 떠나려는 며느리, 언젠가는 기계화로 잃게 될 노동자들의 일터. 사라지는 것들 각자의 여리고 고독하고 아름다운 순간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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