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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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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월드시네마 XIV <미니와 마스코위츠>2017-04-07

 



미니와 마스코위츠의 얼굴들


 심미성 BIFF 시민평론단



Review 세계영화사의 위대한 유산, 월드시네마 XIV world cinema xiv

 

<미니와 마스코위츠>(1971)는 존 카사베츠의 가장 달콤한 영화다. 물론 여기서 가장 달콤한이라는 수식어는 존 카사베츠의 작품이라는 범위 내에서만 가능해지는 말이다. 주로 카사베츠의 영화는 달콤함과는 거리가 먼, 복잡하고 지저분한 인간 군상을 드러내는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인물의 대화나 행위 도중 툭툭 끊어져 넘어가 버리는 특유의 불친절한 장면 전환은 모순을 안고 있는 캐릭터나 이야기를 역설적으로 더욱 생동감 있게 만든다. 이는 언뜻 성글어 보일 수 있는 카사베츠의 영화가 한편으로 완전하게 느껴지는 까닭 중 하나일 것이다. <미니와 마스코위츠>에도 카사베츠의 특징적인 연출 방식은 그대로 녹아있다. 혹자는 이 영화를 두고 불편하고, 또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사랑이야기라고 논할 법도 하다.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도 미니(지나 롤랜즈)는 마스코위츠(세이무어 카셀)와 어울리는 사람인지, 마스코위츠는 미니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도무지 즉각 대답을 내놓기가 버겁다. 나이를 먹을수록 낭만과는 동떨어진다고 느끼는 미니는 그만큼 사랑에 관한 한 희망보다는 자포자기나 무감각에 가까운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마스코위츠의 즉흥적인 성격은 충동적이고 폭력적으로 드러난다. 그런 미니와 마스코위츠 사이에 부딪치는 감정싸움을 두 시간 동안 지켜보자니 이들의 관계가 아름다운 맺음으로 귀결되리란 상상을 하는 것도 쉽지 않다.

 

좌우로 길게 자라난 콧수염과 등 뒤로 늘어뜨린 포니테일을 하고 있는 수상한 비주얼의 마스코위츠는 늘 혼자 다니면서도 낯선 이들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전혀 다른 이름을 들먹이며 나를 알지 않느냐고 다그치기도 하면서. 일견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보이는 그의 행동은 사실상 그저 온 몸으로 외로움을 견디고 뱉는 행위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마스코위츠의 정체성을 얼핏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마음에 떠오르는 감정을 포장할 줄 모를뿐더러 혹여 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감정을 말하거나 갈구하는 경우에도 이런저런 생각할 여력이 없다. 그 나이 대 평범한 성인들의 언어가 포장지에 겹겹이 잘 싸인 알맹이라면 마스코위츠의 화법에는 투박한 알맹이만이 있다. 하지만 이 투박함을 계속해서 바라본다면 한없이 괴짜 같기만 하던 그가 누구보다 진실된 감정을 토해내고 있다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그가 뱉어내는 언어들이 점차 순수하게 느껴진다.

 

카사베츠의 영화 속 인물들은 외롭다. 외로움과 사투하는 인물은 마스코위츠 뿐만이 아니다. .조연을 망라하고 거의 모든 캐릭터가 외롭게 느껴지는 데에는 카메라의 역할이 크다. 흔히 다큐멘터리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애매모호한 기승전결의 구조 속에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장면들로 메워진 카사베츠의 영화에서 단연 돋보이는 움직임이 있다면 얼굴을 응시하는 카메라의 시선이다. 존 카사베츠는 초기작 <얼굴들>(1968)에서 무분별한 취기에 좌초한 현대 성인남녀의 얼굴들을 비추면서 대사로 표현이 불가능한 드라마를 이끌어 냈다. 무의미한 웃음들, 상처 입은 표정들을 화면 가득 채우곤 곧장 달아나는 카메라가 이룬 성취는 공허한 얼굴들이 남기고 간 진폭이 큰 여운일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건대 그의 작품들은 모두 <얼굴들>의 연작처럼 보인다. 클로즈업부터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넘나들며 얼굴을 관조하는 카메라의 태도가 대부분의 작품에 녹아있다. 그 때문인지 애써 카메라가 얼굴만을 포착하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얼굴에 시선이 향하고, 또 그로부터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가 읽히는 것은 어색한 일이 아니다. <미니와 마스코위츠>의 얼굴들은 또 어떻나.

열 마디 대사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미니의 얼굴. 미니 역의 지나 롤랜즈는 카사베츠 감독의 배우자이자 페르소나로 많은 작품에서 주연으로 활약했다. 그와 그녀가 협업한 단 한 작품만 보더라도 이 둘의 조합이 어떤 필연을 매개로 한 조화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칠 수 있다. 그만큼 그녀가 카사베츠의 영화 속에서 연기하는 여성 캐릭터는 강하지만 여리고, 여리지만 강한 면모를 균형 있게 표현하며 깊은 인상을 남기는데, 가장 달콤한 영화 <미니와 마스코위츠>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장면 하나를 꼽자면 아이스크림 가게 에피소드에서 고를 것이다. 마스코위츠의 마음을 줄곧 거부해오던 미니가 로맨틱한 데이트를 선물하는 순간이다. “그냥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좋을 것 같아 불렀다.”는 미니의 대담한(새카만 선글라스 속으로 감정을 숨기는 미니로서는) 표현에 마스코위츠는 이가 시릴 만큼 입안 가득히 아이스크림을 밀어 넣는 것으로 화답한다. 이어서 미니의 얼굴을 비추는 리액션 쇼트. 어느 정도는 이 얼굴 쇼트 이후,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아름다울 것이라는 무절제한 믿음이 생긴다. 어쩌면 미니와 마스코위츠의 관계도 존 카사베츠와 지나 롤랜즈의 그것처럼 필연에 기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니는 험프리 보가트를 좋아하고 마스코위츠도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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