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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클로드 샤브롤 회고전 <의식> - 그의 계급투쟁2017-02-20
의식 스틸컷_

 



그의 계급투쟁

 

이상경 BIFF 시민평론단

 

Review 프렌치 미스터리의 최고봉 클로드 샤브롤 회고전


<의식>은 묘한 영화다. 관객들은 방청석에서 증인석, 심지어 피고인석에 불려 나가야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검사석에 서게 될 것이다. 방청석의 자리는 소수에게만 할애된다. 이런 일은 서사의 구경꾼이 되는 것에 익숙한 관객의 욕망과는 배치된다. 어떻게 영화는 앉아 있는 편안한 자리 대신 서서 증언하고 방어하거나 때론 공격해야 되는 자리로 우리를 끌어내는가.


피고는 부르주아이다. 클로드 샤브롤의 영화에서만 하더라도 부르주아는 살인을 하거나(<세 번째 사랑>(1962)), 살인교사를 하기도 하여(<마스크>(1987)) 우리는 어렵지 않게 피고인과 구분된다. 따라서 그의 다른 영화에서 우리는 굳이 피고인석에 나갈 필요가 없었다. 다른 이들의 영화에서도 영화의 역사보다 훨씬 더 오래된, 부자에 대한 선망과 그들의 죄악상 나열은 영화 내에서 너무 자명하므로 우리가 직접 고발자의 위치에 나설 필요가 없었다. 모두가 방청석에 앉아서 부르주아의 당연한 몰락을, 때론 그들의 몰염치한 생존에 체념하거나 분노하면서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미국의 영화 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부르주아에 대한 샤브롤의 관점이 중대한 변화를 겪는다는 점에서 <의식>은 특기할 만하다. 자신의 부르주아 캐릭터들을 아이러니나 빈정댐 없이 처음으로 긍정하는 듯하다.”고 말한 바 있다(에센셜 시네마, 이모션 북스, 2016).


<의식>의 부르주아들은 좀처럼 틈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살인하는 대신 처단된다. 그러나 영화를 통틀어서 그들은 그렇게 죽어 마땅한 사람들로 보이지 않는다. 아니, 이 진술은 수정되어야할지 모르겠다. 각자의 계급적 의식에 따라 이 판단은 다를 것이다. 나는 나의 동료들과 이 영화를 본 뒤 처단과 그 근거에 대한 상이한 입장들을 발견하였다. 더 큰 문제는 영화를 볼 때마다 나의 입장도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짧은 시간 간격에 나의 계급성이 변화하진 않았을 터이고 그 이유는 영화 안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나는 영화의 결말인 처단 부분을 이미 말해버렸다. 영국 소설가 루스 랜들에 의한 원작 A Judgement in Stone(1977)(국내판은 활자 잔혹극, 북스피어, 2011)도 첫 문장부터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로 시작하며 결말부터 노출한다. 그러므로 소설은 처단의 과정과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영화는 모든 정보를 켜켜이 쌓으며 최후의 처형을 공개한다. 달리 말하자면 소설은 서스펜스를 만들어가고 영화는 스릴을 향해 질주한다고 할 수 있다.


히치콕은 서스펜스의 발명가라 알려져 있고 그의 영화는 서스펜스의 표현을 위해 존재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론가 시절 히치콕을 인터뷰하였으며 프랑스의 히치콕이라 불린 샤브롤은 <의식>에서 히치콕과는 다른 전술을 택한 셈이다. 그는 부르주아 가정에 들어온 가정부 소피(상드린느 보네르)가 문맹이라는 증거를 천천히 제시하고 결정적인 진술은 영화 말미로 미루고 있다. 주어진 결론이 뭔지 모르는 가운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얻어지는 영화적 미덕이 있을 것이다. <의식>은 범죄 스릴러이면서도 계급투쟁의 서사다. 부르주아가 소피를 죽인다 해도, 소피가 부르주아를 처형하더라도 하등 이상하지 않은 계급적 갈등의 노정이 영화가 하고 싶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과정에서 히치콕의 것과는 다른 서스펜스, 즉 긴장의 끈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미 밝힌 대로 영화는 계급갈등의 정점에서 당연한 것으로서의 처단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소피와 그녀의 조력자인 잔느(이자벨 위페르)는 범죄를 공모하지도 않은 채, 유희의 클라이맥스에서 소피를 고용한 일가족을 얼떨결에 몰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있다. 소피가 주인집 딸인 멜린다를 협박했다는 이유로 쫓겨나게 되어서이다. 소피의 문맹 사실을 알게 된 멜린다에게 소피는 이 사실을 발설한다면 부모에게 멜린다의 혼외 임신사실을 알리겠다고 위협한다. 멜린다가 부모에게 이 사실을 일러바치게 되는데 그녀는 이 최후의 배신 전에는 수많은 선업을 쌓아올린 바 있다. 멜린다는 이 부르주아 가정의 품격 그 자체이고 소피를 위로하며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가족들과 맞서는 강남좌파의 상징적 존재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결국 모든 부르주아는 배반하기 마련이며 처단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샤브롤이 이렇게 단순한 논리를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부르주아는 그들의 악행이 아니라 계급성이 문제라는 오래된 교설과 그렇게 거리를 두는 명제도 아닌 듯하다. 2013년 타개한 평론가 로저 에버트와 행한 1971년의 인터뷰에서 샤브롤은 나는 틀림없이 공산주의자이다. 그러나 그것이 밀 수확에 관한 필름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처가의 유산으로 처음 영화를 만들었고 공산주의자의 생애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삶을 살았던 샤브롤에게 이 영화는 그의 이러한 소신을 반영하는 실천물로 보인다.


몰살당한 브루주아들은 오늘날의 재벌급인 엄청난 부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소피와 다르게, 우리들의 대부분처럼 글을 아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들의 일부처럼 오페라 <돈 지오반니>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의식>에서 문자와 예술의 향유는 부르주아의 선함과 교양에 얼룩처럼 묻어있는 흠결에 우선하여 처단 당해야 할 이유처럼 전시되는 것 같다. 소피와 잔느는 살인과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을 저지른 전력이 있는 자들이기도 하다.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들은 나쁜 부르주아와 착한 무산자를 창조하여 나쁜 자본가가 아닌 체하는 자신들에게 면죄부를 준다. 샤브롤은 로젠봄의 의견처럼 자신의 계급에 대해 보다 긍정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기울어진 천칭의 균형추를 똑바로 회복하여 우리를 법정에 세울 음모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샤브롤의 계급투쟁이 오늘날에도 섬뜩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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