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전당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사이트정보
home  > 영화  > 영화와 비평  >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21세기 일본 영화의 재조명 <밤비 내리는 목소리>2018-11-29
21세기 일본 영화의 재조명 리뷰

 

<밤비 내리는 목소리> : 일이냐 커튼이냐

 

 

김나영(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영화는 원하는 게 있는지묻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나바는 아마노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 문득 그들의 방에 커튼이 없음을 깨닫는다. 아마노는 이나바의 소망에 모순이 있음을 지적하는데, 이런 것이다. 지금 이나바에게 커튼이 필요한 것은 그가 거의 종일 방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3천엔쯤 하는 커튼을 사려면 이나바는 일을 해야 할 테고, 일을 하게 되면 이나바에게 집의 커튼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 될 것이다.

일이냐 커튼이냐그것이 문제다. 햄릿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이 양자택일의 실존적 문제였다면 이나바에게 던져진 일이냐 커튼이냐의 문제에는 선택권 자체가 없다. 그에게는 커튼을 살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없으므로 유일한 선택지는 일인데, <밤비 내리는 목소리>의 대부분은 이나바가 계속해서 일이 아닌 다른 선택지는 없는지 기웃거려 보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실직 상태의 이나바는 집에 있는 것이 불편하다. 그는 가능한 늦게 집에 들어가거나 밤늦게 집을 나와 걷기 시작하고 이는 마치 그를 집 없이 떠도는 존재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집이 없는 상태는 그가 집에 있을 때조차도 마찬가지다. 커튼이 없는 창은 한낮의 해와 같은 외부 세계가 여과 없이 실내의 공간으로 들이치도록 허용한다. 이것은 세상이 어둠에 잠기는 밤에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갑자기 시인을 꿈꾸기 시작한 이나바가 공원에서 주워온 도토리를 아마노에게 선물하는 인상적인 장면을 들 수 있다. 집 안의 빛에 의해 실내 풍경이 반사되는 한밤의 창은 내부의 빛이 사라지는 순간 외부 풍경을 그대로 투과시킨다. 이처럼 영화는 집 안에 있으면서도 마치 바깥에 있는 것과 같은 인물의 상태를 효과적으로 시각화하고 있다.

집이 없다는 것은 종종 영화의 불안정한 존재론적 근거에 대한 비유로 읽히기도 한다. ( 가령, 유운성은 샹탈 애커만의 유작 <노 홈 무비(No Home Movie)>집이 없는 영화로 독해하며 디지털 시대의 영화 혹은 영화적 경험에 대해 비평적으로 질문하는 영화라 한 바 있다.) 영화의 역사 내내 시험 받아왔던 영화의 불확실한 지위는 디지털의 도래로 더 큰 도전을 받게 되었다. 디지털 기술은 필름과 영화관, 스크린이라는 영화의 물질적 토대를 무너뜨리면서 영화를 규정하던 가장 견고한 틀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한편으론 이가라시 고헤이와 같이 자원이 부족한 젊은 창작자들에게 용이한 제작 수단이 되기도 하는) 디지털로 제작된 영화 <밤비 내리는 목소리>에서, 고정적인 거주 공간인 집을 갖지 못한 채 거리에서 방황하는 인물의 상태는 외연이 변화 중인 불안정한 영화의 상태와 공명한다.

이 지점에서 이가라시 고헤이의 배경 중 흥미로운 부분은 그가 <밤비 내리는 목소리>의 제작 당시 스와 노부히로의 학생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밤비 내리는 목소리> 역시 스와 노부히로의 색채가 엿보인다. 스와 노부히로의 대표적인 연출 방법은 즉흥 연출이라고 할 수 있다. 이가라시 고헤이는 <밤비 내리는 목소리>를 연출할 때 최소한의 인물 설정만 정해두고 이후의 전개는 배우들과 함께 즉흥적으로 구상해가며 영화를 완성했다고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 있다. 즉흥 연출은 배우와 이야기, 심지어 연출자 그 자신조차 영화가 어떤 형태로 진행될지 알지 못한 채 상황에 따라 영화를 자유롭게 변모하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밤비 내리는 목소리> 속 이나바의 상태와도 닮아있다.

 

    이나바는 고정적 주체를 요구하는 직장을 선택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는 그가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대화에 따라 시인이 되기(를 원했다가 실패)도 하고, 신약 시험 대상이 되어 돈을 벌어 보려다 신체의 변화를 겪기도 한다. 그런데 이나바의 변신은 점점 더 위태로워진다. 이나바에게 신약 테스트를 소개해준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부터 이나바 역시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특이한 무덤이 많은 대만으로의 여행은 죽음의 이미지를 상기시키면서 이나바라는 불안정한 주체가 종국에는 고정적 육체마저 잃게 되는, 유령으로 변신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혹은 이나바의 대만 여행을 또 다른 종류의 변신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큰돈이 생기면 근사한 옷을 사거나 맛있는 것을 먹고, 대만으로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는 일련의 바람들은 이나바가 아니라 아마노의 것이다. 그러므로 이나바가 아마노의 소망을 대신 실현하는 것을 이나바가 아마노가 되어보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나바가 아마노가 된다는 것은 앞서의 변신들과는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이나바가 마주치는 것은 아마노가 떠나고 없는 집에 남겨진 커튼과 편지다.

두 개의 항이 필요한 관계 맺기의 세계에서 이나바가 아마노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나바와 아마노로 이루어진 관계의 붕괴를 의미한다. 이나바가 집 밖을 돌아다니는 것은 그의 실직으로 인해 연인 아마노가 있는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불편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나바의 변신이 그의 방랑을 요구하던 세계를 부수는 데까지 이르렀을 때, 이나바는 더 이상 부유해야 할 이유가 없는 순간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커튼은 창이 약화시키는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다시 구획 짓는다. 외부 세계를 안정적으로 차단(screen)해주는 집은 이나바의 존재를 더 이상 불안정한 상태로 두지 않는다. 이나바는 일이냐 커튼이냐의 문제에서 일이 요구하는 하나의 주체성에 고정되지 않고도 커튼(스크린)이라는 영화의 지위를 획득하기를 원한다.

<밤비 내리는 목소리>는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의 상태를 탐색한다. 이는 끊임없이 변모하며 잠정적 상태로만 남아 있는 영화의 정체성과도 닮아 있다. 이나바가 결국 커튼이 드리운 집으로 돌아옴으로써 <밤비 내리는 목소리>는 한 편의 영화로 불릴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나바가 돌아온 집은 아마노가 떠남으로써 그가 떠나온 집과는 이제 다른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다음글 21세기 일본 영화의 재조명 <우리 집>
이전글 코폴라와 드 팔마의 21세기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