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전당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사이트정보
home  > 영화  > 영화와 비평  >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샹탈 아커만 특별전 <동쪽>2018-08-21
Review 8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샹탈 아커만 특별전 CHANTAL AKERMAN RETROSPECTIVR 2018.8.21.(화) ~9.9.(일)

 

 

<동쪽> : 아커만의 트래블링 쇼트

 

 

김나영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동쪽>(1993)은 샹탈 아커만이 1992년부터 1993년까지 독일, 폴란드, 러시아와 같은 국가들을 여행한 것을 바탕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작업이다. 그녀가 이 시기 동유럽과 소비에트 연방 국가들을 여행하겠다고 결심한 데에는 당시 동쪽을 둘러싼 역사적 상황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1990년 독일 통일, 1991년 소비에트 연방 해체까지, 1992년 직전까지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현실사회주의의 끝을 알리고 있었다. 생산과 소유의 평등한 분배라는 유토피아적 픽션은 씁쓸한 결말을 맞이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의식하고 있는 이들에게 <동쪽>은 어떤 실패 이후의 기록으로 다가올 수 있다. 아커만은 그녀의 극영화 작업들이 그러했듯이 일반적 다큐멘터리의 본령이라 여겨지는 현실의 기록에 충실하기보다 얼마간의 실험을 가미한다. 그녀는 영화 초반 촬영된 장소를 특정할 수 있는 지표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특히 동독을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영화의 초반부는 촬영시기와 동쪽이라는 제목이 유발하는 장소에 대한 상상을 빗나간다. 때로 화면은 텅 빈 공간의 나무 한 그루를 비추고 있다가 길을 지나는 자동차를 지켜보는 것으로, 사실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채로 끝나곤 한다. 나무와 자동차의 지나감이라는 카메라 앞의 상황은 관객에게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고정된 카메라와 긴 지속시간은 <동쪽> 이전까지 아커만이 작업해왔던 방식이며, <동쪽>에서 텅 빈 풍경을 다룰 때 이것을 거대한 이상이 무너진 동구권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을 수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초반 30분 이후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아커만의 여러 스케치 중에서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실내에서 인물을 촬영한 장면들이다. 이 장면들은 근본적으로는 실외를 촬영한 것과 비슷한 원칙 아래 촬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촬영의 대상이 누구인지, 장소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채로 역시 인물들은 어떤 행동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내에서 촬영된 인물들은 마치 사진이나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모델들이 요구 받는 것처럼 움직임 없이 앉아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실 카메라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연출자로부터 요구 받은 일종의 연기 혹은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다. 카메라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것이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이 연기라는 것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이로부터 촉발된 감상은 그녀 자신의 영화 <잔느 딜망>(1975)을 참조한 것처럼 보이는 장면에서 더 강화되는데, 카메라 앞 익명의 인물들은 명백하게 연기를 하기 시작한다. 가령, 하염없이 빈 잔을 입술에 가져가는 행위를 반복하는 장면은 일상적 행동을 과도하게 반복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이 연기라는 것을 드러낸다.

    아커만이 이러한 전략을 수행한 데는 두 가지 측면의 목적이 엿보인다. 먼저, 기록으로서의 가치가 부족한 장면들과 연기가 결합된 실제 인물들의 초상을 보여주는 <동쪽>의 방법은 아커만이 극영화 <잔느 딜망>에서 수행했던 전략과 반대의 짝을 이룬다. 아커만이 (보다 정확한 제목인) <잔느 딜망, 코메르스가 23번지 브뤼셀 1080>에서 구체적 이름과 장소를 제목으로 삼고 훈련된 배우가 일상적 연기를 하는 것을 이야기 진행의 경제성을 초과할 정도로 보여줌으로써 핍진성을 얻어냈다면, 현실 세계의 기록으로 여겨지는 다큐멘터리에서는 촬영 장소를 모호하게 하고, 촬영 장소의 실제 거주자들에게 부자연스러운 연기를 시키면서 작품을 얼마간 픽션의 위치로 이동시킨다. 따라서 <동쪽>을 좌절된 현실의 대안으로서의 픽션 만들기라는 측면에서 생각할 수도 있다. 연기하는 인물들을 통해 아커만이 달성하고자 한 또 다른 목적은 익명의 존재들이 가진 퍼포머로서의 잠재성의 발견이다. 어느 가정집에서 피아노를 치는 모습과 공연장의 첼리스트가 나란히 배치될 때, 아커만이 이들을 본질적으로 같은 퍼포머로 본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실내에서 세심하게 촬영된 사람뿐만 아니라 야외에서 무방비 상태로 포착된 사람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영화 시작 30분 후부터 트래블링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이유다.

 

 

    <동쪽>이 지닌 여행 영화로서의 측면을 떠올리면 트래블링 쇼트는 여행자의 시선을 재현하여 풍경을 보여주기 적합한 스타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쪽>의 트래블링 쇼트가 겨냥하는 대상은 풍경보다는 사람들이다. 먼저, 트래블링 쇼트에서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먼 나라의 사람들 앞을 카메라가 유영하듯 지나갈 때 느껴지는 어떤 감흥이다. 하지만 영화의 남은 러닝 타임동안 트래블링 쇼트가 계속해서 반복되면 아커만의 목적이 이 감흥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트래블링 쇼트와 실내에서의 픽스 촬영이 교차하여 진행되는 동안 얼핏 다른 목적으로 촬영된 것 같은 두 장면의 촬영 대상 사이의 공통점이 드러난다. 카메라 앞에서 얼마의 시간을 부여 받았든 그들은 그들 자신에 대해 서술하지 않는, 여전히 익명의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아커만이 퍼포머로 규정한 사람들과 무방비 상태에서 촬영된 사람들이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할 때, 트래블링 쇼트의 또 다른 매혹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영화에서 카메라 무브먼트가 주는 흥분은 카메라의 유려한 움직임만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레오 까락스의 <나쁜 피>(1985)에서 드니 라방이 질주하는 장면이 창출하는 쾌감은 카메라 움직임과 드니 라방의 움직임 사이의 합에 있다. 이것은 마치 두 사람이 함께 추는 안무와 같다.

<동쪽>의 마지막 장면은 일방적으로 자신의 속도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던 카메라 앞으로 일군의 사람들이 프레임 인 하며 만들어내는 리듬을 담고 있다.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은 채 단지 거리를 걷는 이들에게서도 퍼포머로서의 잠재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아커만이 촬영한 사람들을 관찰의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카메라와 능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퍼포머라고 부를 수 있다면, ‘동쪽의 사람들이 거대한 역사적 변화와 불확실한 미래 앞에 무력하게 놓여 있었다고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능동적 행위자에게는 현실을 변화시킬 역량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동쪽>은 이미 결정된 현실의 진술로서의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동쪽>은 이상이 실패했던 과거의 멜랑콜리한 기록이 아니라 여전히 가능한 미래를 발견하는 여행기다.

다음글 코폴라와 드 팔마의 21세기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론
이전글 샹탈 아커만 특별전 <갇힌 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