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전당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사이트정보
home  > 영화  > 영화와 비평  >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21세기 거장전 2018 <폭풍의 언덕>2018-06-19
review 6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21세기 거장전 2018 cineastes in the 21st century 2018.6.19(화) ~7.11(수)

 

 

언덕 위의 두 사람

안드레아 아놀드의 <폭풍의 언덕>

 

이동윤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안드레아 아놀드의 카메라는 쉴 새 없이 흔들린다. 아놀드는 초기작인 <레드 로드>(2006)부터 <아메리칸 허니>(2016) 까지 1.33:1의 화면비를 기본으로 하여 핸드헬드 카메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다소 도식적인 치환이겠으나 이러한 영화적 방식이 흔들리는 인물들의 심정과 동등한 위치로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 들어가기에 앞서 아놀드와 다르덴 형제의 양상에 대해 짚어보려 한다. 도시 변두리의 노동계급 혹은 상대적 소외계층을 다룬다는 점에서 아놀드와 다르덴 형제는 유사한 공통점을 경유한다. 더욱이 이들을 묶는 가장 큰 요건은 핸드헬드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단순히 핸드헬드를 사용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인물 가까이에서 포착하려는 점이 그러하다. 다만 이들이 인물을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다. 다르덴 형제의 핸드헬드 속 인물들은 그 내부에서 끝끝내 버티려한다. 이것은 <약속>(1996)에서부터 이어져 온 영화적 태도의 확장이다. 그들은 카메라가 피사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윤리적 태도와 질문 아래 범주를 확장시켜나가며 영화를 찍어오고 있다. 다르덴 형제의 인물들은 상황을 막론하고 대부분 프레임 내부에 머무르려 하고 그들은 그 안에서 발생되는 아이러니를 관찰하듯 찍는다.
   반면 아놀드의 핸드헬드는 프레임 밖으로 계속 빠져나가려고 하는, 일종의 척력으로 묘사한다. 아놀드의 관심사는 인물이 놓여 있는 환경에 지속적으로 침입하는 딜레마이다. 그 과정이 끝내 성적인 긴장감으로 발현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교통사고로 남편과 자식을 죽인 가해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성적(性的)인 접근을 감행하고(<레드 로드>), 엄마의 남자친구에게 호감을 갖고 성관계를 가지며(<피쉬 탱크>(2009)), 처음 보는 남자와 미국 전체를 유영하며 돌아다닌다(<아메리칸 허니>). 감정의 추이에 따른 불안과 분열의 묘사를 중심에 두며 상대적으로 사회 구조 안에 던져진 인물들을 포착하려는 다르덴 형제와의 차이가 이런 긴장감에서 발생한다. 아놀드는 클로즈업 핸드헬드를 적극적으로 끌어오면서도 인서트 컷으로 특정 사물과 배경을 삽입하면서 인물의 성격과 감정을 적극적으로 개진시킨다. 그녀의 핸드헬드 쇼트들은 지속적이라기보다 분산되어있는데, 이 같은 방식들이 감정의 불균질한 상태를 극대화하여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영화로 들어가 보자.

 

   <폭풍의 언덕>(2011)은 이미 여러 번 리메이크 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소설이다. 아놀드는 각색의 측면에서 매우 과감하게 이 영화를 개진시키고 있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청소년 시절을 러닝타임의 절반이상 가까이 할애한 것이다. 다른 리메이크 영화들에서 대개의 방점이 히스클리프가 떠났다가 돌아온 이후 복수의 과정에 초점이 맞추어졌기 때문에 아놀드의 이러한 선택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두 사람 사이 감정의 추이를 천천히 쌓아가는 과정의 매혹은 아놀드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진 도덕적 딜레마와 성적 긴장감의 언저리에 머물고 있으며, 폭풍의 언덕의 풍광을 적극적으로 덧입히는 방식으로 진행시킨다. 드넓은 언덕이라는 장소가 호명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등장시키는 이 영화는 절제된 대사 속에 틈입하며 감정을 요동케 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들판, 앙상하게 메마른 나뭇가지,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초원, 잿빛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들의 날갯짓과 개들의 뜀박질. 그 속에서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태초부터 언덕에 박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주목할 점은 이 언덕이 일종의 삶과 죽음의 중간 공간으로서 버티고 있다는 점이다. 히스클리프를 데려온 언쇼의 죽음을 시작으로 수많은 죽음과 소멸이 언덕에서 재현되고 있는데, 그때마다 히스클리프가 바라보는 세상은 철저히 이 세계에 소속되지 못한, 고립된 이방인의 시선을 따른다. <폭풍의 언덕>은 히스클리프의 시점쇼트로 바라보는 세계를 자주 등장시기 때문에 우리는 문틈에서 들려오는 유사 가족의 목소리와 얼굴의 일부분만을 목격할 수 있고, 언덕 너머에서 창문 안으로 보이는 집단의 행위들을 바라보게 된다. 그는 어디에서도 내부에 위치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이러한 히스클리프의 계급적 상태가 거대한 무덤처럼 보이는 언덕과 결부되어 그의 심리와 감정을 포착하고 있다. 그는 주변 인물들의 죽음을 가까이서 확인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죽음들을 매우 덤덤하게 바라보거나, 가까이 머무르지 않고 경계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규칙이 깨지는 장면이 캐서린이 사망했을 때인데, 그는 그녀의 무덤을 파서 그녀를 다시 보려고 한다. 이 순간, 바람이 일렁이며 낙엽이 그와 무덤 아래 쏟아져 내린다. 그러자 그는 무덤을 파헤치는 행위를 중단한다. 자신의 존재 목적이 소멸되어 적극적인 감정으로 호소하고 있지만, 그런 행위 역시 언덕이라는 거대한 공간내부에서 소멸되며 슬픔의 감정은 초연한 상태로 전환되기에 이른다. 영화의 엔딩은 앞서 밝힌 핸드헬드의 척력이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히스클리프는 농장의 주인이 된다. 이윽고 영화는 히스클리프 청소년기로 회귀하여 다시금 캐서린과 마주하게 한다. 아놀드에게 있어 핸드헬드 내부의 프레임은 아마도 도망치거나 빠져나가야 할 상황으로서 기능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현재의 성취가 과거의 불안한 낭만으로 돌아가는 순간, 영화는 모호한 히스클리프의 어린 시절 표정을 흔들리는 화면에 담아내며 끝을 맺는다.

다음글 21세기 거장전 2018 <머리 없는 여인>
이전글 위대한 출발 <그들은 밤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