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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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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위대한 출발 <그들은 밤에 산다>2017-09-06

 


니콜라스 레이의 모든 것 

<그들은 밤에 산다>

 

김도연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위대한 출발 - 영화사상 최고의 데뷔작들 2017. 9.1.(금)~9.21.(목) 매주 월요일 상영없음 

 

예전에 연극(그리피스)이 있었다. (무르나우)가 있었고 회화(로셀리니)가 있었으며 무용(에이젠슈테인)이 있었고 음악(르누아르)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영화가 존재한다. 그리고 영화라는 것은 니콜라스 레이를 말한다.”

- 장 뤽 고다르

 

레이의 영화 중 날이 저무는 장면이 없는 영화는 없다. 그는 황혼의 시인이다.”

-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는 <씁쓸한 승리 Bitter Victory>(1957)를 본 후, 푸랑수아 트뤼포는 <자니 기타 Johnny Guitar>(1954)를 본 후 각각 위와 같은 글을 썼다. 니콜라스 레이의 <그들은 밤에 산다 They Live by Night>(1949)는 위와 같은 극찬을 남긴 다른 작품들의 예고편과 다름없을 정도로 레이의 모든 것을 응축하고 있는 데뷔작이다.


<그들은 밤에 산다>는 필름 느와르의 외피 아래에 갱스터와 멜로드라마 장르를 뒤섞고 있는데, 갱스터 장르의 특성은 주요 인물들이 범죄를 저지른다는 사실에서만 드러날 뿐, 전체적인 흐름은 멜로드라마에 가깝다. 고전적 갱스터 장르에서라면 당연히 은행 강도 씬에서 박진감 있는 액션이 전개되었을 것이나, 이 영화에 나오는 두 번의 은행 강도 사건 중 한 번은 길 건너 차 안의 시점에서, 다른 한 번은 라디오 뉴스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을 뿐이다. 대신 이 영화는 필름 느와르의 테크닉으로 비극적인 멜로드라마 정서를 효과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빈번하게 등장하는 명암 대조chiaroscuro 조명은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얼굴을 통해 심리적 불안을 드러내고 어두운 미래를 암시함으로써, 영화의 내용과 형식을 하나로 만든다. 주인공인 보위와 키치가 처음 만나는 씬을 떠올려보자. 다리를 다친 보위는 광고판 아래에서 자신을 데리러 올 사람을 기다린다. 어두운 밤, 자동차 한 대가 멈춰서고 보위는 다리를 절뚝이며 그 차로 다가선다. 보위의 뒷모습을 따라 서서히 달리 인 하는 카메라는 운전자도 함께 비추는데, 모자의 그림자가 얼굴을 거의 가리고 있어 얼굴은 물론 성별도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다. 우리는 목소리를 통해 비로소 운전자가 여자임을 인지하고 같은 단어-“글쎄요Could be”-를 사용하는 대화를 통해 그들이 연인 관계가 될 것을 유추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어두운 공기는 이미 비극적인 결말을 내포하고 있다. 두 사람이 야반도주를 한 후 도착한 숙소에서 나란히 누워 대화하는 씬도 마찬가지다. 제일 앞에는 키치가 옆으로 드러누워 정면을 보고 있고, 그 뒤에는 보위가 비스듬히 팔을 받치고 누워있으며, 제일 안쪽에서는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모닥불의 불길에 맞추어 조명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하는 와중에도 키치의 얼굴은 밝게 보이지만 보위의 얼굴은 어둠에 감싸여 있다. 이는 화면의 깊이와 조명을 활용한 느와르 테크닉으로 그들의 불길한 운명을 드러내는 장면이라 하겠다. 또한, <그들은 밤에 산다>라는 제목 그대로, 대부분의 장면을 (결혼식 장면조차) 밤에 촬영한 점 역시 그들의 어두운 결말을 느와르 스타일로 구현한 것이다. 보위와 키치가 함께 등장하는 장면 중 낮에 촬영한 것은 시골의 숙소에 도착했을 때와 시내에 나들이를 나갔을 때뿐이다. 그들이 함께한 모든 시간 중 가장 빛나는 순간에, 문자 그대로의 빛나는장면이 삽입됨으로써 어두운 장면들과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이처럼 레이는 필름 느와르라는 영화적 스타일을 적극 활용하여 비극적인 러브스토리를 더욱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 영화의 어둠을 밝음으로 바꾸어 상상해보자. 그렇다면 그들의 이야기가 이렇게 우리의 가슴을 울릴 수 있었을까. 절대 아닐 것이다.

 

 

보위 : 그녀가 진짜 집을 구했네요 She got a real house.

치커모 : 왜 안 돼? 우리가 진짜 사람인데 Why not? We're real people.

<그들은 밤에 산다> , 보위와 치커모의 대화 중

 

니콜라스 레이는 늘 소외되고 외로운 인물에 대해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낸다. <그들은 밤에 산다> 속의 주요 인물 모두 사회에서는 이방인이며 정서적으로 외로운 사람들이다. 주인공인 보위와 키치 둘 다 어머니가 바람나서 떠나버린 상처를 가지고 있으며, 보위와 함께 탈옥한 치커모와 티덥은 많은 나이지만 아직까지 이상적인 배우자를 만나지 못했다(티덥의 제수씨인 매티는 정상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남편에게 지극한 정성을 보임으로써 이들과 대비된다). 외로운 인물에 관한 묘사는 이후 <고독한 영혼 In a Lonely Place>(1950)의 험프리 보가트를 통해 더욱 세밀하게 표현되며, <자니 기타>의 주요 인물 역시 정착민들 사이에서 소외되는 이주민들이다. 그리고 <이유 없는 반항 Rebel Without a Cause>(1955)의 제임스 딘을 통해서는 정상적인 중산층 가족 안에서도 고독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원적인 고독감은 레이가 끊임없이 탐구하고자 했던 주제였다. 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자니 기타>에서 스털링 헤이든의 대사인 나도 여기서는 이방인이야I am a stranger here myself'는 결국 레이의 모토이자 그의 부재증명이 되었고...(중략)...그에 대한 다큐멘터리 제목으로 이 대사를 쓴 것은 적절한 것이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에센셜 시네마, 이모션 북스, 2016). 또한 레이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비극의 정서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밤에 산다>에서 결혼식 주례는 멕시코 행을 부탁하는 보위에게 없는 희망을 돈 받고 팔수는 없다네 I won't sell you hope when there ain't any”라며 그의 청을 거절한다. 그때부터 보위는 더 이상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음을 인식하고 키치를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키치의 얼굴을 보려고 한 순간, 죽음을 맞는다. 이 엔딩 장면에서 들려오는 기차의 기적소리는 어쩐지 로베르 브레송의 <사형수 탈옥하다 A Man Escaped>(1956)를 연상케 하는데, 탈옥에 성공한 브레송의 주인공과 달리 결국 탈옥에 실패한 보위의 운명을 더욱 비극적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보위의 죽음으로 인해서 주인공 커플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며, 이 영화를 비롯해 <고독한 영혼>, <씁쓸한 승리> 등 많은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자니 기타>가 그나마 고전적 의미의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영화의 배경이 서부개척시대임을 생각한다면 레이는 동시대 인물들에게서는 행복을 발견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인간은 모두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레이의 영화는 인간의 삶 그 자체를 은유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언젠가 지인이 EBS <극한직업>을 보면서 진짜 삶은 영화가 아니라 저 안에 있다고 말했었다. 그 순간, 나는 영화를 변호하고 싶었지만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우물쭈물 거렸다. 그리고 한동안 진짜 삶이 무엇이며, ‘영화란 무엇인지에 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니콜라스 레이의 영화를 보라고. 그의 영화는 곧 우리의 삶이며, 영화 속 인물들 역시 우리네 진짜 삶의 한 부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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