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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월드시네마 XVI <탐욕>2019-03-26
Review 3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세계영화사의 위대한 유산, 월드시네마 XVI 2019.3.19.(화) - 4.24(수)

 

 

돈이 추동케 하는 것-

<탐욕>을 보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생각하다

 

 

이동윤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광산-계곡이라는 죽음의 공간성  

   

    에리히 본 슈트로하임의 <탐욕>(1925)을 보고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21세기의 영화는 코언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이다. 잠시 우회하여 감상 이외의 것들에 대해 유사점을 나열해보자. 프랭크 노리스의 맥티그(1899)와 코맥 맥카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5)라는 원작소설. 위대한 작가들이 제공해 준 거대한 이야기를 각색한 두 영화에서 전자는 당대에 완전히 실패하고, 후자는 매우 큰 성공을 거둔다. 잘 알려져 있듯이 <탐욕>의 원본은 현재 볼 수 없다. 슈트로하임은 80시간이 넘는 촬영원본을 잘라 9시간의 러닝타임을 제안하였지만, (당연히도) 제작사에게 거절당하였고, 상업영화를 요구했던 MGM1/4 수준인 140분짜리 판본으로 내놓았다. 이후 영화관계자들이 4시간짜리 판본을 다시 만들어 냈지만 그것마저도 스틸컷의 움직이는 화각이 영화의 절반 분량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 글은 4시간짜리 판본을 기준으로 작성하는 중이다)

 

    무엇보다도 <탐욕>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이끌게 했던 것은 영화의 엔딩 장면이다. 맥티그는 돈, 더 정확히는 아내 트리나가 획득한 복권 당첨금 때문에 아내를 살해하고 경찰들에게 쫓기는 중이다. 그는 자신이 원래 거주했던 광산 근처로, 더 멀리 나아가 죽음의 계곡까지 당도한다. 허허벌판에 모래와 고원만이 가득한 서부를 연상케 하는 이곳에 트리나의 사촌이자 맥티그의 친구인 마커스도 그를 쫓으러 온다. 돈을 요구하는 마커스와 맥티그 사이에 실랑이가 오가고, 결국 맥티그는 마커스를 살해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광산-죽음의 계곡의 공간성에 관한 부분이다. 이 공간은 영화의 초반부와 후반부, 두 번 등장하는데, 맥티그가 이 공간을 떠나는 계기는 모두 타의에 의한 결과다. 광산을 떠나게 되는 계기는 어머니의 권유였고, 돌아오게 되는 것은 경찰들의 추적으로 인한 결과다. 다시 말해 광산마을은 맥티그 스스로의 결정으로 선택한, 자발적으로 머무는 곳이 아닌 임시적인 거처이자 차후의 촉발사건을 예상케 한다. 초반부, 광산마을에 머물 때 돌팔이 의사 포터가 가져온, 수차례 등장하는 도금된 이빨 액세서리와 맥티그가 금을 채굴하는 현장에서 근무한다는 점, 광산마을에까지 경찰들이 당도함에 따른 비극적 분위기의 조성은 맥티그를 죽음의 계곡으로 내몬다. 더욱이 자신을 무척이나 아끼던 어머니가 맥티그가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사망했음에도, 다시 광산마을로 돌아가지 않는 그의 결정은 이를 강화한다.

 

    사실 이러한 그의 결정 자체를 난감하다고 보기엔 어렵다. 그는 도시에 도착한 직후였으며, 다시 광산마을로 돌아가기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며, 왕복 이후 다시 도시로 돌아오면 적응하기가 힘들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 역시 감출 수 없다. 왜 어머니의 사망 소식은 맥티그가 도시에 적응하기도 전에, 아주 재빨리 소환 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아마도 슈트로하임은 단순히 비애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선택을 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소 냉정해보이기까지도 한 이런 결정은 <탐욕>에서 인물과 상황을 바라보는 감독의 태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그것이 비록 죽음과 연루되어 있을지라도 돈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는 단순히 지나쳐갈 뿐이라는 점이다. , 이 영화에서 돈은 절대적인 기준이고, 다른 모든 행위는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예측 불가한 물음표의 삶  

 

    그렇다고 이것이 물질만능주의 자체를 비판하기 위한 포섭인가라는 질문을 해보면, 단정적으로 그렇다고 하기에는 무언가 망설여지는 구석이 있다. 이를테면 <탐욕>의 예측불가능성에 관한 것 들이다. 맥티그는 트리나를 보고 반하게 되고, 그녀와 데이트를 한다. 항구에 서성이며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자신의 매력을 뽐내던 맥티그와 이를 조용히 지켜보는 트리나에게 별안간 폭풍우가 몰아친다. 그들은 비를 피해 간이역에 몸을 숨기고, 분위기를 잡으며 키스를 한다. 그 순간, 폭풍우 사이로 기차가 쏜살같이 밀려들어온다. 두 사람의 행위를 중단시키고, 씬 자체를 분리시켜 찢어놓는 듯 한 기차의 난입은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난입-중단의 과정은 인물들의 결정을 유보하거나, 갈라서게 만든다. <탐욕>에는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예상치 못한 순간들이 반복된다. 예컨대 영화 중반, 마커스가 맥티그와 대화 도중에 칼을 던져 버렸던 행동을 기억해보자. 이 둘의 대화가 아주 감정적이거나, 싸움을 유발할만 제스처는 쉬이 유추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유독 마커스가 칼을 던지는 행위는 돌출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칼을 던지는 행위를 기점으로 둘의 관계는 점차 바닥을 향해 내려간다. , 이 영화에서 선택을 하는 행위는 자신이 선택한 결과가 아닌 타인과 특정 환경에 의해 지배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대부분 예측 불가능한, 일종의 물음표 같은 순간들이다. 이러한 외부 환경을 근거로 삼는 각자의 삶들은 스스로 주체가 될 수 없으며, 이는 각종 탐욕에 의해 지배당하는 인물들의 삶을 끝내 구렁텅이로 내몬다.

 

    이에 근거해 다시 <탐욕>의 엔딩으로 돌아가 보자. <탐욕>에서 살인이 발생하는 명징한 원인은 빼앗으려는 자-지키려는 자의 대립 구도이다. 하지만 이 원인은 단순히 욕망이라는 개인적 차원의 수준을 넘어서서, 예측 불가한 환경과 마주하게 된 결과물이다. 반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살해 원인조차 모호하다. 죽은 자도, 죽음의 원인도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오로지 추측만이 가능한 세계로 표현된다. <탐욕>의 대립은 뚜렷한 목적이 드러남에도, 그 원인이 복합적이라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살해의 목적은 희미하지만 이후 한 사내가 살해현장에서 갱단의 돈을 들고 갔다라는 행동 하나만으로 여러 집단을 세계 안으로 모이게 한다. 하지만 두 세계에서도 한 가지 지점은 일치한다. 돈이 피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탐욕>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작은 새의 존재이다. 영화 초반부, 광산에서 죽어가던 새를 자신의 손 등에 올리고 보살펴 주던 맥티그의 손을 동료가 쳐버리자 새가 버려진다. 이에 분노한 맥티그는 동료를 다리 아래로 떨어트려 버린다. 이렇게 새를 아끼던 맥티그는 도시에 정착한 이후에도 자신의 동반자처럼 새를 키워나갔지만 죽음의 계곡에서 마커스 살해 이후 자신이 들고 온 새가 죽어있자 바닥에 버린 뒤, 망연자실한 표정을 내비친다. 버려지는 새라는 결과는 동일하지만, 마지막 장면의 맥티그의 행위는 영화 내내 거의 유일하게 단독자로서 스스로 집행한 결정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잃은 이후에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80년간의 제작시기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탐욕>의 엔딩장면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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