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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필름아카이브 특별전 <상하이 제스처>2019-05-02
4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2019 FILM ARCHIVE SPECIAL 2019 필름아카이브특별전 2019.4.30.(화) - 5.16.(목)

 

 

<상하이 제스처> : 당신의 마스크 뒤에 뭐가 있지?

 

김나영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당신의 이 마스크(가면) 뒤에 뭐가 있지?”

이를테면, <오페라의 유령>과 같은 극의 디제시스 속에서 배우가 배우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할 때, 배우의 대답 역시 디제시스 속에 있다. 그러나 이 대사는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자기 지시 효과를 가질 것이다. 조셉 폰 스턴버그의 1942년 작품 <상하이 제스처>의 한 장면에서 차터리스(월터 휴스턴)가 이렇게 물을 때, 이 대사는 당신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함의를 제멋대로 벗어나 버린다.

 

먼저, 이 질문은 진 슬링을 연기하기 위해 백인 배우 오너 먼슨이 중국인으로 분장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당시엔 유색인종 캐릭터를 영상화할 때조차 백인을 캐스팅 하는 화이트워싱이 흔하고 쉽게 용인되었지만, 현재에 와선 정치적 올바름의 시각에서 이토록 노골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분장이 주는 불쾌함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차터리스의 질문에 이어지는 진 슬링의 내가 쓴 가면은 오직 시간의 가면뿐.”이라는 대답은 <상하이 제스처>가 시대적 한계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음을 자백하는 듯이 보인다.

 

차터리스의 물음은 영화 스스로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스턴버그의 영화 전체와 관련된 맥락을 건드린다. 오너 먼슨의 얼굴이 마치 마를렌 디트리히가 쓴 가면처럼 기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스턴버그의 영화를 볼 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스턴버그의 페르소나(가면), 디트리히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상하이 제스처>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평가는 디트리히와의 오랜 협업에 종지부를 찍은 이후부터 신통치 않았던 스턴버그의 후반 경력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스턴버그가 디트리히와 무려 일곱 편의 작품을 함께 했으며 대부분의 작품이 걸작으로 칭송받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디트리히의 존재가 그의 영화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한 명의 배우 이상의 것이었다 할 수 있다. 때문에 <상하이 제스처>의 도입부에서 언제나 새로운 여성들을 제공해주는 알라신을 향한 닥터 오마르(빅터 마츄어)의 뒤틀린 경의는 역설적으로 대체 불가능한 존재 마를렌 디트리히의 부재를 상기시키는 면이 있다.

디트리히 이후의 스턴버그 영화에서도 관객은 디트리히의 대체자를 찾으며 그녀와 비교한다. 디트리히의 이미지는 스턴버그의 엄격한 창조물이면서 동시에 디트리히 자신의 것이기도 했다. 스턴버그는 디트리히에게서 성공적으로 벗어나야 하는 동시에 그녀를 성공적으로 계승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상하이 제스처> 속 오너 먼슨은 진 슬링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디트리히가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 축에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포피 역의 진 티어니가 있다.

 

포피는 단테의 신곡에 묘사된 지옥의 모습으로부터 영향받았다고 알려진 바 있는 진 슬링의 도박장 세트 가장 꼭대기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호기심에 빛나는 얼굴의 포피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신곡에서라면 가장 비참할 장소일 계단식 원형 구조의 가장 밑바닥에 갇혀 점점 어두워진다.

진 슬링이 포피의 타락에 이용하는 장치는 도박이다. 도박에서 승리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자신이 가진 패를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거꾸로 말해 상대의 가면을 벗기고 진짜 얼굴을 보는 것은 도박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 승자가 노련하게 숨겼던 패가 노출되는 마지막 순간의 탄식과 절망까지가 게임의 법칙에 포함된다. <상하이 제스처>의 장면 대부분이 테이블 주변에서 펼쳐진다는 사실은 영화 전체가 일종의 도박판처럼 보이게 한다.

 

    진 슬링이 자신과 이해관계가 얽힌 인물들을 춘절 파티에 초대한 목적은 그들이 가진 패로는 자신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진 슬링은 게스트들이 가진 패, 그들의 진짜 표정을 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파티 테이블에 초대된 사람들의 이미지를 닮은 인형을 그들이 착석할 자리에 맞춰 올려둔다. 인형의 생김새를 통해 자신의 자리를 유추하는 게스트들의 표정이 미묘해진다. 파티에 초대된 이들은 여유를 잃어가고 숨겨둔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진 슬링은 사람들을 자신의 통제 안에 두는 것에 하나씩 성공한다. 진 슬링의 최종 목표는 차터리스다. 진 슬링은 차터리스 앞에서 승자의 패, 자신의 얼굴을 내보인다. 그런데 차터리스는 그것의 의미를 한 번에 읽어내지 못한다.

당신의 이 가면 뒤에 뭐가 있지?” 차터리스가 보고 있는 것은 진 슬링의 가면이 아니다. 하지만 이 질문이 불현 듯 영화 바깥을 건드렸던 것처럼 그는 그 이면을 보려 한다.

 

    차터리스를 더욱 상처 입히기 위해 진 슬링이 자신의 마지막 패로 망가진 포피를 마침내 내세웠을 때, 포피는 계속된 패배 속에서 속절없이 타락한 영혼이 되어 나타난다. 이 순간까지 포피는 진 슬링의 차터리스를 향한 복수의 일방적 희생양으로만 보인다. 가면을 쓸 줄 모른다는 것은 도박에서의 필패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 순간 포피는 가면을 쓰지 않았으므로 자기 자신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그녀의 패배는 다른 얼굴을 가지게 된다. 자신의 타락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표정과 몸짓으로 자신을 더 이상 통제하지 말라는 포피의 저항은 부모를 향한 첫 번째 반항처럼 기묘하게 어리고 매혹적으로 순수하다.

백인의 얼굴을 하고 중국인의 가면을, 디트리히의 얼굴을 하고 오너 먼슨의 가면을, 상처 받은 여인의 얼굴을 하고 냉혹한 사업가의 가면을 쓰기를 요구 받은 진 슬링과 달리 처음부터 가면을 쓸 줄 모르는 포피의 얼굴에는 이면이 없다. 가면을 쓴 자들이 가지지 못할 얼굴, <상하이 제스처>에는 이것을 두려움과 이끌림 속에서 바라보고 있는 스턴버그의 표정이 담겨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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