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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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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사샤 기트리 특별전 <샹젤리제>2019-03-06
Review 3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retrospective sacha guitry 사샤 기트리 특별전 2019.3.1(금) - 3.17.(일)

 

<샹젤리제> : 자유로움의 힘

 

김나영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사샤 기트리의 1938년 작품 <샹젤리제>는 수학 선생으로 분한 사샤 기트리가 아이들에게 수업과 무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기트리가 영화에 별도의 화자를 등장시켜 영화의 중심 서사를 진행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것은 이 영화만이 아니다. <진주 왕관>(1937), <나폴레옹>(1955) <샹젤리제>와 같이 역사를 다룬 영화에서도, 그의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1936)에서도 기트리는 곧장 이야기로 들어가는 대신 이야기를 전달하는 이야기 밖의 화자를 등장시킨다.

 

 

    이야기 속 이야기의 형태를 지닌 액자 구조의 영화가 드문 것은 아니다. 이들 영화가 액자 구조를 이용할 때는 믿을 수 없는 화자의 문제가 중심이 된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점에서 서술되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액자 내부의 이야기는 그 진실성을 의심받는다. 이때, 액자 바깥은 대개의 경우 액자 내부의 진실을 판별하는 객관화된 현실적 공간으로 간주되는 것이 액자 구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기트리는 화자를 내세움으로써 오히려 이야기의 허구성 자체를 보다 더 보증하고자 한다. 기트리에게 중요한 것은 있을 법한 허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화자가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기트리가 그 자체로 허구로 인식되는 극영화를 만들면서도 이처럼 복잡한 계산을 통해 영화 속 이야기가 허구임을 전면화하려 한 이유는 그의 경력 안에서 추측해볼 수 있을 듯하다.

사샤 기트리는 잘 알려진 대로 연극배우이자 연출가인 아버지 뤼시앙 기트리를 따라 연극무대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기트리가 예술계에서 쌓은 초기 경력 대부분은 연극무대에 바쳐졌으며 매우 성공적이었다. 기트리에게 이야기꾼으로서 자신의 재능을 펼쳐 보이기에 보다 익숙한 장소는 연극 무대였던 셈이다. 연극에서 영화로 경력을 옮겨온 많은 연출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연극의 흔적을 자신의 영화 안에 들여놓는데, 기트리의 영화가 연극적이라는 평을 얻었던 데는 화면 구성의 측면에도 있지만 그가 영화적 특수성의 하나를 의식적으로 배제하려고 애썼던 측면에 있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기트리가 영화를 만들던 당시, 연극에 비해 영화는 사진과의 친연성에 의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지나치게 진실한 매체로 그에게 받아들여졌고 그는 관객들이 영화의 이야기를 곧장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트리를 매혹시킨 것은 진정 즐거운 이야기 그 자체였기 때문에 영화가 제공하는 과도한 핍진성을 제거하기 위해 믿을 수 없는 화자를 전면에 내세워 지금 관객들이 보고 있는 것은 그가 재미나게 꾸며낸 이야기임을 가능한 명백히 드러내고 싶었던 것 아닐까. 기트리가 그의 영화 경력을 아버지의 친구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우리 집에 온 그들>(1915)로 시작했으며, 이내 영화에 흥미를 잃고 한동안 영화 작업을 하지 않다가 극영화 <파스퇴르>(1935)로 영화 만들기의 즐거움을 깨달았다는 일화는 이러한 추측이 지나친 억측만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게 한다.

 

    이야기가 허구임을 지시하기 위해 믿을 수 없는 화자를 내세운다고 했을 때, 역사를 다루는 것은 이 문제와 보다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왜냐하면 공적 역사는 대개 진실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샹젤리제>는 실존했던 인물들이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 안에서 기트리가 허구의 세계를 재창조하려고 시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기트리는 여타 역사 영화들의 목표가 그러하듯 자신의 관점으로 역사적 사실에 대해 논평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대안적 역사 그리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트리가 이야기와 관객을 직접 대면하게 하는 대신 이야기 밖 화자를 관객과 이야기 사이에 내세움으로써 피하고 싶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선생님이 수업 대신 들려주는 이야기가 대개 그렇겠지만 기트리의 이야기는 아이들은 물론 관객들도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을 만큼 매혹적이고 또 자유롭다. 기트리에게 중요한 것, 그리고 그가 <샹젤리제>를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사실들의 타임라인 속에서도 무한히 가능한 이야기 만들기의 자유다. 사실들의 세계인 역사라는 단단한 표면에 균열을 내기 위한 기트리의 전략은 이렇다.

그는 우선 무려 3세기에 걸친 대단히 긴 시간을 다루면서도 그 안에서 보다 사소한 순간들을 소재로 선택한다. 이를테면, 대작곡가 바그너의 등장은 뜻밖의 웃음을 선사하지만 역사의 큰 줄기 안에서 그의 등장이 서사적으로 정당화될 어떤 이유도 없는 식이다. , 절대군주이자 태양왕 루이 14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을 베르사유 궁전을 지은 것으로 가볍게 넘어가고 대신 루이 15세의 이야기, 그것도 그의 여성편력에 긴 시간을 할애한 것은 기트리가 <샹젤리제>에서 자신의 관심에 따라 역사의 중요도를 재편했기 때문이다.

이때 수학 선생 기트리는 자신이 루이 15세의 이야기에 천착하는 정당한 이유가 있음을 능청스럽게 고백하는데, 그 비밀은 놀랍도록 개인적이고, 믿을 수 없이 황당하지만 또한 견고한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다. 루이 15세 이래 4대에 걸쳐 자신에게까지 이어지는, ‘54세에 아이를 낳고 64세에 죽는다.’는 결과적이지만 비껴나간 적 없으며 곧 화자에게 닥칠지 모를 운명은 <샹젤리제>의 세계가 나아가는 방향이다. 기트리는 스스로 역사의 필연성에 필적하는 새로운 법칙을 구축해낸 것이다.

 

 

    화자가 왕의 후손임이 드러나면서, 그가 이따금 내보이는 권력을 잃은 왕들을 향한 연민의 시선은 그의 정치적 입장보다는 핏줄에 이끌리는 기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역사를 서술하고 재창조하는 기트리의 태도가 매우 가볍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 가벼움이야말로 기트리가 역사에서 이야기의 소재를 취사선택할 때도, 세대를 관통하는 운명을 창조할 때도 그가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하는 근간이다. 이 자유로움이야말로 기트리가 웃음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게 이끄는 진정한 힘이다. <샹젤리제>는 궁극적으로 이것을 찬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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