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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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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앙드레 바쟁이 사랑한 영화들 <7인의 무뢰한>2018-12-18

 

<7인의 무뢰한>과 앙드레 바쟁이 표한 애정에 대하여

 

김현진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1.

    버드 보티커 감독의 서부극 <7인의 무뢰한>(1956)은 선악 대결구도와 권선징악이라는 서부극의 고전적인 틀을 부수지 않으면서, 돈가방 쟁탈전이라고 부를 만한 범죄영화의 플롯을 배치함으로서 단순한 서부극 이상의 영화로 남았다. 욕망으로 가득한 인물들끼리 서로 속고 속이는 배신과 반전의 순간들을 여러 차례 보여주면서 이야기의 전형적인 틀을 흔드는 것이다.

비가 내리는 황야의 밤, 한 남자가 비를 피하러 두 남자가 불을 피우고 앉아 있는 바위 밑으로 간다. 짤막한 대화를 나누고 커피를 얻어 마시고는, 곧장 권총으로 둘을 쏴 죽이는 첫 장면부터 범상치 않은 전개가 될 것임을 예고한다. 주인공 스트라이드는 전직 보안관이었고 아내는 7인의 강도에게 살해당했다. 강도들은 흩어져서 누군가가 운반해올 2만 달러의 금을 기다린다. 금은 어디에 있고 강도들은 어디에 있는 누구인가? 금을 운반하는 자는 누구인가? 스트라이드는 이들을 어떻게 찾아내 복수할 것인가? 이 미션 속에 우연히 만난, 마차를 몰고 가던 그리어 부부와 적인지 아군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남자 마스터즈와 클리트가 가세한다. 그들의 여정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반전으로 가득하다.

물론 영화 속엔 서정의 순간도 있다. 스트라이드와 여정을 함께 하는 그리어 부인과의 장면들이다. 스트라이드는 길을 가던 중 진창에 빠진 그리어 부부의 마차를 빼내고 그들과 동행하게 된다. 그들은 진흙으로 엉망이 된 몸을 씻기 위해 강가에서 쉬게 된다. 스트라이드와 그리어는 말을 씻기고 있다. 그리어 부인은 목욕을 하기 위해 멀리 수풀이 우거진 강가로 간다. 멀리서 세이렌의 노래처럼, 그녀의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스트라이드의 손은 말을 씻기고 있지만 눈은 수풀을 향해 있다.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 아니면 그리어 부인의 스트라이드를 향한 마음이 먼저였을까?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은 영화 속에 은근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화창한 날 마차를 세우고 빨래를 하는 두 사람 사이에 바람이 불어온다. 서로를 마주보는 두 사람의 마음처럼 그들의 머리카락도 흩날린다. 바람은 점점 심해지고 먹구름도 몰려온다. 마치 둘의 사랑이 순탄치 않을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랜돌프 스콧이 연기한 스트라이드는 온화하고 점잖은 인상의 얼굴을 한 과묵한 신사 같은 남자다. 그도 그리어 부인에게 마음이 있어 보이지만 그는 그리어 부인의 마음을 받을 수 없다. 아내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기에 그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엄격하고 금욕적인 히어로다.

 

 

    스트라이드의 반대편에는 탐욕적이고 능글능글한 분위기의 마스터즈가 있다. 그를 연기한 리 마빈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악역을 연기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악역일 때나 주인공일 때나 하나같이 사악해 보였다. (<포인트 블랭크>(1967)<빅 레드 원>(1980)에서 그에게 죽어간 이들이 얼마나 불쌍해 보였는지를 생각해 보자.) 그가 연기한 마스터즈는 미꾸라지처럼 여기저기를 오가면서 분위기를 흐려놓는다. 금을 노리는 강도단 무리와 스트라이드 일행을 오고 가면서, 특유의 무표정으로 주위를 불편하게 만드는 말들을 계속 내뱉는다. 그리어 부인에게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추파를 던지듯 말을 하는 순간이나 강도단의 보스인 보딘이 포커를 치고 있던 테이블을 마스터즈가 발로 엎어버리는 장면을 보면, 마빈에게는 확실히 스크린에 찬물을 끼얹듯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묘한 능력이 있었다. 스트라이드와 마스터즈, 랜돌프 스콧과 리 마빈의 대조를 극대화하면서, 서로의 캐릭터와 연기가 더 부각될 수 있었다.

 

2.

    버드 보티커 감독의 생전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7인의 무뢰한>을 꼽았다. 그만큼 이 영화를 사랑한 사람은 또 있었다. 영화평론가 앙드레 바쟁이다. ‘가장 지적이지만 가장 주지적이진 않고, 가장 세련됐지만 가장 미학적이진 않고,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서부극’. 바쟁은 카이에 뒤 시네마에 쓴 평론 모범적 서부극 - <7인의 무뢰한>’에 이렇게 썼다. 국내에 번역된 바쟁의 책 영화란 무엇인가에 실린 이 글은 <7인의 무뢰한>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하다. 그는 이 글에서 내가 전후에 본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서부극’, ‘이 작품에 필적할 만한 것은 단지 안소니 만의 <운명의 박차(The Naked Spur)>(1953)와 존 포드의 <수색자>(1956)’라거나, ‘조지 스티븐스의 <셰인>(1953)은 걸작으로서 떠받들어지고, <셰인>보다 훨씬 빼어난 <7인의 무뢰한>은 인정을 받지 못한 채등등의 표현을 써가면서까지 <7인의 무뢰한>에 극찬을 바친다.

 

    바쟁의 안목이나 취향, 표현 방법에 대해 반대나 비난을 할 생각은 없다. (물론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바쟁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는 심지어 이런 표현도 썼다. “보안관이 권총을 발사하는 장면은 절대로 볼 수가 없다. 마치 보안관이 권총을 발사하는 게 너무 빨라서 카메라가 정면에서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던 듯이 말이다.” 바쟁은 이를 영화가 보여주는 유머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바쟁이 그 장면을 그렇게 묘사했다는 사실이 더 재미있다. 이런 표현은 동의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떠나서 일단 재미있다. 이 영화를 사랑하지 않고서야 이런 문장이 나올 수가 있을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대상을 더 잘 알고 더 잘 볼 수 있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 대상에 눈이 멀어버리는 것인가. <7인의 무뢰한>과 바쟁의 글을 연달아 접하며 드는 생각이다. 잠정적으로 내리고픈 결론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두 가지의 가능성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쟁의 글에 동의할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내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보다 내가 더 하고픈 얘기는 바쟁이 평론가로서 살짝 균형감각을 잃은 것처럼 이 영화는 최고다라는 태도로 평론을 밀어붙일 때의 그 아슬아슬함, 나는 그것에 감명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 덕에 보티커의 영화가 50년의 세월을 넘어 아직도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영화관에서 상영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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