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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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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오즈 '오즈 야스지로 감독론'2018-02-13
Review 2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나루세+오즈 2018.02.11(일) ~ 02.25(일)


 

 

 

 

 

 

 

 꼰대들의 변화 - 오즈 야스지로에 관하여

 

한창욱(부산영화평론가협회)

 

지난날, 결혼은 행복한 삶을 위한 필요조건이었다. 비혼은 곧 불행한 삶이란 의미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비혼 또한 삶의 양식 중 하나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개인 선택권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점차 더 힘을 얻어 가며, 자발적으로 비혼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늘어 간다.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오즈의 영화에서는 결혼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 결혼 안 한 딸의 혼인을 서두르고, 혼자 남은 홀아비와 홀어미를 걱정하며 재혼을 부추긴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오즈의 영화가 낡은 가치관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부장적 삶, 결혼을 강요하는 듯한 분위기,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삶, 그런 삶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는 듯한 세계관이 느껴지는 것이다.

오즈의 영화는 씨네필과 비평가들에 의해 오랜 시간을 거치며 정전화되었다. 오즈의 독특한 양식에 관한 담론을 중심으로 정전화는 견고해졌다. 하지만 우리는 오즈의 영화를 고리타분하고 답답하며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도 종종 발견하게 된다. 그런 사람에게 오즈의 영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정전화된 형식 미학적 가치로 그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오히려 반감만 더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오즈 야스지로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는 오즈의 영화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고, 오즈의 영화를 지금 이 시대의 삶에 가닿을 수 있는, 지금의 삶 또한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가치로 말할 필요가 있다.

 

먼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가 여성의 결혼을 강요한다는 것은 명백히 오해다. 오즈에게 중요한 것은 결혼 여부가 아니다. 결혼 여부 문제는 시대상의 반영으로서 오즈의 세계관을 전하기 위한 소재라고 보아야 한다. 오즈가 드러내려 하는 것은 결혼하고 마는 문제가 아니라 결혼과 같은 일을 통해 겪게 되는 변화와 그 변화가 만들어내는 애상의 정서다. 오즈는 그 정서를 화면 위에 새기며 우리에게 변화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순간에 침잠하게 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플롯과 무관해 보이는 화면에 주목해야 한다. 오즈의 영화 화면 위에는 부동의 형태와 동적 형태가 반복해서 나타난다. 오즈가 그토록 지속해서 포착하고 있는 이 이미지들은 오즈의 영화에 관해 말하는 데 있어 중핵에 자리한다. <늦봄>(1949)에서 노리코가 결혼하기로 한 후, 가족들은 기요미즈데라로 나들이를 간다. 이때 딸 노리코와 아버지 핫토리는 자로 꺾인 기요미즈데라 건물 앞뜰 각 변에 자리하여 상당히 먼 거리를 두고 서 있다. 그들의 거리는 이별을 준비하는 자들의 심정을 대변한다. 마치 이별의 예고편과도 같다. 곧 그들이 화면 좌측으로 빠져나가면서 우측에서 여학생 무리가 지나가고, 그것과 함께 쇼트가 전환되면 카메라는 여학생 무리를 후경에 두고 흐르는 물을 전경에 배치한다. 오즈는 이러한 이미지 배치를 통해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순간을 새기고 품는다. 삶은 흐르는것이다.

오즈에게서 세계는 고정된 것과 흘러가는 것이 공존하는 장소다. <동경 이야기>(1951)의 첫 쇼트는 우뚝 솟은 비석과 그 뒤로 지나가는 배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 이후로도 화면 전경에 가만히 놓인 맥주병 뒤로 후경에 등교하는 학생들을 보고, 조용히 산 아래에 늘어선 집들 사이로 지나쳐가는 기차를 본다. <가을 햇살>(1960)에서는 벽에 비치는 물 일렁임, <안녕하세요>(1959)에서는 건물들 사이로 지나쳐 가는 인물들이 나타난다. 유작이라 할 수 있는 <꽁치의 맛>(1962)에서도 흘러가는 공장 연기와 가만히 우뚝 선 굴뚝이 대비된다.

우리는 이러한 대비로부터 말로 설명하기 힘든 삶의 어떤 리듬을 목격한다. , 오즈의 세계가 만들어내는 정서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의 위상 차이가 만들어내는 리듬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리듬들은 영화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그 상이성은 오즈의 영화 속 양식을 감히 하나로 환원하기 힘들게 한다.

 

인물들은 오즈의 리듬 안에서 피치 못하게 삶의 변화를 겪는다. <동경 이야기>에서 슈키시와 토미는 동경의 자식들 집에 놀러 왔다가 전통적 가족의 해체를 온몸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변화를 경험해야 하는 것은 죽음에 직면한 어른이나, 망아지처럼 경망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이나 마찬가지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동경으로 오자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책상을 옮겨야 한다. 자신에게 익숙했던 세계 풍경이 다른 이의 존재로 인해 바뀌어 버린 것이다.

때때로 아이들은 견고하게 닫힌 세계에 틈을 내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안녕하세요>에서 아이들은 TV를 사달라고 떼를 쓰며 어른들의 변화를 요청한다. 오즈는 <맥추>(1951)에서 장난감 기차 레일을 더 사달라고 떼쓰는 아이들에게 아빠가 사온 빵을 걷어차 둘로 분리하게 만든다. 이는 세계의 균열에 대한 오즈의 장난기 어린 연출 방식이기도 하다.

오즈의 영화는 고정된 것과 변하는 것의 대비를 통해 우리에게 변화에 대한 감각을 세심하게 벼리게 한다. 오즈는 세계가 끊임없이 변하고 있으니 사물과 사태의 변화를 예민하게 알아채기를 바란다. 이는 <동경 이야기>에서 어머니 토미의 말을 통해 매우 직접 드러난다. 토미는 점차 이전과 달리 변해가는 자식들의 상황을 지켜보고선 슈키시와 자신은 이제 전혀 변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중에 토미는 죽음으로써 영화 속에서 가장 큰 변화를 만들어내는 인물이 된다. 죽음을 향해가는 토미의 변화는 자식들도 눈치채지 못하고, 남편 슈키시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의 뒤늦은 깨달음으로부터 삶에서 상실된 것을 상기한다. 상실이란 언제나 슬며시 우리에게 다가와 삶의 풍경을 변화시킨다. <맥추>에서 풍선을 보고 그것을 잃어버린 아이는 울고 있을 거라고 말하듯이, 오즈는 우리 삶에서 변화되어 상실되어 가는 것들, 특히 타자에게서 일어나는 변화와 상실을 감각하기를 바란다. 이는 타자에 대한 윤리성을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물들이 삶의 변화와 마주하는 순간은 안타까우면서 슬프다. 우리가 그 순간에 애상을 느끼는 것은 우리도 그들처럼 언젠가는 세상의 변화를 체념하며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변화하는 세상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라는 시각틀로 오즈의 영화를 바라볼 때, 하라 세츠코라는 배우의 존재는 더욱 특별해진다. 세츠코는 오즈 야스지로의 <늦봄>,<맥추>,<동경 이야기> 에서 모두 노리코라는 여성으로 분했다. 그만큼 오즈의 작품을 얘기할 때 세츠코의 노리코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동경 이야기>에서 노리코는 자신의 남편이자 노부부의 셋째 아들인 쇼지가 죽은 지 한참이나 됐음에도 시부모였던노부부을 극진히 보살핀다. 남편의 사진까지 그대로 간직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과거만 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노리코는 동경의 작은 회사에 다니며 자신만의 삶을 스스로 일군다. 과거를 간직하면서도 현재를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다.

노리코는 점차 개인주의적인 삶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와 집단의식이 강한 전통적 가족의 굴레가 갈등을 일으키는 곳에서 중재자가 된다. <동경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막내딸 쿄코가 언니와 오빠들이 이기적이라며 불만을 터뜨릴 때, 노리코는 그들도 자신들의 인생이 있다고 말하며 자식 세대를 위한 변명을 마련한다.

하라 세츠코의 몸짓과 표정은 전통적 여성의 순종성을 나타내는 동시에, 신중하게 자신의 현재를 스스로 꾸리려는 주체성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그녀의 육체는 곧 변화와 불변을 모두 품는 장소가 된다. <늦봄>에서 늙은 홀아버지 곁을 지키려고 하지만 결국 떠나야만 했던 노리코를 연기할 때도, <맥추>에서 가족의 의지와는 다른 미래를 선택하는 노리코를 연기할 때도, 하라 세츠코의 유순하면서도 강단 있는 얼굴은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중간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혼란을 모두 감내하고 체화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우리는 그 얼굴 앞에서 삶의 비애를 느끼게 된다.

 

변화와 마주하는 모습을 통해 오즈의 영화는 기존 삶을 유지하려 하는 사람들에게 변화를 촉구한다. 이는 영화 속에서 이른바 꼰대들의 등장과 변화로 나타난다. ‘꼰대는 과거의 가치관만으로 변해가는 현재를 판단하는 이들이다. <동경 이야기>에서 정신적으로 무장이 되지 않았어라며 젊은 아들을 나무라는 친구에게 핫토리는 시대가 바뀌고 있어. 우리도 생각을 바꿔야지하고 답한다. 이렇게 기성세대는 자기 생각을 바꿔나가는 계기와 만난다.

<피안화>(1958)에서 히라야마는 딸 세츠코가 자신의 동의 없이 결혼 상대를 정하자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그런 히라야마에게 아내는 히라야마가 언제나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낸다고 놀리듯 말한다. 히라야마의 그런 모습은 <안녕하세요>, <맥추>에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토라지는 아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오즈의 영화가 히라야마와 같은 인물을 등장시키며 그들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은 어른이 되는 방식에 대한 제안이기도 하다.

오즈는 기성세대의 삶을 풍자적으로 드러내며 그들의 낡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꼬집는다. 남성 어른들이 자기의 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놓는 모습이나, 여자들 외모에 관해 뒷담화 하는 모습을 무심하게 담으면서 그들의 행위가 스크린 위에 현현하게 한다. 화면 위에서 그들은 자신의 일도 스스로 하지 않고 제 모습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는 이들이다.

<가을 햇살>에서 자기들 멋대로 아키코, 아야코 모녀의 결혼을 정하려 했던 남자 어른들에게 유리코는 신선한 충격을 안긴다. 유리코는 그들에게 세상의 변화를 각인시키는 존재가 된다. 그러한 존재가 딸의 결혼으로 집에 혼자 남은 아키코를 위로하는 모습은 세상과 타자에 대한 이해가 기성세대가 아닌 후세대에서 더 유의미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전한다. 이는 <안녕하세요>에서 아이들이 어른들이 쓸데없는 소리를 더 많이 하잖아.”하며 이 세계에 대한 성찰을 의도치 않게 이끌어내는 모습에서도 발견된다.

이렇게 오즈는 꼰대가 된 기성세대의 현재와 변화를 보여주면서 세계의 지속적인 성장을 주문한다. 오즈가 청하는 성장은 세계와 타자의 변화에 대한 세심한 감각을 기르는 일이자 변화하는 세상 앞에 견고하게 버티고 선 기존 관념을 흐트러뜨리는 일이다. 그의 요청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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