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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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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르의 계절과 도덕이야기 '계절 이야기'2018-02-02


 

 

 

 

 

  

계절 이야기 - 날씨는 순수한 도덕률이며, 계절은 순결에로의 탐색이다.

 

김영광 부산영화평론가협회 

 

 

공식과 비공식, 가능성과 여지, 날씨는 순수한 도덕률이다.

 

  로메르 영화에서 “날씨”는 중요한 계기가 되곤 한다. 그 계기가 순수한 형태로 등장하는 건 ‘도덕 이야기’ 첫 번째 작품 <몸소 빵집의 소녀>이다. 영화의 사건은 남자에게 데이트 약속이 겹치면서 두 여자 중 한 명을 선택하는 것이 전부이다. 마음에만 품고 있는 실비라는 여자, 실비를 볼 수 없던 와중 남자에게 호감을 표한 빵집 소녀. 남자는 대부분의 시간을 빵집 소녀와 보내놓고 흠모하는 실비를 선택한다. 그리고 소녀와의 약속을 미룰 수도 있지만 지금 실비를 선택하는 것이 도덕적 판단이라 독백한다. 그때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남자는 날씨가 자신을 구했다고 말한다. 비 덕분에 빵집 소녀가 걸어가는 실비와 자신의 모습을 못 볼 확률이 높아졌다는 말이다. 그러곤 6개월 후 남자와 실비가 결혼했으며 한동안 빵집 근처에 살았다는 게 결말이다. 다소 비겁해 보이는 남자의 행동이 도덕적이라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건 상상력의 영역이 아니다. 로메르는 사랑이란 공식에 많은 외적 요인(국적, 도시, 장소, 시대, 기간, 계절 등)이 작용한다는 걸 인정하는 사람조차 변덕스러워 밀어내고 마는 요인, “날씨” 자체를 사랑의 공식적 계기로 포함한 남자의 판단을 “도덕적”이라 말하는 중이다. 우리는 날씨를 계기로 두 사람에게 로맨스가 싹트는 이야기들을 많이 안다. 하나의 요인을 부풀려 인연-운명-영원이라는 종교적 공식을 밟는 이야기들 말이다. 이 영화에서 로메르는 두 사람 사이의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이 아니라 한 사람의 유한한 변화의 "여지"로서 날씨를 보여준 것이다.

 

  그 “여지” 자체를 보여주는 영화는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이다. 갑자기 눈이 내리는 바람에 주인공 루이가 친구 비달의 여자 친구 모드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나 섹스를 한 것도 안 한 것도 아닌 그 상황이다. 그 하룻밤은 루이와 모드 사이를 남자친구 비달보다 더 친밀하게 만들지만 연인으로 발전시키지는 않는다. 날씨라는 여지만큼 다가섰고 물러선 것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로메르는 날씨와 관계있는 다른 여지를 소개한다. 루이가 모드를 알기 전 프랑소와즈를 보고 첫 눈에 결혼하게 될 것을 알았으며 정말 결혼하게 되는 결말이다. 루이는 날씨와 연관된 모드와의 관계에선 종교적 공식을 따르지 않지만 프랑소와즈를 선택하는 건 정말 종교적 행위로 보인다. 로메르는 모순되어 보이는 루이의 선택으로 하나의 도덕적 판단을 제기한다. 로메르의 표현에 따르면 ‘선험적 사고’에 의한 선택이다. 눈앞의 상대를 직관으로 앎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이란 대타까진 호출하진 않으며, 학습과 신학, 정신분석과 기하학적 논리, 온갖 공식을 투여해도 여지로 남는 비공식적 원리. 로메르에게 선험적 사고에 의한 선택은 마음이란 내면의 장소의 ‘존재론적 감정’에 의한 선택이며, 이 비공식적 원리도 사랑의 공식적 계기로 포함시키는 게 ‘도덕적 판단’이라는 것이다. 감정은 마음이라는 장소의 날씨이며, 순수한 물리적 변덕성을 지닌 날씨와 접선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날씨는 누군가에게는 ‘존재론적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또 누군가의 ‘존재론적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루이는 ‘처음 본’ 친구의 애인 모드에게 호감을 느낄 당시 존재론적 감정이라 생각했을 수 있고, ‘첫날에 밤’을 보낸 것도 존재론적 선택이라 판단한 것일 수 있다. 중요한 건 날씨라는 여지가 없었다면 루이는 두 여자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선택에서 존재론적 순수성을 재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고, 쉬이 날씨라는 계기에 노출되는 사람은 그 변화의 여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순종성을 띤다는 것이다. 로메르는 연애가 존재론과 관련 있으며 자신의 영화를 “날씨의 노예”라고 표현한다. 로메르 영화에서 날씨라는 여지는 일종의 ‘순수한 도덕률’인 것이다.

 

굴절과 역전, 날씨와 계절, 접선은 생체 에너지이다.

 

  로메르 영화에서 날씨와 계절은 무슨 관계일까? 로메르가 ‘희극과 격언’ 중 유일하게 여름 영화라고 밝힌 <녹색 광선>에 그 실마리가 있다. 주인공 델핀의 여름휴가 계획이 친구의 변심으로 좌절되며 시작되는 이 영화는 그녀의 까다로운 성격, 변덕스런 기분이 모든 연애의 가능성을 틀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로메르는 날짜라는 규칙으로 진행되는 <녹색 광선>에서 델핀이란 존재를 “날씨” 자체, 변덕스럽기로 유명한 “파리의 날씨”처럼 다룬 것이다. 델핀은 날씨처럼 여지를 들고 늘 사람들을 먼저 찾아간다. 문제라면 지금이 억눌린 가능성을 부풀리기도 모자란 공식 휴가철이고, 델핀의 ‘순수한 도덕률-까다로움’과 ‘존재론적 순수성-변덕’은 왠지 계절의 기운을 꺾는 나쁜 여지로 여과 되어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로메르가 보여주려는 것은 인위적 기류가 드리운 계절의 기운과 날씨라는 기분 사이의 ‘굴절 현상’이다. 이 굴절 현상은 델핀이 자기 기분의 ‘결백’함을 밝히는 데 급급하게 만들고, 여지라는 도덕률이 후회의 여정을 반복하는 결정 외에 쓸모없다는 ‘존재론적 회의’에 빠지게 만든다. 이 영화의 피날레에 보려하는 녹색 광선은 계절의 기운과 날씨라는 기분의 순수한 ‘접선 현상’에 다름 아니다. 로메르는 그조차도 굴절 현상인 녹색 광선으로 굴절의 굴절이라는 관점 변화, 즉 ‘역전 현상’을 보여주려 한다. 녹색 광선과 함께 우기를 예고하는 듯한 델핀의 눈물방울이 먹구름 사이를 비집은 빛줄기로 바뀌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남자의 역할이 순수한 계절의 기운을 대변하느냐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여정을 끝내려는 델핀의 존재론적 회의에서 날씨라는 여지의 존재론적 감정을 느꼈고, 델핀이 갑자기 다시 떠나는 여행과 거기서 녹색 광선을 보려는 존재론적 선택은 이 남자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녹색 광선을 본 순간 델핀에게서 터져 나오는 기쁨의 ‘함성(oui!)’은 기분의 전환이라기보다 ‘긍정의 기운’이다. 그 기운은 순간 델핀과 하나의 결정체로 접선된 이 남자 없인 성립되지 않는다. 델핀은 사랑은 해봤다지만 모든 연애에는 실패했고, 남자는 사랑만은 해보지 못했다며 해보고 싶다 한다. 계절과 날씨가 순수하게 접선하는 녹색 광선을 본 두 사람이 하나의 결정체로 얻은 긍정의 기운은 ‘진짜 사랑’을 찾으려는 동력으로서의 ‘생체 에너지’일 것이다.

 

계절은 순결에로의 탐색이다.

 

  이제야 글의 주된 내용을 쓰게 된 건 ‘사계절 이야기’의 과정이 굴절 현상으로 델핀이 ‘존재론적 회의’를 겪게 되는 상황의 변주곡이며, 결말은 역전 현상을 일으키는 생체 에너지를 탐색한 것이기 때문이다. <녹색 광선>은 그 원형으로 설명이 많은 영화지만, ‘사계절 이야기’는 그 계절의 시간성을 체험하는 데 의의가 있다(직접 보는 것보다 좋은 설명이 없다는 뜻이다). 첫 번째 작품 <봄 이야기>의 주인공 잔느가 겪는 ‘존재론적 회의’는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론적 감정을 건드리는 남자친구의 ‘부재중’이다. 존재하긴 하지만 등장하지 않기에 ‘존재론적 여지’로 기능한다는 뜻이다. 영화는 잔느의 ‘존재론적 회의’를 본체(남자친구)를 대체한 기대로 여과하고 그 회의를 대신 여과해준 상대(나타샤)에게 기대로 부응코자 대타(나타샤 아버지)의 여지를 두지만, 결국 그 여지로 본체에 대한 기대를 여과할 수 없을 때 서로가 주고받은 기대만큼 음모론적 기류가 형성되는 걸 보여준다. 봄은 막연한 기대감을 제공하지만 그 기대감은 겨울이란 계절의 다른 기운이며, 그걸 받아들이지 못할 때 오인된 희망-의지-믿음이란 공식을 밟고 망실과 실망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봄 이야기>에서 그 음모론적 기류는 있긴 있었으나 누가 훔쳐갔다고도 하고 그게 또 거짓말이라고도 하는 ‘목걸이’로 대변되고 잔느의 ‘부재중’인 남자친구와 접선 관계에 놓인다. 로메르는 그 ‘굴절 현상’인 음모론적 기류를 단순하게 풀어낸다. 목걸이가 갑자기 나타나자 잔느는 아직 나타샤를 의심하는 한편 괜히 오해한 것일까 걱정하지만, 나타샤는 목걸이의 등장을 기뻐하며 음모는 ‘풀기 위해 존재’한다는 걸 단순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역전 현상으로 잔느는 울음을 터트리고 부재중인 남자친구 집에 꽃을 가져다 놓는다. 로메르가 <봄 이야기>에서 탐색한 생체 에너지는 ‘홀가분’인 것이다. 봄의 기대감은 겨울의 날씨가 풀리길 바라는 기다림의 영향이란 뜻이다.

  다음 <겨울 이야기>의 주인공 펠릭시는 주소를 잘못 알려 주는 바람에 여름휴가에서 만난 정열적인 사랑 샤를르와 이별한 사람이다. 샤를르는 모르지만 펠릭시는 사랑의 결실로 딸 엘리스까지 얻었다. 문제는 많은 이들이 동화적이라 지적하듯 펠릭시와 샤를르가 우연히 버스에서 서로를 한 눈에 알아보고 갑자기 해피엔딩을 맞는 결말일 것이다. 로메르는 이에 관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당연하다. 이건 간단한 수학 공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어서도 보기 싫은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다고 유난스레 떠벌리곤 한다. 원수는 이미 알던 사람이며, 펠릭시는 여름휴가에서 만난 사랑 샤를르를 버스 안에서 다시 마주쳤을 뿐인 것이다. 풀어내야하는 문제는 영화 과정에서 자신을 흠모하는 두 남자 사이를 변덕스럽게 오가던 펠릭시가 생사여부도 모르는 샤를르를 어떻게 5년이나 기다렸냐는 것이다. 펠릭시의 ‘존재론적 회의’는 샤를르의 부재로 인한 ‘존재론적 온기'이고 사실 그녀와 잠자리를 하는 두 남자는 육체적 온기를 기다림의 연료로 내어준 셈이다. 게다가 펠릭시는 샤를르와 만날 줄도 모르면서 두 남자에게 먼저 이별을 고한다. 그 계기는 백년이 넘는 동안 온기만은 죽지 않은 듯한 성녀 베르나테트, 엘리스를 따라 우연히 들어간 예배당에서 본 아기 예수의 동상이다. 펠릭시는 죽어서도 사랑한다는 예수의 앳된 모습에서 샤를르에 대한 자신의 마음, 딸 엘리스라는 존재론적 온기가 이미 자신에게 있음을 확인한다. 펠릭시가 샤를르를 만날 거라고 ’예감‘했다는 말은 두 남자와 이별로 그들 집에 있는 시간이 줄었고,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며 샤를르를 만날 시야를 확보한 확률적 의미인 것이다. 결말에서 딸 엘리스는 재회한 두 남녀와 떨어져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할머니는 엘리스가 소외되어 눈물을 흘리는 건가 걱정하지만 엘리스는 부끄러운 듯 기쁨의 눈물이라고 또박또박 말한다. 우려스런 눈물방울이 찝찝함 없는 명쾌한 빛줄기로 바뀐 역전 현상이다. 로메르가 <겨울 이야기>에서 탐색한 생체 에너지는 ’상쾌함‘인 것이다. 변덕스럽기로 유명한 파리의 날씨는 겨울이 가장 심각하다고 한다.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비만큼 해가 반짝 뜰 때의 상쾌함도 그만큼 존재한다는 뜻이다. 눈치 챘겠지만 날짜라는 규칙으로 진행되는 <겨울 이야기>의 펠릭시는 파리의 겨울 날씨를 대변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세 번째 작품 <여름 이야기> 주인공 가스파의 ‘존재론적 회의’는 어떤 여자도 접근하지 않는 자신의 처지, 자기 말마따나 허깨비 신세인 ‘존재론적 불안’이다. 그는 브리타뉴 지방에 여름휴가를 와서 웬일로 세 명의 여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되고, 변덕으로 일이 틀어질 때마다 작곡을 한다. 그러나 가스파가 누구와도 섹스를 하지 못하고 꿈꿔왔던 오위쌍트 섬에 아무도 데려가지 못하는 게 <여름 이야기>의 결말이다. 사실 이 혼란스런 결말까지 오며 가스파가 본인도 모르게 작곡한 음악은 비달디의 사계 중 여름에 흡사한 경지일 것이다. 무언가 처연한 분위기가 이어지다 갑자기 내달리기 시작하고, 잦아든 다음 갑자기 다시 격정으로, 내려앉은 다음 격하게 소용돌이치며 흩어지기 시작한다. 이 곡을 듣는 청자가 느끼는 감흥은 ‘도대체 그해 여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에 다름 아니다. 역시 날짜란 규칙으로 진행되는 <여름 이야기>는 출신지가 다른 네 청춘남녀의 뚜렷한 성격을 각 지방의 날씨처럼 보이게 만든다. 단 그들의 공통점이라면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내면의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시간성은 가스파가 작곡한 해적, 모험에 관한 노래처럼 항해 중의 휩쓸린 폭풍과 그 통과함에 가깝다. <여름 이야기>에서 로메르가 탐색한 생체 에너지는 ‘후련함’인 것이다. 청춘에게 불안은 ‘존재론적 박동’의 자연스러운 이름이다. 폭풍의 계절을 통과하면 으레 수확의 계절도 올 거라는 뜻이다.

 

  <여름 이야기>처럼 계절을 나이테에 비유한 <가을 이야기>의 회의는 난감하게도 ‘존재론적 고독’이다. 그 고독의 주인공은 자식들 다 시집장가 보내고 포도밭을 일구고 있는 미망인 마갈리, 하나 남은 자식의 결혼식을 기다리고 있지만 괜스레 친구 마갈리가 걱정인 이자벨이다. <가을 이야기>는 소심한 금욕주의자 마갈리를 결혼시키려고 벌인 이자벨과 마갈리 주변인들의 소동극처럼 보일 수 있지만, 주변인들이 각자의 연애 상대를 시험하거나 각자 고독을 외면키 위해 마갈리를 이용한 연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로메르의 재치라면 그 양가적 상황을 자신의 독특한 관점으로 역전시켜 희극으로 만드는 점이다. 로메르는 인위적 기류(<녹색 광선>)나 도시 계획(<나무, 시장, 메디아테크>) 등 환경 변화에 관심이 많고, 그 환경 변화와 연애의 조건을 생태학적 관점으로 보곤 한다(‘도덕 이야기’까지는 주로 기상학적 관점으로 다루었다). <가을 이야기>에서 마갈리는 공장을 가려주던 울타리를 베었다며 흉물이라 혀를 차는데, 이는 환경오염과 연애의 조건에 관한 ‘생체학적 관점’처럼 보이는 것이다. 마갈리는 고집스럽게 유기농 포도를 재배하여 포도주를 만들고 그 포도주를 이자벨 딸 결혼식에 제공한다. 그 결혼식에는 마갈리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할 두 명의 남자가 찾아와 있고, 그 중 이자벨이 계획한 남자와 마갈리는 함께 와인을 마시며 서로 진짜 호감을 느낀다. 고독한 사람을 스스로 고독하다고 고백하지 못하는 고통스런 존재라고 한다면, 로메르는 도시의 인공적 계획이 감정을 메마르게 했다 할 순 없으나 체하게 만든 여지 정돈 있을 것이고, 따라 술이나 거짓말 등 인위적 계획으로 감정의 길목을 뚫어주는 여지쯤 허용하겠단 심산인 것이다. 서로 호감을 느끼는 마갈리와 남자는 한잔 더하러 가는 길목에서 계획이 탄로나 순간 틀어지지만, 둘 다 이자벨을 만나러 오는 차에 거짓말처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후일을 기약한다. 영화는 피로연에서 춤추는 사람들, 흐르는 노래는 와인과 수확의 계절을 자축하며 겨울을 기다리자는 내용이다. 로메르가 <가을 이야기>에서 탐색한 생체 에너지는 ‘보람참’이다. 겨울의 긴긴 기다림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 펠릭시의 경우처럼 좋은 결과가 기대되어서가 아니라 기다리는 대상이 '존재론적 만족감'을 주기 때문인 것이다.

 

  살펴보았다시피 '사계절 이야기'는 각각의 계절과 날씨의 접선, 굴절과 역전의 생체 에너지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못해도 환절기적 관계 정돈 된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로메르는 모든 인물들이 ‘진짜 사랑’을 찾고 싶어 하는 ‘사계절 이야기’를 왜 환절기적 관계로 다루었을까? 물론 연애와 마찬가지로 진짜도 존재론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진짜 사랑은 영원이라는 종교적 공식 안에서만 성립되는 것이며, 현실에선 진짜라 믿었던 사랑은 삶을 찬란한 백야처럼 만들었다가 일장춘몽처럼 절명시키기도 한다. ‘사계절 이야기’의 목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사랑을 찾으려는 이들이 존재한다면, 그들에게 주어져야 하는 건 믿음이 아니라 날씨라는 기분을 내게 하고 계절의 기운을 돌고 돌게 하는 것. 회의를 굴절시키고 절명을 역전시키는 생체 에너지를 순환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그 순환을 생체 에너지들의 결속이란 의미에서 “순결”이라고 부를 수 없을까? 로메르는 도덕과 육체를 떼어놓을 수 없다고 한다. 연애와 사랑도 떼어놓을 수 없지만 순결과 진짜 사랑도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진짜 사랑을 찾으려면 죽어도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순결이란 진짜 사랑을 찾기까지 생체 에너지를 놓지 않겠다는 “생명의 도덕률”일 것이다. 아마 순결에로의 탐색인 ‘사계절 이야기’를 통과한다면 로메르가 남긴 마지막 작품에서 ‘진짜 사랑’의 비밀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유작의 제목이 바로 <로맨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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