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전당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사이트정보
home  > 영화  > 영화와 비평  > 영화평론가 비평

영화평론가 비평

오디오 해설 영화관



영화에 대한 전문적 식견과 통찰력, 다양한 관점이 돋보이는
'영화평론가' 차별화된 평론을 만나는 공간입니다.
감독과 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평론글은
여러분을 새로운 영화 세상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글을 통해 들여다본 새로운 영화세상으로 떠나보세요!

엘리아 카잔 특별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2017-05-29

 


그녀의 밤과 낮

엘리아 카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김필남 부산영화평론가협회

 

Review 캐릭터 드라마의 제왕 엘리아 카잔 특별전 2017.5.19금~5.31수 / 6.8목~6.11일


삶은 두 가지 기차 노선이다. 욕망과 죽음. 일찍이 프로이트가 통찰했고, 들뢰즈·가타리가 날카롭게 해부했듯이 죽음과 욕망은 삶을 이끄는 동력으로 주어져 있다. 욕망의 체계가 남성적 형식을 지닌다면, 이 조건 위에 희미하게살아 있으면서도, 욕망이 무화되는 묘지를 경유해서야 겨우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는 여성의 삶은 죽음그 너머에서만 힘겹게 디딤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 원작은 1947년 연극으로 먼저 상영)가 전후 호황을 누리고 있는 미국 사회가 처해 있는 황폐화된 인간의 내면풍경과 젠더적 조건을 보여주는 것은 노동과 이상적 삶 그리고 관계가 서서히 파국으로 내몰려가고 있다는 진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리라. 달리 말해, 욕망과 죽음이 삶의 두 가지 노선으로 이 영화가 채택해야 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탄 다음, 묘지라는 이름의 전차를 갈아타서 여섯 정거장을 더 가면 도착하는 엘리시안 필즈”. 욕망을 타고 묘지를 지나야 당도할 수 있는 곳이 낙원이라니 어쩐지 블랑쉬(비비안 리)의 종착지는 묘지보다 더 깊숙한 어둠의 공간처럼 느껴진다. 사랑을 잃고, 집을 잃고, 직장을 잃고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머물게 된 낡고 누추한 그곳(여동생 스텔라의 집)이 낙원이 아니라는 것을 블랑쉬는 역을 내리자말자 알게 된다. 그래서일까 엘리아 카잔 감독의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 같은 밤(어둠)의 장면이 많다. 물론 블랑쉬가 활동하는 때도 늘 이다.


스탠리에게 있어 낮이 노동의 세계라면 (실제로 스탠리가 노동하는 시간은 환한 오후임을 알 수 있다.) 블랑쉬에게 있어 밤은 시와 마술이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블랑쉬는 언제나 밤에만 움직인다. 블랑쉬가 뉴올리언스에 도착했을 때도 밤이었고, 결혼까지 약속한 미치와도 밤에만 만난다. 그녀는 무엇을 그렇게 숨기고 싶었던 것일까? 밤의 어둠은 그녀의 늙고 추한 얼굴, 추악한 과거까지도 아름답게 꾸밀 수 있게 하는 마력(마술)을 지녔다. 그러나 우리는 밤이 지나면 아침이 밝아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둠 속에 켜진 단 하나의 촛불(또는 전등을 은은하게 비추게 하는 종이등’)은 그녀의 말은 달콤하게 들리게 만들며, 그녀의 육체는 더욱 연약하게 보이게 하는 효과를 자아낸다. 하지만 촛불은 어둠을 밝힐 수 없으며 어둠에 잠식되기 마련이다. 아주 약한 바람에도 곧 꺼지고 마는 게 촛불의 인생이 아니던가. 그녀가 숨기려는 그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의 얼굴의 주름(늙음)과 그녀의 과거는 아주 잠시 동안 숨겨질 수는 있지만 곧 불이 켜지는 즉시 드러나고 말 것들이다.


밤과 낮이 서로 만날 수 없지만 한몸인 것처럼, 블랑쉬의 과거는 아무리 버리려고 애써도 버려지지 않는다. 남편의 죽음은 그녀의 일상을 슬픔으로 만들고,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만났던 남자들과의 소문은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발목을 잡는다. 마지막 빛이었던 미치에게 버림받은 블랑쉬는 온전한 정신으로 버틸 수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그녀는 살기 위해 짙은 향수와 화려한 옷차림으로 자신을 치장하며 현실을 잊으려 한다. 아니, 그녀는 이미 현실을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모든 창문을 닫고 현실과의 이별을 준비한다. 이제 그녀의 불완전했던 정신은 마저도 버틸 수 없게 된다.


밝은 불빛에 있었던 소녀는 사랑했던 남자의 자살 이후 빛바랜 램프처럼빛을 잃는다. 젊음을 잃은 그녀에게 남은 건 가난과 외로움 그리고 과거의 그 시절을 기억하는 것밖에 없었다. 시와 마술의 황홀함을 떠올리는 것, 망각 속에 살면 좋으련만 언제나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그녀는 비루한 현실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현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치명적인 고통과 절망은 그녀의 낮(이성과 노동의 시간)을 영원히 봉인해 버린 것이다. 현실이 고통이라면 차라리 온전치 못한 그 세계에서 영원히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결말이라고, 그녀는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블랑쉬의 정신 상태는 그녀의 문제들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녀의 삶은 언제나 남성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사랑했던 남편은 그녀의 삶 따위 고려하지 않고 자살했으며,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남자는 그녀가 순결하지 않다는 이유로 떠나버리고, 블랑쉬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았던 폭력적인 스탠리는 그녀를 강간하기에 이른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욕망의 불구덩이로 자신의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블랑쉬.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는 순간, 그녀의 생애는 결정된 것이 아니었을까. 다만 이 영화에서 위안을 얻는 부분은 영화의 엔딩이다. 언니의 정신병을 곁에서 지켜보던 스텔라는 자신의 아이와 함께 남편에게서 떠날 결심을 한다. 스탠리의 폭언과 폭력에도 욕정에 못 이겨 쉽게 돌아왔던 그녀를 생각하면 이 결정이 언제 변할지 모를 일이다. 다만, 이번만은 그녀의 뜻이 변하지 않기를 바래볼 뿐이다.

다음글 마지막 침묵 <잔 다르크의 수난>
이전글 엘리아 카잔 특별전 <혁명아 자파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