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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침묵 <잔 다르크의 수난>2017-06-14

 


<잔 다르크의 수난> : 칼 드레이어의 열정

 

김나영 부산영화평론가협회


Review 마지막 침묵 1928년의 기적, 위대한 무성영화의 기억 2017.6.13(화) ~ 7.9(일) The Last Silence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1928년 작 <잔 다르크의 수난>은 유명한 일화를 가지고 있다. 감독 드레이어는 영화 속 주배경인 성채를 지어놓고도 영화 대부분을 인물의 얼굴에 할애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잔 다르크 역할을 맡은 팔코네티는 영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클로즈업을 남겼고, 이 영화는 무성영화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얼굴이 되었다. 비록 필요 이상의 제작비를 투자하여 실험적인 작품을 만든 탓에, 당대 관객들의 외면을 받고 드레이어 본인의 경력에 부침을 가져왔지만 말이다.

 

이보다 조금 덜 알려졌지만, 이 영화와 관련한 제법 중요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드레이어가 <잔 다르크의 수난>을 유성영화로 만들고 싶어 했단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유성영화 기술은 드레이어가 기대하는 바에 현저히 미치지 못했고, 결국 무성영화로 <잔 다르크의 수난>을 제작한 드레이어는 끝내 안타까움을 표했다고 한다. 이 안타까움에 영화 평론가들의 우상인 앙드레 바쟁 역시 동감했다. “이 영화가 유일하게 결여하고 있는 것은 말뿐이며, 실질적으로 말하고 있는 무성영화라고 평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앙드레 바쟁을 스승으로 모시던 평론가이자 누벨바그의 기수 감독으로 칭송 받던 장 뤽 고다르는, 자신의 작품 <비브르 사 비>(1962)에서 <잔 다르크의 수난>의 한 장면을 교묘하게 수정하여 삽입하였다. 고다르는 드레이어의 영화에 사용된 간자막을 삭제하고, 대신 인물의 입 모양에 맞는 보통의 자막을 화면 하단에 입힌 것이다. 마치, ‘소리 없는 유성영화처럼. 어쩌면 드레이어가 꿈꾸었지만 이루지 못했던 바를 구현해보려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고다르가 <비브르 사 비>에서 행한 이와 같은 과감한 재구성은 위대한 감독 드레이어와 그의 위대한 무성영화에 바치는 경의가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다르에게는 다른 목적도 있었던 것 같다. <비브르 사 비>에서 고다르가 택한 재구성은 <잔 다르크의 수난>의 팔코네티가 (화면 하단의 자막으로 제시되는) “죽음이라는 대사를 마친 후, 극장의 어둠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안나 카리나를 클로즈업으로 보여준 다음, “죽음이라는 간자막을 다시 배치한 것이다. 상황을 설명하자면 무성영화에서 간자막과 발화 주체의 연결고리는 유성영화의 그것보다 느슨하며, 관객은 무성영화의 관습에 따라 한 인물 다음에 배치된 간자막을 해당 인물의 발화로 이해할 뿐이다. 무성영화에는 목소리가 없으므로 자막으로 제시되는 말에는 발화 주체가 탈각되어 있다. 무엇보다 유성영화는 (비록 그것이 일종의 허구라 할지라도) 사운드와 이미지의 동기화를 통해 신체와 목소리를 결합하려는 시도로부터 시작된 형식이다. , 고다르가 시퀀스의 마지막에 배치한 죽음이라는 간자막은 인간(팔코네티)의 육체를 통과하지 않은 신의 음성을 현현하는 상상을 야기한다. 신의 음성은 잔 다르크를 전장에 나서도록 만든 그것이며, “죽음은 곧 나나(안나 카리나)에게 드리운 운명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드레이어가 <잔 다르크의 수난>에서 행했던 방식은 고다르가 위 같은 재구성으로 배치했던 간자막의 활용과는 다르다. 드레이어는 바쟁의 견해와 같이, 또한 고다르의 방식으로 수정한다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이미 죽음이라고 말하는 잔 다르크의 입 모양과 거의 동시에 간자막을 배치했던 것이다. 그때, 관객은 마치 인물의 음성이 들리는 것과 같은 착시를 목격한다. 아마 이 착시야말로 드레이어가 <잔 다르크의 수난>을 통해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바일 것이다. 그건 잔 다르크의 육체를 통해 말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 관객들이 신의 음성이 아니라 잔 다르크라는 인간의 말을 그대로 듣는 것이었다.

 

드레이어는 잔 다르크를 신 앞에서 죽음에 초연한 영웅적 인물로 그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감옥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라는 신의 약속이 순교로, 결국 죽음으로 해방될 것이란 역설적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릴 뿐이다. 화형이 두려워 자신의 신념을 배반했던 그녀가 신의 뜻을 따르기로 한 순간, 팔코네티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복잡한 내면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간다. 드레이어는 복종할 수밖에 없는 신적 세계의 거대함 혹은 초월성을 다루기보다, 그 속에서 번뇌하고 사투하는 인간의 열정적인 모습을 담아내고 싶어 했다.

 

드레이어는 자신의 마지막 무성영화 걸작 <잔 다르크의 수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뱀파이어>(1932), <분노의 날>(1943), <오데트>(1954), <게르트루드>(1964)와 같은 유성영화의 걸작들을 만들어냈다. 그는 <잔 다르크의 수난>이 그러했던 것처럼 신적인 세계와 인간의 세속적 영역이 어떻게 부딪히고 조화를 맺는지 지속적으로 탐구했다. 얼핏 잔 다르크가 드레이어의 필모그래피 중 어떤 인물보다 성스러운 영역에 속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가 끊임없이 갈등하고 때때로 나약해지는 인간적 모습을 내비친다는 점에서 본질은 유사하다. 드레이어 세계의 인물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장에 나섰지만 화형을 당하거나, 사랑을 추구하는 마녀이거나, 설명할 수 없는 기적으로 부활하기도 한다. 그 결과는 제 각각이지만, 드레이어의 관심은 결코 들리지 않는 신의 음성의 불명확한 의미보다 그 안에서 조용히 투쟁하는 인간의 열정적인 침묵에 있었다.

 

영화 제목인 에서 "Passion"은 수난과 동시에 열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잔 다르크의 수난>은 성녀가 아닌 인간 잔 다르크의 열정을 클로즈업한 영화 유산인 동시에, (유성영화가 아닌) 무성영화의 원칙 안에서 그 한계를 극복하려 했던 드레이어의 열정의 기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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