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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극장 <커다란 위험>2020-01-06
리뷰 오래된 극장 2019.12.26.(목)~2020.1.26.(일)

 

 

<커다란 위험> : 우정에 관하여

 

이광호(부산영화평론가협회)

   사견으로 시작해보고 싶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소위 누아르나 범죄물, 혹은 갱스터를 비롯한 악인 조직 세계의 인물들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정해진 장르물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다. 특히 이런 영화들이 자주 사용하는 밀정이나 이중간첩, 배신과 암중모략 등의 서사적 소재와 장치가 추가적으로 드러날 적마다, 그 순간 나의 모든 집중력은 곧잘 이야기의 전체적인 판을 이해하는 쪽에 급급해져서 그 이외의 것들을 잘 따라가지 못하는 독해의 빈곤함을 일종의 콤플렉스처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매번 누아르를 메인으로 표방하고 있는 영화를 만날 때마다 얼마간의 긴장을 자연스레 안고 갈 수밖에 없게 되고,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도 상대적으로 영화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말하는 일을 버거워하는 체질상 소화불량의 스타일이 나에게는 누아르와 범죄물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 중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는 분들이 있길 바라며 적어보고 싶다.

   좌우지간 원체 이런 탓인지 비슷한 종류의 영화를 만날 때는 나름의 대비를 하게 되는데, 별로 특이할 것은 없다. 장르 일반에 관한 특징과 주요 소재, 전반적인 플롯을 일독하고 이러한 자장 아래서 영화가 구성되고 전개되는 것이라는 기본적 지식을 습관처럼 일독하고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다. 클로드 소테의 <커다란 위험>(1960)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클로드 소테라는 감독, 갱스터 영화의 명품 배우로 활약해왔다는 리노 벤추라라는 인물, 그리고 포스터와 제목, 시놉시스가 제시하는 전체적인 흐름에서 이 영화는 대충 이런 흐름이겠거니 하고,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분위기를 예상했다는 미약한 확신과 안도감으로 조바심을 다독이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웬걸,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보여주는 것들은 나의 기대와 예상을 완전히 무시한 채 흘러가고 있었다. 누아르 영화의 관습적인 표상들, 가령 빛과 그림자의 표현주의적 대비, 과감한 사각 구도와 편집, 인물의 복잡한 심리를 형상화하는 추상적 연출, 팜므파탈로 인한 파국과 반전의 서사 등은 모조리 부재하거나 어딘가 어그러뜨려지거나 비스듬히 어긋난 채 영화 속 이곳저곳에 흩뿌려져 있었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정말 독특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대다수의 누아르물이 공유하는 지점이 이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주 정의로운 우리의 주인공이 영화 내내 진실을 추적하고 그것을 주재하는 악마를 찾아 나서지만 결국 자신이 그 위험한 타깃이었다는, 일종의 부메랑 서사라고 일컬을 만한 반전 플롯과 자기오인의 모티브가 <커다란 위험>에는 없다. 대신 이 영화는 반대로 한다. 다수의 누아르물이 반전을 위해 기본적으로 내장하는 이 은폐적 성질을 거꾸로 돌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패를 초반에 모두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아벨(리노 벤추라)은 악명 높은 범죄자이지만 사실상 그가 영화 안에서 행하는 범죄행각들은 한 편의 영화를 지탱해 나갈만한 거대하고 심층적인 사건이라기보다, 제시된 그의 전사에 비하면 시시하기 짝이 없는 좀도둑질이나 차량 탈취 정도에 그치고 만다.

   표면적인 모양새도 마찬가지로 낯설다. 영화는 사람이 붐비는 플랫폼에서 출발하는데, 주인공 아벨은 몇 개의 커트를 지나고 나서야 등장한다. 하지만 그 모습은 누아르물에서 흔히 보아온 어둠 속의 고독한 사내가 아니라, 아이와 아내가 있는 한 집안의 가장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심지어 그는 현재 쫓기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도 아니며 심리적인 불안에 휩싸여 있다고 말하기에도 모호한 위치로 제시된다. 이야기가 나아갈수록 영화에서 어둠은 거의 보이지 않고, 범죄행각들은 군중이 많은 대낮의 일상적인 도심에서 이루어진다. 물론 드문드문 밤의 순간이 도래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감독의 어떤 연출적 인장과 개성적 표현을 위해 마련된 것이라기보다 그저 서사의 흐름에 따라 당연하게 놓여있는 듯한 느낌에 가깝다. 카메라는 끊임없이 야외에 머물면서 도심의 풍경과 익명의 군중을 수시로 포착해내며, 긴박한 순간에도 사건의 연루자를 급히 쫓기보다는 불필요해 보이는 일상의 모습에 잠깐씩 머무르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커다란 위험>이라는 영화에서 전달받는 것은 이 영화가 표방하고 있는 누아르, 프리츠 랑과 존 휴스턴과 같은 영화사의 대선배들이 기틀을 다져놓았던 향취가 아니라 사실상 로베르토 로셀리니, 비토리오 데 시카 등으로 익히 들어온 네오리얼리즘의 정조에 더욱 근접해 있는 것 같다. 주인공 아벨은 누아르 장르의 추상적 어둠 속에 갇힌 사내라는 비극적 캐릭터라기보다는, 현실 세계 속 구체적 장소의 까마득한 벽을 마주한 실존적 인간의 형상에 더욱 가까운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또 하나의 인물은 아벨이 청년 에릭(장 폴 벨몽도)의 경호를 받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 릴리안이다. 평범한 가정집에 귀속된 주부가 아니라 여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릴리안은 강고하고 독립적인 성격이며 비교적 진한 화장을 하고 있다는 그 외모 때문에라도 자연스레 팜므 파탈이라는 인물상을 떠올리게끔 한다. 누아르 일반에서 주인공을 유혹해 파국으로 끌고 가는 매혹적 여성인 팜므파탈은 서사의 중핵을 차지하며 이야기 전개에서 빠질 수 없는 하나의 교각을 구축하는 역할 같은 것인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보이는 릴리안은 제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에릭의 도움을 받은 그는 어딘가 수상한 느낌을 받은 듯하지만 앰뷸런스 뒷자리에 탑승하고, 그곳에서 차마 아벨이 숨기지 못한 총을 발견한다. 차량은 곧이어 검문소에 도착하지만 릴리안은 대충 얼버무리고 우물거려서 차량을 통과시킨다. 이상한 일이다. 충분히 아벨과 에릭을 의심할만한 상황이며, 믿음직한 경찰 무리가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릴리안은 거짓말로 상황을 넘겨버린다. 릴리안이 왜 그러한 행동을 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영화가 정확한 단서를 주지 않으니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가장 간단한 추측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녀는 에릭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그에 대한 보답을 한 것이다. 믿음의 가장 순수한, 혹은 순진한 형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릴리안의 다소 비합리적인듯한 이 결정은 아벨을 경호하는 청년 에릭에게서도 비슷하게 발견된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아벨에 대해 한 치의 의심이나 배반의 순간을 보이지 않는 것이 인상적이다. 영화는 단 한순간도 관객으로 하여금 에릭이 혹시 의심할만한 인물은 아닌가 싶은 여지를 주지 않는다. 아벨의 오랜 친구들은 이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며 아벨과 자신의 거리를 떼 놓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보디가드로 고용된 에릭은 한순간의 이탈 없이 꿋꿋하게 아벨의 곁을 지킨다. 물론 그는 파지에에게 돈을 받고 고용된 비즈니스를 행하는 중이라는 서사적 이유가 있긴 하지만, 그를 감안하더라도 결말부 그가 보이는 행동은 너무나 무모할 정도로 과도한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어 의아하기 짝이 없다. 상황은 이렇다. 리퉁에게 정보를 얻은 경찰이 에릭을 포위하고 문 앞에 서 있다. 문 안에는 아벨을 경호하던 와중에 만난 연인 릴리안이 기다리고 있다. 에릭은 문을 반쯤 열고 머뭇거린다. 카메라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 에릭의 얼굴을 포착하고, 에릭은 눈치를 보다가 도망을 쳐 소란을 일으키고 곧장 붙잡힌다. 에릭에게 있어 이 선택은 바보 같은 짓이다. 경찰의 포위망에서 벗어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며, 이 시도로 인해 그는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소란을 일으킨 덕에 상황을 눈치챈 아벨은 무사히 도주에 성공한다.

   이 서사의 연결로 우리는 아벨과 에릭 사이의 우정 내지는 연대의식을 확인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읽기가 아벨과 에릭, 두 사람 사이의 관계의 진전 내지 완료를 바라는 소망으로부터 기인한 일종의 초과적 독해가 아닌가 싶다. 잠시 바람을 내려놓고 냉정하게 점검해보자. 영화는 아벨과 에릭 사이에 어렴풋이 놓인듯한 우정을 증명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에릭이 아벨을, 반대로 아벨이 에릭을 서로 신뢰할만한 상황은 어디에도 없으며 그들이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는 커다란 서사적 사건 또한 등장하지 않는다. 이처럼 서로의 우정을 관통하는 사건이 영화에 등장하지 않기에, 문을 살며시 열고 고민하는 에릭의 클로즈업된 얼굴이 드러나는 찰나의 순간은 우정의 증명이라기보다 모호하고 이해되지 않는 난해한 것에 가깝다. 물론 그것이 전략적으로 의도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야기는 다분히 상식적인 범주 안에서 흘러가고 있으며 앞서 말한 대로 에릭이라는 청년은 완전히 믿음직한 사내다. 그러나 이 영화가 표방하고 있는 누아르적 자태와 분위기는 에릭이라는 인물이 무언가 숨기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사소한 의심을 품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인상 깊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 이유 없는 우정, 혹은 맥락 없는 믿음이라고 부를 만한 행위는 그저 허술한 서사의 구멍이 아니다. 릴리안과 에릭의 행위를 말하기 위해 잠시 조르조 아감벤의 말을 빌려보자. 그에 따르면 우정이란 자신을 낯설게 봄으로써 자신과 타자 사이의 간극을 알아채는 것이며, 어떠한 곁가지도 없이 그저 상대방이라는 존재와 그의 삶이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로 발생할 수 있는 것에 가깝다. 함께 존재하고 함께 느끼는 것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바로 우정이라는 것이다. 영화에서 아벨의 친구들은 궁핍한 생활, 보석 절차의 상황, 아내와의 껄끄러운 관계 등 저마다의 이유를 설명하기 바쁘다. 하지만 진정한 우정이란 그 모든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지키며 타인의 존재를 무한히 믿는 단순한 용기의 실행에 있다. 말하자면 믿음이란 것은 증명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명 없이 존재할 때 더욱 힘을 얻는 존재다. 그것을 실천하는 쪽이 릴리안과 에릭인 것이다.

   나는 이 우정과 믿음에 관련해 릴리안과 아벨의 행위가 얼마간 이 영화의 자기언급적인 제스처는 아닐까 싶다. 영화의 주된 서사는 명백하게 아벨과 그를 믿지 않는 친구들 사이에 놓인 긴장으로 추동되고 이어지지만, 뜬금없이 기입되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릴리안과 에릭이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사랑을 나누는 연애 시퀀스다. 이 일련의 장면은 영화의 전반적인 맥락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에릭이 이 상황에서 아벨과 관련된 비밀이나 단서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기에 그 흔한 서브플롯이라고 말하기에도 어색하다. 그들의 연애 장면은 통으로 들어내도 문제가 없는 훼방꾼이나 불청객에 가깝다. 그럼에도 아벨의 서사를 지연시키면서까지 이 장면이 놓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설명될 수 없고 증명될 수 없다는 우정의 특성은, 나아가 우정이라는 것이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비실체라는 사실로 연장된다. 여기서 우정은 영화와 만난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 현실의 표면을 거짓 없이 담아내는 영화가 눈에 포착되지 않는 우정을 드러낸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지각되지 않는다는 사실, 해설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진솔히 드러내는 것에서 영화와 우정은 비슷한 성질을 공유한다. 영화라는 매체가 어떠한 진리를 설파하거나 그것의 인과를 차근차근히 곱씹거나 풀어낼 수 없고, 오로지 대상에 담긴 움직임과 물성을 현재형의 상태로 활성화시킨다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여기서 우정과 영화는 교집합을 이루는 것이다. 우정과 영화는 어떠한 이유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모종의 현상을 세세하고 충실하게 묘사하려는 실천의 아름다움에 모두 근간을 두고 있다. <커다란 위험>의 미덕은 인과와 결별하면서까지 그것에 치열하게 머무르고자 하는 데 있다. 그러니, 어쩌면 누아르의 사각 앵글과 명암대조법처럼 선명한 것들은 애초부터 이 앞에서 무용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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