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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 크리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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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극장 <남쪽>2020-01-06
리뷰 오래된 극장 2019.12.26.(목)~2020.1.26.(일)

 

 

<남쪽> : 남쪽은 잊어요

 

이상경(부산영화평론가협회)

 

   나는 이 글을 쓰는 게 두렵다. 반대 성의 시각과 차이 나는 연령대의 눈으로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영화를 말할 때 자주 실패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특히 젊은 여성 감독의 영화에서 이런 느낌을 가졌는데 <남쪽>은 남성인 빅토르 에리세 감독(스페인)이 중년에 이르러 만든 영화라는 점을 의지하여 이렇게 글을 쓰고 있긴 하다. 영화는 스페인의 아델라이다 가르시아 모랄레스 작가(역시 여성이다!)가 쓴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영화의 주인공은 에스트레야라는 소녀이다. 감독이나 나나 소녀 시절을 살아 본 적이 없으나 감독이 들어갔음직한 곁길을 따라 나도 뒤밟으면 되지 않을까. 그 곁길은 상상력, 타인의 경험담, (감독이 결혼해서 딸이 있었다면) 실제로 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경험담 등일 것이다. 영화처럼 딸과의 패밀리 로맨스가 어느 순간 깨어진 실패담을 공유하는 아버지들은 이 영화를 대하는 심정이 남다를지 모르겠다.

 

   다른 많은 영화들처럼 영화의 첫 신을 먼저 언급하지 않고 말을 이어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완전한 암전에서 오른쪽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밝아지면 ‘1957년 가을이란 자막이 뜨고 개 짖는 소리가 여러 차례 들리면서 에스트레야의 얼굴이 보인다. 외화면에선 어머니가 아버지 아구스틴을 찾는 다급한 목소리와 쿵쾅거리는 발소리, 전화를 거는 소리가 들리고 방이 더 밝아져 벽에 걸린 그림을 알아볼 수 있을 때쯤 에스트레야가 뭔가를 꺼낸다. 그때 성인인 에스트레야(한 번도 영화에 등장하지 않지만)의 목소리로 그날 해 뜰 무렵 베개 아래서 아빠의 진자를 발견했을 때 난 알 수 있었다, 모든 게 변했다고, 아빠가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걸이라는 내레이션이 나오면서 에스뜨레야는 진자를 눈앞에 늘어뜨리고 눈물을 흘린다. 영화는 적은 대사와 화면과 조응하는 이런 내레이션으로 대부분의 서사를 끌고 간다.

   영화 초반의 이 무거운 신은 서사 전달이라는 측면에서도 의미를 가지지만 감독의 스타일과 의도를 잘 드러낸다. 창문만을 유일한 광원으로 사용하면서 밝아지는 방은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될 대상(침대와 에스트레야)을 우선적으로 밝게 보여주다가 차츰 주변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혹자들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벌집의 정령>(1973)과 이 작품을 묶어서 이 실내장면이 자연광을 쓰고 베르메르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고 하지만 나로서는 완전히 동의하기 어렵다. 이 실내장면은 아침이 밝아지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밝아지는 속도나 부분적 밝아짐에 비추어 보아 철저히 연극적으로 계산된 조명이다. 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여 베르메르(그의 경우 주로 왼쪽 창)를 연상케 하지만 영화는 빛보다 어둠(또는 그림자)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베르메르를 연상케 하는 것은 차라리 야외 촬영이다. 이 신 뒤에 나오는, 강둑으로 둘러싸인, 에스트레야가 사는 도시(실제 스페인의 북부 도시)를 보여주는 설정 숏은 베르메르의 그림 델프트 풍경과 많이 흡사하긴 하다. 이 도시의 설정 숏은 에스트레야가 사는 집의 설정 숏과 함께 에스트레야가 성장하는 시간, 즉 계절, 밤낮을 서사적인 리듬과 동행하면서 효율적으로 사용된다.

 

   패밀리 로맨스의 기원은 에스트레야가 태어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시 어둠 속에서 부분적으로 밝아지는 연극적 화면이다. 아버지는 임신한 어머니를 보고 자신의 진자를 사용하면서 딸이 확실하니 이름은 에스트레야로 할 거라고 했다는 말을 에스트레야가 뒤에 들었고 이것이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줬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단서를 덧붙이는데, 사실은 내가 만들어낸(yo inventè)” 이미지라고 어른인 에스트레야의 내레이션은 전한다. 인물의 발화를 줄이고 보이스오버(이것도 발화긴 하지만)를 중심으로 구성하는 영화적 전략에 이제 내레이션도 완전히 믿을 만한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서사적 매력은 아이의 눈으로 구성된 세계와 그 관계의 실재성 여부 혹은 존재의 모호함이다. 원래는 3시간의 상영시간으로 제작할 계획이었으나 제작 여건상 프로듀서에 의해 현재의 90분으로 줄였는데 전체적으로 압축된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하는 후반이 완전히 잘린 형국이 되었다. 그 결과 오히려 인물 캐릭터가 더 흐릿해지면서 초기 서사가 추구하던 신비화와 모호함이 맞아 떨어짐으로써 영화의 완결성이 별로 훼손되지 않게 된 아이러니한 결과가 생겼는데 아쉬워하는 사람도 없진 않을 것이다.

 

   다시 영화 텍스트로 돌아가, 아버지의 강력함이 더 어필되고 소녀 에스트레야를 더 유혹하면서 스타일을 강하게 표현하는 신에 대해 말해 보자. 의사이면서 수맥전문가인 아버지가 에스트레야에게 수맥 탐사 수단인 진자 사용법을 가르쳐 주는 장면이다. 깜깜한 가운데 왼쪽 창(베르메르처럼)을 광원으로 시작하여 주로 아버지와 에스트레야만 보이는 방에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다. 에스트레야가 걷다가 아버지 뒤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가 다시 앞으로 걸으며 손부터 나타나자 진자가 움직이고 다시 어두워지는 방 안의 신이다. 이 부분은 첫 번째 신보다 더욱, 빛을 표현하는 베르메르보다 어둠을 표현하는 렘브란트나 벨라스케스를 연상케 한다. 이런 전승 과정을 통해 에스트레야의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더욱 깊어진다.

   왜 어둠인가? 아버지는 할아버지와의 불화 그와 연관된, 스페인 내전에서 상반된 정치적 견해로 남쪽(세비야)을 떠나 현재 에스트레야와 살고 있는 북쪽에 정착하였다. 에스트레야에겐 춥고 어두운 곳이며 눈 오는 북쪽과 달리 상상 속의 남쪽은 야자수가 있는 빛의 장소이다. 첫 번째 신에 나오듯 배경인 1957년은 아직 스페인이 프랑코 치하에 있는 때이며 영화는 앞서 언급한 대로 북쪽에서 멈춰 서버렸다. 손에 별 모양의 반지를 끼고 다니는 에스트레야의 이름인 별(estrella)은 빛의 흔적이고 빛에 대한 지향이지만 어둠 속에서 등장한다. 그러니 영화는 스타일적으로 빛보다는 어둠에 할애될 수밖에 없고 베르메르를 모셔올 수가 없다.

   아버지를 사모하는 에스트레야가 아버지와 관련된 비밀을 알게 되면서 그들의 로맨스는 종지부를 찍는다. 아버지는 남쪽 출신으로 짐작되는 여자와 사랑을 했고 헤어진 이후에도 그리워해서 배우인 그녀가 나오는 <그림자 속의 꽃>이란 영화를 보러 간다. 의혹 속에 아버지의 메모 속에서 발견한 이름 이레네 리오스를 찾으러 그 극장을 찾는데 한 번은 히치콕의 <의혹의 그림자>(1943)가 상영되고 있다. 그림자(sombra)란 제목을 공유하면서 여자 아이가 자신의 삼촌을 의심하는 영화의 포스터를 슬쩍 보여주는 감독의 재치가 빛난다. 말했듯 그림자도 어둠의 자식이다. 그러므로 북쪽에 속한다.

   에스트레야가 아버지의 연인에 대해 아는 바를 다 알리고 그에 대한 아버지의 상세한 해명이 에스트레야에 의해 거부된 어느 날 아버지는 자살을 선택한다. 그는 왜 자살했을까? 연인으로부터 사랑이 거절당해서, 딸이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 딸이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되어, 우울증 때문에? 모두가 답일 수 있지만 어느 것도 답이 아닐 수 있다. 어느 것도 답이 아닌 한 이유는 모든 것이 에스트레야의 상상 속의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인 에스트레야는 자주 나는 그때 그렇게 생각했다는 취지의 내레이션을 삽입했다. 그 말이 범인일 수 있다.

 

   <남쪽>과 관련된 미완성의 비밀을 알게 되고 모르는 게 나을 뻔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답지가 없는, 현재의 문제만 있는 영화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캐릭터와 서사는 안착하지 못하고 언어로 된 것들은 부유하고 비산한다. 베르메르도 렘브란트도 이젠 모르겠다. 나무에 걸린 그네, 눈이 온 연못 안의 얼어붙은 배 모형, 앞에 언급한 설정 숏들, 방향을 표시하는 갈매기 구조물과 그 아래의 고드름들은 북쪽이든 남쪽이든 형형하게 자기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이다. 애초에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감독에게 남쪽의 일을 되묻는 것은 실례가  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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