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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 그 모든 용서와 찬사가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2023-08-24
<오펜하이머> 스틸사진

 

 

 

<오펜하이머>, 그 모든 용서와 찬사가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강선형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화가 늘 현실을 꿈꾸듯이 이론은 늘 실천을 꿈꾼다. 학자들 가운데 자신의 일생을 바쳐 일군 학문이 눈앞에 재현되는 일을 꿈꾸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역작 <오펜하이머>에서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가 마주하는 트리니티 실험의 성공은 그 자신에게는 그처럼 아름다운 광채를 지닌 꿈의 실현이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죽음이자 세상의 파괴자’, 오펜하이머는 그가 이 세계에 불러올 죽음들과 연쇄반응들에 대해서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을까? 나치보다 빨리 원자폭탄을 만들어야 한다는 대의가 히틀러의 죽음으로 소멸된 뒤에도 실험을 계속했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를 결정하는 자리에도 있었던 그가? 그리고 핵분열의 연쇄반응이 계속되어 세계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이 단지 제로에 가까운정도가 아니라 제로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아인슈타인(톰 콘티)을 찾아갔던 그가? 그럼에도 꿈꾸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론은 늘 실천을 꿈꾼다. 오펜하이머에게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 내야만 했던 이론의 증명이자 삶의 증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도 그러하듯이 삶 속에서 이루어진 선택의 결과들은 늘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가혹하다.


오펜하이머 스틸사진


크리스토퍼 놀란은 오펜하이머 일인칭 시점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세계 속에서 학자 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정치적 삶이 되고, 수난자의 삶이 되고, 또 학살자의 삶이 되는지 그린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원자폭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 그리고 윤리적인 딜레마 같은 것들은 모두 부차적인 것들이다. 정작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한 해리 S. 트루먼(게리 올드만)은 원자폭탄의 위력을 확인하고 위험성을 우려하는 오펜하이머에게 징징댄다고 말하지 않는가? 세계의 정의, 세계의 윤리와 같은 것들은 부차적이다.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은 사람들의 환호와 발 구름 속에서 원자폭탄에 희생된 검은 유해를 느끼는 오펜하이머 개인의 고뇌이다.


오펜하이머 스틸사진


자신이 일생을 바친 이론이 물화 되어 세계를 뒤바꿀 때, 그리고 그 자신은 더 이상 그것을 막을 수도, 파괴할 수도 없을 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현실화의 꿈을 이룬 이론을 그 자신이 할 수 없다면 모두가 함께 통제할 수 있기를 호소하거나, 연쇄반응을 최대한 지연시키거나, 그럼에도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면 용서와 구원을 바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오펜하이머에게 말한다.

 

이제 자네가 그 성취의 결과들을 감당할 차례라네. 사람들은 충분히 벌을 주고는 언젠가 자네를 불러 연어를 주고 감자샐러드를 주면서 자네를 위한 연설을 하고 상을 수여할 걸세. 그들은 자네 등을 토닥이며 이제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고 말할 것이네. 그러나 그건 자네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게. 그건 그들을 위한 것일 뿐이네.”

 

오랜 세월 그토록 애써왔던 용서와 찬사의 자리에 자신은 없고, 끝없던 고뇌도 퇴색되어 버린 뒤에, 오직 세계에 남은 결과들만 추앙되는 일, 아인슈타인은 그것을 오펜하이머에게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그를 낙담시키거나 절망에 차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헛된 기대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뜻이다. 그가 그랬듯이 말이다. 아인슈타인은 오펜하이머와 다른 학자들이 버클리에서 자신에게 상을 수여하던 일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한다. 그들은 아인슈타인이 그 자신이 시작한 이론을 이해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속으로 비판하면서 상을 수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상은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그들을 위한 것이었던 셈이다. 아인슈타인은 학자로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고통, 자신의 이론이 세계를 뒤바꾸고 더 이상 자기 손에 남아 있지 않을 때의 고통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며 조언을 건네는 것이다.


오펜하이머 스틸사진


오펜하이머는 정말로 그런 고통 속에 있었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계획하에 원자력위원회(AEC)의 보안 인가 처분 권고 위원회가 열렸을 때, 그는 사적 삶부터 공적 삶까지 모두 심판받아야 했다. 키티 오펜하이머(에밀리 블런트)는 그가 원자폭탄을 만든 자신을 벌하기 위해 스스로 혹독한 경험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스트로스에 맞서지 않고 의혹으로만 가득 찬 청문회를 견뎠음에도 결국은 보안 인가를 잃었을 때 그녀는 오펜하이머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당신을 괴롭히게 내버려 둔다고 해서 세상이 당신을 용서할 것 같아? 그들은 그러지 않을 거야.” 아인슈타인은 오펜하이머가 자기 내면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심판대 위에 올려둘 것을, 그리고 타인들의 용서를 끝도 없이 기다릴 것을 예감한 것처럼 말했던 것이다.

이러한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의 대화는 허구이지만 실제로도 두 사람은 비슷한 대화를 나눈 바 있다고 한다. 영화의 원작이 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작가 카이 버드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오펜하이머에게 마녀사냥을 당할 의무 같은 건 없고, 조국을 잘 섬겼음에도 보상이 이러한 청문회라면 조국을 등져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이 독일에서 겪었던 일을 오펜하이머가 반복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매카시즘의 광풍은 그가 독일에서 겪었던 것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영화에서처럼 이를 거부했다. 아마도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당위라고 해도 그것을 지키는 일은 자신이 불러온 모든 결과들을 짊어짐으로써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펜하이머>에서 오펜하이머의 보안 인가 처분 권고 위원회와 스트로스의 상무부 장관 임명 청문회를 교차시키는 것은 단지 오펜하이머의 명예를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교차되는 것은 오펜하이머의 태도와 스트로스의 태도다. 스트로스에게는 오직 이기고 지는 문제가 오펜하이머에게는 자신의 이론과 삶 모두를 심판대 위에 올리는 일이었던 것이다. 모든 결과들,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결과의 결과들까지도 그는 자기 삶과 떼어놓지 않았다.


오펜하이머 스틸사진


누구에게나 심판대 위에 올라 단지 이기고 지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하는 순간이 있다. 지고 나서 사람들이 보내는 비난뿐만 아니라, 이기고 나서 사람들이 보내는 환호도 실은 자신의 삶을 지켜주지는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의 삶을 견디고 그 모든 선택과 결과들에 책임질 수 있는 건 그 자신뿐이다. 아인슈타인뿐만 아니라 세계를 바꾼 학자들, 코페르니쿠스, 뉴턴, 다윈, 루소, 마르크스 등등은 모두 자신의 이론이 세계를 뒤바꿔 놓고 끝도 없는 연쇄 반응들을 일으킬 것을 알았겠는가? 그리고 그 연쇄 반응들은 때로는 세상을 올바르게, 때로는 전쟁과 폭력으로 뒤덮이게 만든다.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실체를 알기 전에는. 그리고 알지 못한다, 사용해 보기 전까지는.” 그러나 이론은 늘 실천을 꿈꾸고, 모두는 겸허히 책임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단지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이론과 자신의 삶을 지키는 위대한 삶의 방식이다. 그래서 <오펜하이머>는 위대한 발명품이 아니라 위대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모든 용서와 찬사를 뒤로 하고 자신의 삶을 짊어진 위대한 사람의 이야기. 그것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한 사람의 위대한 삶은 그렇게 영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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