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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영화가 있는 곳, <애스터로이드 시티>2023-07-10
애스터로이드 시티 스틸

 

 

 

모든 영화가 있는 곳, <애스터로이드 시티>

 

강선형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아내를 잃고 차마 그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하지 못한 채로 떠나는 여행길, 우연히 표류하게 된 길에서 만난 운명적인 사랑, 엄마를 잃은 아이들과 함께 호호막막한 곳에 엄마를 묻고 떠나야 하는 할아버지의 여정, 어른들보다 똑똑한 아이들의 모험, 어느 날 지구에 불시착한 UFO, 카우보이, 원자폭탄, 카체이싱, 이 모든 것들이 한 영화, 한 도시 안에 있다. <애스터로이드 시티> 이야기이다. 드라마, SF, 서부극, 로맨틱 코미디, 뮤지컬 코미디, 블랙 코미디, 성장영화, 전쟁영화, 범죄영화, 게다가 막에서 막으로 넘어가는 연극과, 영화의 안과 밖을 가로지르는 작가와 배우들까지,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영화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있는 곳이다. 모든 것이 ‘앤더슨화’ 되어서 말이다. 웨스 앤더슨이 만드는 SF라면 이런 모습일까, 웨스 앤더슨이 만드는 서부극은 이런 모습일까, 그 모든 상상이 다 이 영화에 있다.


애스터로이드 시티 스틸사진


 영화를 이루는 모든 것이 다 앤더슨화 되는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그래서 작년에 타계한 고다르의 1961년 영화 <여자는 여자다>를 떠올리게 한다. <여자는 여자다>에서도 영화를 이루는 모든 것이 고다르화 되었었다. 고다르는 다른 영화에서도 만화나 소설, 연극, 춤 등을 영화 안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였지만, <여자는 여자다>에서는 특히 뮤지컬 코미디를 끌어들이면서 뮤지컬 코미디 장르의 일반화된 기법들과 클리셰들을 뒤집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노래와 춤을 주인공의 심리 전개와 연결하는 기법들, 예컨대 일상의 소음들을 리듬으로 만들고 일상의 조명들을 무대 조명처럼 만드는 등의 기법들을 고다르는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뒤집는다. 인물들이 노래하거나 대화할 때 더욱 커지는 무의미한 도시 소음이나. 방 안에서 조명 스탠드를 들고 돌아다니는 인물들의 모습이 좋은 예이다. 고다르적인 방식은 뮤지컬 코미디에서 인물의 심리를 더 잘 전달하기 위해 도입되는 노래와 춤처럼, 하나의 영화에서 여러 장르가 조화를 이루는 방식이 아니라 반대로 불협화음을 이루게 만드는 방식이며, 그로부터 우리를 영화의 인물들에게 몰입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로부터 떨어지게 만드는 방식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여자는 여자다>를 더욱 영화를 고다르적으로 만든다. 이렇게 자신의 영화 안에 부조화를 도입하는 고다르의 방식에 대해 철학자 들뢰즈는 영화가 영화 아닌 것이 되는 방식, 즉 영화가 타자화되는 방식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영화는 ‘영화적인 것’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다른 장르들과 함께 공존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낯선 타자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왜 중요한가? ‘영화적인 것’ 또는 ‘영화다운 것’이라는 방식으로 유사한 형식과 내용을 반복하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럴 때만 영화는 늘 새로운 것이 되고, 영화와 더불어 세계도 새로운 것이 될 기회를 얻는다.


애스터로이드 시티 스틸사진


 <애스터로이드 시티> 역시 그런 고민과 힘을 모두 가진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영화화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끌어들여 ‘영화라는 건 무엇일까’ 질문하는 웨스 앤더슨이라는 영화인을 마주한다. 영화는 인물의 심리나 여정으로 환원되지도 않고, 한 장르로 환원되지도 않고, 원자폭탄의 이미지가 히로시마와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것처럼 하나의 메시지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영화는 연극과도 다르며, 무언가 영화와 닮은 것이 있다면 오직 삶 그 자체일 것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그래서 영화를 묻고, 인생에 답하는 놀라운 영화가 된다. 가장 처음부터 어기 스틴백(제이슨 슈워츠먼)을 애스터로이드 시티로 이끈 자동차 고장에 대한 비유는 영화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우리 삶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자동차는 아주 작은 부품 하나를 간단히 교체하면 되거나 완전히 고장이 나서 고칠 수 없는 상태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영화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하나의 장면만 교체되면 되거나 완전히 길을 잃어서 어떤 의미로든 망해버리고 마는 것처럼, 인생도 그렇다. 그 인간만 내 옆에 없다면, 그 사건만 내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등등 내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한 사람, 내 인생을 고통에 빠트리는 한 사건에 대해 우리가 늘 생각하듯이 말이다. 또는 반대로 ‘이번 생은 망했다’는 것도 하나의 거대한 원인이 될 것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 스틸사진


 그런데 어기 스틴백의 차의 고장에는 세 번째 원인이 있다. 원인 모를 폭발이 일어나게 한 원인 말이다. 그러니까 어기의 차처럼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이 우연적이고 불가항력적인 무언가가 우리의 인생을, 또 영화를 송두리째 뒤흔들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침공’하여 무려 ‘운석’을 훔쳐 갔다가 조용히 쑥스럽게 되돌려주고 가는 외계인처럼, 어느 날 갑작스럽게 떠나버린 아내처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일삼는 자식들처럼, 갑자기 쾅 하고 폭발하듯이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말이다. ‘도무지 모르겠는’ 영화 속 극의 전개처럼, 우리의 삶도 도무지 모르겠는 일들이 일어나고, 우리는 오직 삶의 아주 작은 구석에서 어쩌면 있을지도 모를 삶의 의미를 찾아내거나, 망연자실하여 손 놓은 채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 총체적으로 망가진 자동차처럼 말이다. 우리에겐 아마도 두 선택지밖에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세 번째 원인인 우연성은 우리에게 그 의미를 드러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우연성은 죽음처럼 결코 우리에게 의미를 알려주지 않고, 그렇다고 우리 옆을 떠나지도 않는다.


애스터로이드 시티 스틸사진


 첫 번째 고장의 경우처럼 너무 작아서 아무것도 아닌 부품만 갈아 끼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대체로 우리의 삶은 총체적으로 문제가 발생하는 두 번째 경우나 원인 모를 절대적 우연성이 송두리째 불태워 버리는 세 번째 경우처럼 불가역적이다. 인생은 시한폭탄처럼 불행과 슬픔과 죽음을 데리고 다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류하듯 정체하듯 도착한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그래도 삶은 견뎌낼 만한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어깨를 토닥인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드러나듯이 불필요해서 덜어내어진 장면이 극 전체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 삶에도 분명 그런 것이 있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두 번째나 세 번째 경우라고 생각했던 고장이 아주 작은 부품이라고 생각해서 버려버린 것, 놓쳐버린 것 때문이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처럼 조화를 위해 이것저것 내버린 뒤가 아니라 부조화를 이루고서는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때 삶도 의미 있을 수 있는 것 아닐까? 늘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는 우리의 삶처럼 영화도 그렇게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는 채로, 그리고 모를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의미 있다. <애스터로이드 시티>가 바로 그렇다. 그러니까 삶이든 영화든 의미는 파악할 수 있고, 쟁취할 수 있고, 과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늘 봉인되어 있고, 감추어져 있고, 언젠가 펼쳐질 상태로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장담컨대 너무 진부해서 우리는 의미를 찾으려고 시도하지도 않을 것이다. 영화처럼 인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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