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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땅 - 기억에 사로잡힌 평지의 산책자들2024-01-24
영화 <이어지는 땅> 스틸컷 이미지



이어지는 땅 – 기억에 사로잡힌 평지의 산책자들



박예지 2022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호림(정회린)과 이원(공민정)은 과거에 사귀었던 남자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 호림은 몇 년 전에 런던으로 떠난 전 남자친구와의 재회를 기대하며 런던으로 유학을 왔고, 밀라노에 사는 이원은 죽은 전 남자친구의 기억에 아직도 힘들어하고 있다. 호림은 이원의 전 애인의 기억을 통해 이원을 처음으로 보게 된다. 런던공원에서 누군가 놓고 간 가방 속 캠코더를 우연히 발견한 호림은, 그 안에서 이원의 전 애인이 찍은 그녀의 모습을 본다. 그 뒤 호림은 자신의 전 애인인 동환(감동환)을 쫓아 그의 집에 갔다가 동환과 그의 새 애인 경서(김서경)의 친구인 이원을 직접 마주하게 된다.


영화 <이어지는 땅> 스틸컷 이미지2

 

 조희영 감독의 영화엔 항상 전 애인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여자가 나오고, 비슷한 방식으로 전 애인에게 미련을 갖고 있는 또 다른 여자가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거나(<주인들>) 그 여자의 전 애인을 사귀었던 여자가 나온다(<두 개의 물과 한 개의 라이터><이어지는 땅>), 우연히 발견한 물건이 중요한 오브제로 등장하며, 그 오브제를 중심으로 기억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개된다(<주인들><기억 아래로의 기억><이어지는 땅>).

 <이어지는 땅>은 지금까지 조희영 감독이 만든 단편들의 주요 주제와 인물들이 반복되면서 변주된다. 한 남자와 사귀었던 두 여자와, 전 남자친구의 기억에 사로잡힌 두 여자, 그리고 그들에게 기억과 관련한 오브제를 남기는 남자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자기 땅을 떠나 타지에 와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여자들은 이전에 살았거나 이전에 사귀었던 사람, 지금 살고 있는 곳에 대한 미련과 애착에 사로잡혀 있다.

 호림은 이미 몇 년 전에 자신과 헤어져 새 애인과 2년 동안 사귀고 있는 전 남자친구 동환에게 아직도 미련을 갖고 있으며, 경서는 가까스로 적응한 런던을 떠나 베를린으로 또다시 이주해야 하는 상황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 이원은 전 남자친구의 기억으로 힘들어하는 동시에 조경사로서 식물을 그들이 익숙한 토양이 아닌 흙에서 기르는 것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원은 거래처에 전화하면서 식물을 먼저 정해야 흙을 고를 수 있다고 강조해서 말한다. 자기 토양도 아닌 데서 자라면 어떻게 변할지 걱정이 된다는 것이다. 


영화 <이어지는 땅> 스틸컷 이미지3


 하지만 밀라노의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남자 화진(류세일)과 길을 걸으며 이원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이전에 같은 종의 식물을 갖고 같은 형태로 조경하고 다른 나라에서 기르는 작업을 한 적이 있는데, 실은 별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두 식물은 각자 나름대로 잘 적응해서 본래 성질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기르는 토양과 사람이 다르면 전혀 다르게 자랄 줄 알고 한 실험이었는데, 사실 환경보다 중요한 건 그 두 식물이 같은 종이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버린 것이다. 

 식물과 토양의 일화는 전 애인과 물리적으로 멀어져도 여전히 그들에 대한 기억을 생생히 가진 채 아파하고, 고국을 떠나 타지에 왔어도 이전의 기억들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들을 떠올리게 한다. 땅은 수평으로 이어져있다, 이들은 끊임없이 길을 걷지만, 모든 땅이 이어져 있기 때문에 자신이 떠나온 곳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여전히 자기 자신의 기억과 자아 속에 갇혀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땅>은 마지막에서 기존의 단편에서는 보지 못했던 어떤 비약적인 순간에 도달한다. 하룻밤의 데이트를 했지만 아직 연락처를 주고받기도 전인 화진과 이원이 엇갈려 그가 벤치에 남기고 간 책만을 갖고 자리를 떠나게 된 이후, 영화에서 처음으로 과감한 부감샷이 등장한다. 자신의 집 마당에서 이원은 한낮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끊임없이 수평을 응시했던 카메라가 높은 곳에서 수직으로 인물을 내려다볼 때의 생경함. 이후 영화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원이 화진과 다시 만나 손을 잡고 함께 산을 오르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리고 오른 산에서 이원은 함께 산에 오른 화진을 등진 채로 위에서 아래로 힘차게 떨어져 내리는 폭포를 오랫동안 응시한다. 수평에서 수직으로. 이후 집 소파에 누워 잠든 이원의 모습이 비친다. 마지막 씬은 이원의 집 앞 장면이다.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엘리베이터에는 이원이 아니라 집주인이 타고 있다. 집주인은 살짝 열려있는 이원의 집 문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고 난 뒤 문을 열쇠로 잠근 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진다. 이원은 문을 열고 잠든 걸까 아니면 이미 그곳을 떠난 걸까? 땅 사이를 가르고 거칠게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처럼, 무언가 이원이 머물던 땅을 갈라놓은 걸까? 지난 단편들의 주제를 뛰어넘는 도약을 보여준 조희영 감독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영화 <이어지는 땅> 스틸컷 이미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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