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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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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유다의 의심2024-01-24

. 윤리적인 반전 영화는 가능한가

 

프랑스의 전설적인 평론가이자 영화감독, 프랑수와 트뤼포는 진정한 반전 영화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전쟁이 스크린에서 재생되는 순간 전쟁은 신성시되고, 반전의 메시지는 소실되기 때문이다. 전투에 임하는 주인공을 떠올려 보라.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도입부인 노르망디 상륙 작전 장면에서 밀러 대위는 조국과 세계평화를 위해 빗발치는 총탄과 포격을 무릅쓴다. 이런 장면에서 어찌 주인공에게 이입하지 않을 수 있으며, 밀러 대위가 적군을 격퇴하기를 염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군의 승리, 주인공의 생존을 위해 적군의 패배와 죽음을 바라게 만드는 순간 반전 영화는 프로파간다로 전락한다. 전쟁이 감상의 대상으로 다가올 때 그것이 본래 지니고 있던 무게와 의미는 사라진다.

 

 

트뤼포의 주장에 반박이라도 하려는 듯 크리스토퍼 놀란은 <덩케르크><오펜하이머> 두 편의 영화로 윤리적인 반전 영화가 가능함을 증명하려는 야심을 선보인다. 우선 세계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덩케르크>(2017)의 화면에서는 나치 독일군이 완전히 제거된다. 이로써 전쟁은 적과 동지의 대립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닥친 거대한 재난처럼 연출된다. 6년 후 개봉한 <오펜하이머> 역시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나 놀란은 보다 급진적으로, 전쟁을 직접적으로 재현하는 모든 요소를 스크린에서 제거한다. 대신에 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이자 반핵 운동의 선두에 섰던 오펜하이머 박사의 삶을 통해 전쟁의 근본적 원인과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는 오펜하이머의 입을 빌려 국가 간의 불신과 군비경쟁이 낳는 죄수의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신뢰해야 함을 주장한다.

 

 

 

놀란은 관객에게 이러한 반전의 윤리를 설득하기 위해 오펜하이머 박사의 삶을 분석적으로 제시한다. 오펜하이머는 일견 모순으로 가득 차 보이는 인물이다. 그는 학창 시절 그리고 학계에서는 소극적이고 조용한 인물이었으나 원자폭탄 프로젝트에서는 돌연 수만 명을 통솔하는 카리스마를 보였다. 또한 전쟁 전 그는 공산주의자들과 어울리며 정부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지만 전시에는 투철한 애국심으로 무장해 정부의 군사기술 발전에 최선을 다했다. 이 모든 모순들 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가 원자폭탄을 탄생시킨 장본인임에도 반전, 반핵 운동에 남은 일생을 바쳤다는 것이다. 놀란은 이런 모순적 행보들을 오펜하이머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라고 변호한다. 놀란의 영화 속 오펜하이머, 그리고 그의 선택은 항상 옳다.

 

 

 

. 오펜하이머, 미국의 프로메테우스이자 예수

 

영화에서 놀란은 시종일관 오펜하이머를 비범한 통찰을 지닌 현자임에도 무고하게 고통받는 희생자로 그린다. 오펜하이머는 신들로부터 훔친 불을 인간에게 준 대가로 영원토록 고통받는 프로메테우스에 빗대어진다. 영화의 원저 격인 오펜하이머 평전의 제목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인 만큼 프로메테우스에게 가해진 부당한 핍박과 오펜하이머의 정치적 수난을 연결하려는 시도 자체는 새롭지 않다. 대신에 놀란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과 달리 불에 접근할 수 있었던 신적 존재라는 점과 오펜하이머의 천재성을 적극적으로 연결한다. 영화가 시작하고 스크린에 가장 처음 재생되는 것은 떨어지는 빗방울, 물웅덩이에 생긴 파동이다. 이어서 우리는 파동을 응시하는 오펜하이머의 눈, 그의 시선과 만나게 된다. 오펜하이머는 파동이라는 현상을 넘어 핵 전쟁의 잔상을 떠올린다. 물웅덩이에서 자연 그 이상의 것을 본다는 점에서 오펜하이머는 화면 바깥의 관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우월한 시각을 가진 자다. 놀란은 오펜하이머라는 천재로부터 그 외의 인물, 그리고 관객을 철저히 구분지음으로써 오펜하이머의 우월한흡사 신적인통찰을 되풀이하여 제시한다.

 

 

 

놀란은 오펜하이머의 통찰을 시청각적으로 구현함으로써 관객에게 그의 우월성을 납득시킨다. 오펜하이머는 독일 유학 시절을 회상하며 그 시절의 자신은 숨겨진 우주의 비전(visions of a hidden universe)으로 인해 괴로워했다고 고백한다. 이때, 그의 음성에 맞추어 화면에서는 세계를 이루는 미시적 입자의 세계가 재생된다. 놀란은 오펜하이머의 신적인 통찰을 시각화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영화 전반에 걸친 웅장한 선율마저도 오펜하이머가 인식하는 세계를 관객이 경험하는 것으로 여기게끔 만든다. 오펜하이머에게 수학은 곧 음악과도 같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는 한때 수학에 자신이 없었던 학생이었다. 이에 오펜하이머의 스승인 닐스 보어는 수학은 악보와도 같으며 중요한 건 악보를 읽는 게 아니라 듣는 것이라고 말한다. 보어가 음악을 들을 수 있냐 묻자 오펜하이머는 나는 들을 수 있다고 대답한다.

한편 놀란은 오펜하이머의 지적인 우월성과 더불어 불륜이라는 도덕적인 결함 또한 주요 소재로 다루고 있다. 이 때문에 혹자는 오펜하이머의 불륜이 영화의 주요 소재임을 감안했을 때 그의 지적 우월성이 반드시 도덕적, 영웅적 우월성으로 해석될 이유는 없다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발칙하게도 놀란은 불륜이라는 도덕적으로 결함마저도 순교자 오펜하이머가 수난을 감내하게끔 만드는 동인으로 미화한다. 우울증을 앓고 있던 불륜 상대 진 태틀록은 원자폭탄 프로젝트로 인해 오펜하이머가 그녀를 오랫동안 만나주지 않자 자살한다. 오펜하이머는 불륜상대의 자살에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이 죄책감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에 대한 죄책감과 함께 그가 말년에 정치적 수난을 묵묵히 감내하는 이유로 기능한다. 화룡점정으로 놀란은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의 부인이 진과 오펜하이머가 성관계를 맺는 환상을 보게 함으로써 오펜하이머에게 엄청난 수치를 안겨준다. 이로써 관객은 오펜하이머가 겪어야 하는 수모를 동정하게 되고,‘오펜하이머는 차고 넘치는 죄값을 치뤘다라고 간주하며 그를 용서한다. 즉 오펜하이머는 단지 죄에 대해 모멸적인 대가를 치뤘다는 이유만으로 순교자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오펜하이머는 프로메테우스와 예수의 얼굴을 동시에 가지게 된다.

 

 

놀란은 오펜하이머로부터 원폭 개발에 대한 책임 역시 면제해준다. 오펜하이머와의 성관계 중 진은 갑작스레 오펜하이머의 책장을 보며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을 논하더니 그에게 산스크리트 경전의 한 페이지를 읽으라고 요구한다. 성관계 중 정신분석을 논하는 것도, 하필 펼쳐진 페이지에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라는 비슈누의 유명 구절이 실려있는 것도 모두 우스울 정도로 작위적이다. 그러나 놀란은 이 작위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죽음의 이미지와 성의 이미지를 병치시킨다. 이로써 그는 죽음 충동인 타나토스와 성과 생의 충동인 에로스가 연결된다는 고전적 도식과 함께 세상의 파괴자는 곧 보존의 신인 비슈누기도 하다는 메시지를 관객에게 주입한다. 그리고 이 산스크리트 경구가 핵 폭발을 처음으로 목격하는 오펜하이머의 입에서 재등장할 때 관객은 눈앞에서는 원폭이 터지고 있을지언정 오펜하이머는 적에게 죽음을 안기려는 의도 이면에 세계 평화에 대한 열망이라는 선의를 품고 있다고 믿게 된다. 이후의 씬에서도 전후에 원폭으로 얻은 유명세를 즐기는 오펜하이머의 모습과 원폭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 그의 모습이 병치되며, 오펜하이머의 희열이 그의 진심은 아니었다는 놀란의 메시지는 반복된다.

 

 

. 목소리를 잃은 유다의 이야기

오펜하이머에 대한 놀란의 호의는 오펜하이머의 정적인 스트로스의 시점을 흑백처리한 화면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더욱 부각된다. 스트로스는 오펜하이머처럼 현상 너머의 것을 보기는커녕 현상조차도 흑백으로 본다는 점에서 화면 바깥의 관객보다도 모자란 통찰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오펜하이머에 대한 스트로스의 적의조차도 오펜하이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오해한 데서 기인하고 있다. 요컨대 스트로스는 현상을 보고 듣는 능력이 오펜하이머에 비해 한참 미천한, 오펜하이머의 안티테제다. 하지만 스트로스가 오펜하이머에 대해 제기하는 의문은 단지 천재에 대한 범인의 열등감으로 치부되기에는 꽤나 그럴 듯하다.

 

 

 

스트로스는 소련의 원폭 개발에 분노하며 수소폭탄 개발을 지지하는 인물이다. ‘원자폭탄의 아버지인 오펜하이머가 수소폭탄의 개발을 맹렬히 반대하자 스트로스는 오펜하이머가 새로운 수소폭탄의 아버지에게 유명세를 빼앗기는 것을 꺼리거나 그가 원자폭탄 개발의 명예는 원했으나 히로시마 폭발의 책임은 지기 싫은 개인적인 감정으로 움직인다고 의심한다. 군사적 우위가 부재할 때 국가가 위기에 놓일 수 있다는 생각은 파멸적 군비경쟁의 가능성과는 별개로 일견 합리적 측면이 있으며, 오펜하이머의 이중적 면모에 대한 스트로스의 의심에도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놀란은 이러한 비판과 의문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대신 이를 영웅을 질투한 소인배의 중상모략으로 일축시켜 버린다.

 

 

 

소인배의 맥락에서 스트로스의 오해로 짚고 넘어가자. 스트로스는 오펜하이머가 아인슈타인과 자신의 관계를 이간질했다고 오해해 오펜하이머에게 악의를 품는다. 스트로스가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의 대화를 들을 수 없었다는 점, 아인슈타인이 오펜하이머와의 만남 이후 스트로스에게 급격히 차가워졌다는 점, 무엇보다도 평소 오만함을 숨기지 못하며 스트로스에게 모욕을 안겼던 오펜하이머의 행보를 고려한다면 이는 스트로스로서는 충분히 가질 수 있을 법한 생각이다. 그러나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이 핵 개발과 지구의 존망에 대해 얘기했음을 보여준다. 스트로스의 보좌관의 말을 빌리자면 천재 오펜하이머, 천재 아인슈타인은 스트로스의 신변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것에 대해 얘기했다. 결국 스트로스는 천재들만큼 보거나 듣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에 천재들을 부당하게 박해했던 유다적 범인일 뿐이었다. 최종적으로 오펜하이머와의 악연이 문제시된 스트로스는 상무부 장관 임명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함으로써 일체의 목소리를 잃고 만다.

 

 

 

누군가의 의문과 비판을 단지 그보다 더 우월한 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일축하는 태도는 바람직한가? 수소 폭탄 개발을 적극 지지하던 인물 중 한 명인 윌리엄 보든은 영국을 향하는 미사일을 보며 나치를 쓰러트리겠다고 다짐한다. 세계 곳곳으로 핵 미사일이 날라가고 지구가 멸망하는 미래에 대한 오펜하이머의 비전에 비해 전쟁의 승리를 말하는 보든의 발언은 지극히 근시안적이다. 하지만 영국에서 미사일을 맞아야 했던 시민들이 먼 타국에 있던 오펜하이머의 이상주의에 쉽사리 동의할 수 있을까?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도 수소폭탄의 개발을 지지한 이들이 있음을 고려한다면 오펜하이머만이 모든 것을 제대로 봤음을 암시하는 영화의 결론은 상당히 의심스럽다.

 

 

 

. 선한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 선의

 

<덩케르크>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은 전쟁이라는 재난에 직면한 인간에게는 적과 동지의 구분이 무의미함을 역설한다. 그러나 재난 앞에서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는 각자도생의 논리만 있을 뿐 구체적인 윤리적 방향성을 결여한다. 이에 <오펜하이머>에서 놀란은 천재 오펜하이머의 입을 빌려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신뢰의 윤리를 제시한다. 그러나 그가 신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우리'가 아닌 오펜하이머라는 한 명의 천재에 불과하다. 천재의 우월한 통찰력에 호소해 그가 말하는 대로 평화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오펜하이머>의 윤리는 영웅주의적 성격을 숨기지 못한다. 천재 역시 인간인 이상 실수를 할 수밖에 없으며 언제든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놀란은 그 결함에도 천재의 주장을 따라야 하는 이유를 차분하게 설득하는, 어려운 길을 택하는 대신 오펜하이머를 영웅적 순교자로 포장함으로써 결함을 은폐하기를 선택한다.

 

 

 

어떤 인간이 옳은지는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을 조망하는 신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인간 개인은 다른 인간을 확실하게 파악할 만큼 훌륭한 직관을 가지지도 어떤 길이 옳은지 단언할 수 있는 통찰을 제시할 수도 없다. 그러나 영웅주의는 한 개인에게 인간사의 모든 일을 위임하고, 감히 메시아에게 의심을 표하는 이들을 유다로 낙인찍고 침묵시킨다. 공교롭게도 영웅과 대중의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은 작중에서 그리고 역사상 최대의 악 중 하나인 나치에게서 동일하게 발견된다. 히틀러가 위대한 통찰을 지닌 영웅으로 믿어졌을 때 영웅주의의 논리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오펜하이머>를 관통하는 주제가 반전과 반핵인 걸 고려한다면 크리스토퍼 놀란은 분명 선의를 가지고 영화를 시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원폭을 통해 세계평화를 실현하려던 오펜하이머의 선의가 실패한 것처럼 선의가 선한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놀란 역시 그 자신도 모르게 적의 방식을 거울상처럼 따라하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반전 영화를 만들겠다는 그의 선의는 끝내 좌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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