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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벗어날 탈>: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2024-03-05
영화 <벗어날 탈> 스틸컷 이미지



<벗어날 탈>: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김현진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먼저 영화 <벗어날 탈>이 어떤 영화인지 설명을 하고 시작해야 될 것 같다. 일단 이 영화는 현실을 그린 소설 같은 이야기라기보다는 초현실적인 느낌의 시나 우화, 환상 혹은 꿈같은 이야기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영화 내내 등장하는 불교의 화두나 선문답들, 경구, 무(無) 같은 불교의 개념들은 영화의 내용을 설명해 준다기보다는 주인공의 어지러운 마음의 상태, 그런 관념들에 빠져있는 사람의 내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들이라 봐야 한다. 뭔가 난해하고 복잡하고 낯선 영화처럼 보이지만, 나무 하나하나에 집중하기 보다는 숲 전체, 큰 그림을 본다는 마음으로 이 영화를 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영화의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재구성, 짜 맞추려 하기 보다는 음악을 듣듯이, 혹은 어떤 미술 작품을 보듯이 편안한 마음으로 이 영화를 보았으면 좋겠다. 이 영화는 의미보다는 시청각적인 체험이 먼저인 영화다.


영화 <벗어날 탈> 스틸컷 이미지2


남자 주인공 영목(임호준 배우)은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 그는 병이 있는데, 병든 것이 몸인지 마음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우울증일까. 그는 죽기 전에 깨달음을 얻고 싶다. 그는 여자친구를 떠나서 아파트 방에 틀어박혀 108배와 좌선, 여러 불교 서적 읽기를 반복하며 수행에 몰두한다. 그럴수록 번뇌와 잡념은 그를 괴롭힌다. 결국 영목은 붉은 옷을 입은, 얼굴이 없는 여자 귀신을 보게 된다. 죽음을 갈망했으나 막상 죽음의 그림자가 그의 곁에 나타났을 때 그는 죽음이 두렵다. 여자 주인공 지우(위지원 배우)는 미술가다. 한때 애니메이션을 그렸지만 그만두었다. 어떤 트라우마 때문이다. 그녀는 프랑스 니스의 해변가에서 한 동양인 남자의 뒷모습 사진을 찍었는데, 그는 바다로 걸어 들어가 죽었고, 그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지우는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나는 게 두렵다. 소설책은 결말부 부분을 찢어버리고, TV 속 드라마나 영화가 끝이 날 때쯤이면 TV를 끄거나 극장을 나왔다. 끝, ‘The End’라는 자막을 보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대로 그것도 죽음과 연관이 있다. 지우는 달리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 그 ‘해변의 사나이’를 자신이 그린 애니메이션 작품 속에서 부활시키기로 한다. 그는 작품 속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움직이게 될 것이다.


영화 <벗어날 탈> 스틸컷 이미지3


이 두 이야기는 다르지만 비슷하다. 즉 하나의 이야기를 A/B 버전으로 만든 것이다. 죽음의 공포에 직면하고, 거기에 맞서는 이야기. 영화의 처음에 나오는 자막 ‘不一不二(불일불이)’가 바로 이것이다.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수행자나, 작품의 완성을 위해 고민하는 예술가. 이 둘이 서로 같지 않지만 다르지도 않다는 것이다. <벗어날 탈>은 이 두 이야기를 서로 번갈아 보여준다. 그리고 두 이야기 사이의 비슷한 점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두 이야기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듯이. 애인과의 이별, 피, 꽃, 불과 같은 붉은 색의 이미지들, 얼굴이 지워진 존재 등등. 이는 마치 오른손과 왼손이 서로를 그리고 있는 형상을 그린 에셔의 그림 ‘손을 그리는 손’을 연상케 한다. 혹은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는 장자의 ‘호접지몽(蝴蝶之夢)’ 이야기 같기도 하다. 또는 요즘 유행하는 개념인 멀티버스, 평행 우주 같기도 하다. 누구의 이야기가 현실이고, 누가 누구의 환상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이야기가 느슨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 다 만물의 끝, 죽음의 공포에 맞선다는 것이다.


영화 <벗어날 탈> 스틸컷 이미지4


영목은 깨달음 없는 수행의 과정과 계속되는 귀신의 출현에 지친다. 그리고는 “삼계탕 먹고 싶다...”고 중얼거린다. 지우는 삼계탕을 요리한다. 영목은 삼계탕을 먹는다. 둘은 만나지 않았지만 이 삼계탕으로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놀랍게도 이 삼계탕이 영목을 구원한다. 그는 그 전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물만 마셨다. 그는 깨달음을 얻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을 너무 억압한 것은 아닐까. 해탈이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상태인데, 해탈을 가로막는 것이 해탈을 얻겠다는 욕망이라면 어쩔 것인가. 이것은 혹시 깨달음이 무엇이냐고 묻는 스님들에게 “차나 한 잔 마시게.”라고만 답했다는 조주 선사의 일화의 삼계탕 버전인가. 우리는 행복해져야 한다는 강박과 걱정 때문에 현재의 행복을 놓치고 사는 건 아닐까.


영화 <벗어날 탈> 스틸컷 이미지5


영목과 지우의 이 두 이야기는 결국 하나로 만난다. 두 이야기는 서로의 삶에 숨을 불어넣었다. <벗어날 탈>은 코로나19의 공포가 우리를 지배하던 팬데믹 시기에 만들어졌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가리고 서로에게서 멀리 떨어져 지내야 했다. 이 영화의 결말은 혹시 격리된 채 살아야 했던 우리에게 보내는 격려 같은 것일까. 이 결말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상관은 없을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말이 안 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 결말을 음악을 듣듯이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이는 밝게 끝나는 음악과 비슷하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지만 무엇이 우리에게 죽음의 공포를 잊게 해주는지, <벗어날 탈>을 보면서 생각해 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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