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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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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세기말의 사랑>: 너를 구하는 것이 곧 나를 구하는 것2024-01-26
영화 <세기말의 사랑> 스틸컷 이미지



<세기말의 사랑>: 너를 구하는 것이 곧 나를 구하는 것


김현진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이 영화 참 별나다. <세기말의 사랑>이 끝나자마자 자연스레 든 생각이었다. 인물들도, 이야기도, 전개 방식도, 영상과 사운드도 무엇 하나 전형적인 부분이 없다. 마치 주인공 영미(이유영 배우)의 앞니에 있는 덧니처럼 묘한 구석이 있는 영화다.


영화 <세기말의 사랑> 스틸컷 이미지2


노스트라다무스가 지구 종말이 올 거라 말했던 세기말 1999년 12월. 한 공장의 경리과장 영미는 납품 배송 기사인 도영(노재원 배우)을 짝사랑한다. 못난 외모 때문에 공장 안에서 ‘세기말’이란 멸칭으로 불리는 영미에게 도영은 친절하게 대하기 때문이다. 영미는 도영이 회사의 공금을 조금씩 빼돌리고 있다는 걸 알고, 그걸 자신의 돈으로 채우려 밤새 재봉틀을 돌린다. 그녀의 노력에도 도영은 공금횡령죄로 체포되고, 영미 또한 공금 횡령을 묵인한 죄로 둘 다 감옥에 가게 된다. 출소한 영미 앞에 유진(임선우 배우)이 나타난다. 유진은 도영의 아내다. 그리고 손도 발도 목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이다. 유진은 도영이 빼돌린 그 돈을 영미에게 꼭 갚겠다고 말한다. 영미는 사촌오빠가 자신이 감옥에 있는 동안 집을 팔아버리고 잠적한 걸 알게 되고, 졸지에 집을 잃은 영미는 어쩔 수 없이 유진의 집에 있게 된다. 도영의 그 돈을 다 받을 때까지만. 이 두 여자는 잘 지낼 수 있을까?


영화 <세기말의 사랑> 스틸컷 이미지3


앞서 말한 대로 <세기말의 사랑>은 이야기도,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도 범상치 않다. 어떤 장면과 상황을 일단 보여준 다음, 그 장면의 의미와 이유가 무엇인지를 뒤에 알려주는 식으로 영화가 전개된다. 영미의 손가락에 반창고는 왜 붙어있는지, 유진이 스스로 선글라스를 벗지 않고 왜 옆사람에게 지시하는지를 그 장면 이후에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물들 각자의 사연과 관계가 비밀과 거짓말로 꼬여있고 숨겨진 부분이 많아서, 영화 내내 반전의 순간이 하나씩 계속 나온다. 이 영화가 난해한 영화는 아니지만, 보기로 결심했다면 초집중하면서 봐야한다. 그래야 영화 속 많은 디테일들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다. <세기말의 사랑>은 여러 영화제의 각본상 후보에 오를 만한 자격이 있다.

이 영화의 영상과 사운드도 특이한 부분이 많다.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는 1.66 대 1의 화면 비율, 영미의 얼굴을 화면 한 쪽 구석이나 화면 아래에 놓이도록 촬영한 장면, 영미가 아파트 복도 난간에서 아래로 침을 뱉을 때 영미의 고개를 따라 같이 기울어지는 화면 등등... 영화의 몰입에 방해가 될 만큼은 아니지만 뭔가 불안해 보이면서도 엉뚱함이 느껴지는 스타일의 장면이 많다. 음악의 사용도 독특하다. 빨라졌다 느려지기를 반복하는 불규칙한 리듬의 전자 음악이나, 영미가 출소할 때 나오는 음악이 그렇다. 퀸의 그 유명한 ‘Under Pressure’ 도입부 베이스 리프가 나오는가 싶더니 전혀 다른 멜로디로 흘러가는 음악도 이 영화에 엉뚱한 리듬감을 더한다. 그 음악도 이 영화를 닮았다. 예상을 비껴가는 변칙적인 방식.


영화 <세기말의 사랑> 스틸컷 이미지4


<세기말의 사랑>은 제목에 ‘사랑’이 들어가지만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연애 이야기는 아니다. 연애라고 부를 만한 순간은 짧고, 그것 때문에 겪게 되는 사람 사이의 관계, 더 넓은 의미의 사랑을 보여준다. 영미와 유진의 관계가 그렇다. 임선애 감독은 두 사람의 관계를 절묘하게 엮는다. 영미는 거처가 필요하고 유진은 자신의 몸을 돌봐줄 보호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빚이 있는 불편한 사이. 어쩔 수 없이 동행해야 하는 사이지만 둘은 서로의 존재로 인해 인간적으로 성장한다. 영미는 매사 당당한 유진의 태도를 보며,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상대방에게 사과를 요구하거나 화를 내는 법을 배운다. 유진은 늘 친절하고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하는 영미를 보며, 화를 참을 줄 알게 된다. 둘은 겉모습과 성격은 정 반대지만,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같다. “나는 왜 도영이를 구하고 싶었을까? 나도 날 못 구하는 주제에.” 유진의 이 말은 영미에게도 딱 들어맞는 말이다. 그리고 도영을 비롯해서 영화 속 다른 인물들도 그렇다. 그들은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처지가 못 되지만, 그럼에도 남을 구원하려 한다. 왜? 그것이 곧 자신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영화 <세기말의 사랑> 스틸컷 이미지5


배우들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구도영을 연기한 노재원은 등장 분량은 길지 않지만 순한 얼굴과 부드러운 말투로 두 여자가 왜 이 남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를 우리에게 납득시킨다. “십자가는 과학이거든요.” 이런 필살기 대사에 마음이 동하지 않기는 힘들다. 유진의 ‘호구’들을 연기한 문동혁, 김기리도 기억할 만한 이름이다. 무엇보다 두 주인공 이유영과 임선우는 연기하기 쉽지 않은 인물을 맡아서, 인생 배역이라 해도 손색없을 열연을 보여준다. 오랜만에 기억에 오래 남을 영화를 봤다. 다시 말하지만 이 영화 진짜 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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