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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위무와 사랑2024-01-24

카메라는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한동안 응시한다. 거울에 비치는 한 소녀는 꿈을 꾼다. 그녀는 무슨 꿈을 꿨을까? 세미는 불길한 꿈을 꾸었다며, 다리를 다쳐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는 하은의 병문안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병문안을 간 세미는 계속해서 하은이에게 함께 수학여행을 가자며 조르고, 둘은 수학여행비 마련을 위해 하은이의 캠코더
를 팔아보기로 계획을 세운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야기만 읽어내면, 이 영화는 청소년기 소녀들의 사랑 이야기다. 누구나 겪었을 너무나 사랑했던 친구와의 우정,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나밖에 몰랐던 그 시절의 우리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다소 불안하다. 계속해서 어긋나고 숨기와 숨기기의 서스펜스가 어지럽기 까지 하다. 그 불안의 근원을 찾다 보면, 두 소녀의 사랑 이야기 아래 숨어 있던 14년의 수학여행 이야기가 떠오른다. 테이블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물컵, 안산역과 수학여행, 태풍과 구조작업이라는 상징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수학여행 전날임이 관객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꿈에 대한 묘사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세미는 집과 학교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자신이 사랑한 하은을 찾으러 나서지만, 하은은 들판에 죽어있다. 세미는 하은의 얼굴에서 모두를 발견한다. 친구를 발견하고, 선생님을 발견하고,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세미는 하은이 된다. 늘 함께 타던 버스에 혼자 탄 하은(세미)은 홀로 남은 하은이 얼마나 외로웠을지를 생각하게 된다. 노을과 라디오. 하은은 눈물을 흘린다. 세미의 꿈 고백 이후, 하은과 세미는 포옹을 한다. 그들은 이제야 서로를 온전히 사랑하게 된다.

 


이 장면은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장면이다. 네가 되는 경험을 통해 상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네가 되는 경험을 통해 너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무한다. 이 장면 이후 비로소 완성되는 영화의 주제의식은 자연스레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을 떠올리게 한다. ‘너의 이름은.’은 전반부의 신체 교환 서사와 후반부의 역사 바꾸기 서사를 통해, 네가 됨으로써 너를 이해하고, 너를 살리고 싶다는 마음을 갖는 과정을 그린다. 신체 교환 서사를 통해서 재난의 피해자에 공감함과 동시에 상실감을 느끼게 하고, 역사 바꾸기 서사를 통해 살아남은 자의 염원을 실현시킨다. ‘너와 나’는 이 점에서 ‘너의 이름은.’과 닮아 있다. ‘네가 되는’ 역지사지에서 비롯된 공감이라는 서사와 ‘이미 일어난 사실’을 바꾸려는 서사 구조가 대응된다. 하지만 둘의 목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너의 이름은.’은 죽은 이들을, ‘너와 나’는 살아남은 이들을 위무한다. ‘너의 이름은.’은 타키와 미츠하가 쌍방으로 서로가 되지만, 이야기의 주체는 타키에 중심이 가 있다. 즉 살아남은 자가 죽은 자가 되는 경험이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는 것이다. 이는 ‘무스비’를 배우는 타키의 모습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타키(생존자)가 미츠하(피해자)가 되는 경험을 통해, 타키는 미츠하를 구하려는 결심
을 하고, 그의 염원은 지하철이나 계단과 같은 일상적 공간에서 실현된다. 결국, 생존자를 통해 피해자를 위무하는 것이다.

 


반면, ‘너와 나’에서는 서술의 주체가 세미다. 꿈에서 세미(피해자)는 하은(생존자)가 되고, 하은이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다. 세미가 그 꿈의 끝에서 ‘네가 많이 힘들었겠구나’하고 고백하는 장면은 피해자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위로이기 보다는 생존자에 대한 응원과 위무다. 이는 길 잃은 개를 찾아주는 이야기에서도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길 잃은 개(피해자)의 목소리보다는, 그를 찾고 있던 주인(생존자)의 목소리를 담음으로써,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과 그럼에도 집으로 돌아온 개(시체)에 미안함과 안도감을 느끼는 묘한 감각을 묘사하는데 집중한다. ‘너와 나’는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또
한, 그렇기에 살아남은 자인 관객은 영화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생존자에 대한 위무가, 그 과정을 지켜봤던 관객에 대한 위무로 확장·전이되는 것이며, 이는 나의 슬픔에만 매몰되었던 이기성에서 너의 슬픔에 공감하는 사랑으로의 확장성을 담고 있다.

 

 


이는 영화가 ‘나와 너’가 아닌 ‘너와 나’인 이유이며 ‘우리’가 아닌 ‘너와 나’인 이유이다. 이 말은 즉슨, 상대를 우선순위에 둠으로써 변화되는 사랑의 의미이고 그럼에도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의 슬픔이다. 그 지점에서 이 영화는 힘이 부치는 영화가 아니라 힘이 되는 영화가 된다. 영화의 응원에 관객은 용기를 얻는다. 그럼에도 살아가겠음을 다짐하게 된다.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위무와 사랑. 이를 형상화하고 감성을 스며들게 하는 촬영과 연출은 우리로 하여금 그날의 꿈을 재구성하게끔 한다. 관객이 경험하게 되는, 죽은 자(하은)의 얼굴에 서로를 대입하다 결말에서는 죽은 자(세미)의 얼굴에 결국은 나를 대입하게 되는 경험은, 정확히 관객-생존자를 직시하고자 하는 감독의 의지의 산물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 자연스레 옆에 앉은 관객의 얼굴을 보게 된다. 그러고는 속으로 작게, 아주 작게, 그러나 간절하게 ‘사랑해’를 읊을 뿐이다. 진심을 담아. ‘너와 나’ 는 살아남아 있는 우리에게 ‘사랑해’라고 말한다. 위령들의 목소리처럼. 물속에서 울리
는 것처럼. 그 위무가 사랑이 되고, 사랑은 다시 위무가 되고, 그날의 의미는 지금에서 다시 한 번 재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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