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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키 17> : 유령, 혹은 잠재적 존재로서의 (비)인간2025-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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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17> : 유령, 혹은 잠재적 존재로서의 (비)인간
장지애 2024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0. 유령의 계보
봉준호의 영화는 종종 ‘유령’처럼 존재하는 자들을 스크린으로 불러낸다. 여기서 유령이란 죽은 자의 잔재가 아니라, 사회적 시선과 언어의 틈에서 실체를 부여받지 못한 존재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살아 있지만 현실의 중심에 도달하지 못한 자들로, 이름 없이 경계에 머물며 사회적 제도와 언어 구조 안에서 발화되지 못한 채 실체 없는 형상으로 표류한다. 이러한 유령의 형상은 봉준호 영화에서 주로 자본주의 구조에 의해 배제된 인물들을 통해 드러난다. 예컨대 <괴물>의 현서는 괴물에게 납치된 후, 국가의 무책임과 언론의 왜곡으로 공공연히 지워진 존재가 된다. 그의 생존 여부는 논의되지 않고, 국가 시스템 안에서 그는 이미 사라진 자로 간주된다. <기생충>의 근세는 지하실이라는 구조적 은폐 공간에 갇혀, 가시성과 시야 바깥으로 밀려난 채 주인 가족의 삶을 떠받치는 계급적 유령으로 존재한다. <마더>의 도준은 스스로 방어할 언어를 갖지 못한 채, 타인의 해석과 믿음에 따라 죄를 뒤집어쓰거나 면제된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지 못하고, 결국 외부의 판단에 따라 존재가 규정되는 유령적 주체로 전락한다.
그러나 봉준호의 유령들은 단지 사회적 피해자로만 남지 않는다. 그들은 때로 질서를 교란하거나 바깥에서 새로운 잠재성을 부유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살인의 추억>에서 유령은 더 이상 특정 인물에만 귀속되지 않는다. 실체 없이 영화 내내 잡히지 않는 범인은, 끝내 형사의 얼굴 속으로 이행되며 진실의 모호함을 반영하는 거울쌍으로 작동한다. 여기서 유령성은 부재의 공포가 아니라 존재 사이의 전이성과 오인의 공간, 즉 존재론적 미끄러짐으로 드러난다. <마더>의 도준 역시 단순한 피해자의 위치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모성과 타자의 욕망에 의해 움직여지는 불확정적 존재로, 발화하지 않지만 해석되고 선택하지 않지만 선택당하는 잠재적 유령이다. 도준의 정체성은 외부의 믿음에 따라 잠정적으로 구성되며, 그 믿음이 무너질 때 그의 존재도 붕괴된다. <기생충>에서는 유령성이 더욱 전술적으로 작동한다. 기우네 가족은 ‘정상 가정’이라는 외피를 자발적으로 연기하며, 보이지 않기 위한 전략으로 유령이 되기를 선택한다. 이들은 은폐된 피해자라기보다, 자신에게 가해진 은폐를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 유령-되기를 수행하는 주체들이다. 여기서 유령은 생존을 위한 방식인 동시에 계급 구조를 교란하는 사회적 잠입의 형식이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보이지 않음으로써만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을 수행한다.
이처럼 봉준호 영화 속 유령은 언제나 존재의 경계에서 미끄러지는 자로 나타난다. 그들은 실체를 갖지 못한 피해자이면서도 그 경계를 통해 새롭게 발화되거나 기존 질서를 교란하는 잠재성으로 기능한다. 유령이란 단지 ‘존재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 존재로 고정되지 않는 자다. 그리고 이 유령성의 계보는 <미키 17>에서 한층 다른 형태로 전환된다. 미키는 더 이상 배제되거나 숨겨진 존재가 아니다. 그는 시스템 내부에서 끊임없이 프린트되고 이식되는 존재, 즉 복제 가능성에 의해 실체를 잃은 유령으로 등장한다. 미키는 죽을 때마다 동일한 구조로 복원되지만, 기억과 감각은 완전히 이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언제나 같은 자로 재생산되지만,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일 수 없는 조건 속에 놓인 자다. 말하자면 미키는 이제 사회에 의해 밀려난 유령도, 해석되지 않은 잠재적 유령도 아닌, 복제와 기능 사이, 반복과 소멸 사이에서 무한히 회전하는 ‘비인간적 유령의 형상’이다. 정체성이 반복될수록 그는 붕괴하며, 기억은 존재를 증명하기보다 오히려 그 결핍을 드러낸다.
봉준호는 <미키 17>을 통해 유령이라는 형상을 단순한 부재의 은유에서, 복제 불가능성과 정체성의 과잉이라는 새로운 존재론적 조건으로 확장한다. 유령은 이제 말하지 못하는 자가 아니라, 너무 자주 말함으로써 실체를 잃은 자이며, 존재하지 않음이 아니라 너무 반복된 존재이기에 실체화되지 못하는 자다. 미키는 그렇게 오늘날 인간이 스스로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 자체를 다시 열어젖히는 (비)인간이라는 경계 그 자체를 비추는 유령의 얼굴로 제시된다.
1. 프린트된 몸, 이식된 기억: 미키의 자기동일성에 관하여
미키의 정체성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그는 자신이 미키라는 사실을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영화 속 설정에 따르면, 익스펜더블인 미키는 사망 시점 이후 자동으로 새로운 육체로 프린트되고 일정 간격으로 업로드된 기억과 성격 특성이 새로운 뇌에 이식된다. 기술적으로는 하나의 동일한 인격이 복제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정은 자아의 존재론적 조건을 오해하고 있다는 철학적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기억은 곧 자아인가? 혹은 기억이란 결국 외부에서 선택적으로 추출되고 주입된 정보에 불과한가?
새로운 몸으로 깨어난 미키가 “나는 미키”라고 주장 할 수 있음에도 그것이 과연 자기 자신에 대한 주체적 명명이라 할 수 있는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기억하는 ‘과거’는 경험된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주입한 것이고, 그가 감각하는 ‘자신’은 이전 육체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고통과 감정의 경험을 직접 이어받지 못한 실존의 연속적 층위가 결여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미키의 정체성은 표면적으로만 이어지고 내면적으로는 비어 있는 복제의 파편으로 전락한다.
여기서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통찰은 <미키 17>을 해석하는 데 결정적인 철학적 시선을 제공한다. 그는 『나는 뇌가 아니다』에서 인간을 단지 뇌의 신경 작용이나 육체의 기능으로 환원하려는 과학주의적 환원주의를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란 단순한 신경계의 산물이 아니라 ‘의미의 장(Field of Sense)’ 안에서 스스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주체라는 것이다. 정체성은 뇌의 구조가 아니라, 세계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각하고 그 위치를 해석하는 의미 구성 과정에서 형성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미키 17> 속 미키는 이 ‘의미의 장’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존재이다. 그는 자율적으로 자신을 위치 지을 수 없고 오직 시스템이 부여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호출된다. 익스펜더블이라는 체계 내에서 그는 필요에 따라 숙고 없이 리셋된다. 이때의 죽음은 실존적 종말이 아니라 기능적 중단이며, 프린트는 부활이 아니라 재가동이다. 그 결과 미키는 삶과 죽음 모두에 무감각해진다. 죽음을 반복하는 주체는 더 이상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으며, 프린트라는 기술적 안전망은 존재의 본질을 무력화시킨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자. 미키는 기억의 동일성에 기초한 단일 인격이 아니라, 기술적으로 반복되는 복수의 존재다. 그는 언제나 타인의 요청과 시스템의 판단에 따라 ‘지금 여기’로 호출된 하나의 가능태일 뿐이다. 이 가능태는 항상 유예되어 있으며 시스템에 의해 구성되고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는 결코 스스로를 완결할 수 없다는 점에서 또한 유령이다. 미키는 존재의 유일성을 갈망 혹은 믿고 있지만, 실상 시스템은 그에게 ‘되기’가 아닌 ‘작동하기’만을 허락한다. 즉, 기억의 동일성이 자기동일성을 보장하지 않는 문제에 직면한 미키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생물학적으로 재현된 기능적 유령, 체계의 흐름 속에 떠다니는 존재의 파편에 불과하다.
2. 멀티플이라는 실험의 실패, 혹은 질문되지 않은 복수성
영화의 핵심은 미키17과 미키18의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공존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충돌에 있다. 멀티플의 등장은 기술적 오류나 시스템의 예외 상황이라기보다는 영화가 전제하고 있던 존재론 자체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동일한 기억과 육체를 공유하는 두 존재는, 놀랍게도 처음부터 서로를 제거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이 장면은 단지 서사적 긴장을 위한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여야만 하는 나’라는 근대적 자기동일성의 관념이 어떻게 체제 내부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를 드러낸다. 두 존재는 모두 자신이 ‘진짜’임을 입증하기 위해, 상대의 존재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즉, 여기에는 존재는 유일해야 하며, 그 유일성을 확보하기 위해 타자는 제거되어야 한다는 정체성의 공식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충돌은 복수성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사회적·존재론적 구조를 드러낸다. 복제는 기술적으로 가능해졌지만, 복수의 존재는 여전히 사유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충돌은 곧 영화가 끝내 회피한 결정적 질문을 부각한다. ‘왜 두 존재는 공존할 수 없는가?’, ‘왜 복제된 존재는 고유한 타자성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오직 비교의 대상으로만 소환되는가?’ 미키18은 미키17의 존재를 자신의 전신으로 간주하고, 미키17은 미키18을 자신의 불완전한 반복으로 취급한다. 그들은 서로를 ‘나의 변형’으로만 인식할 뿐, ‘나 아닌 너’라는 고유한 타자로 수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분명히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감각의 미묘한 차이, 경험의 이력, 감정의 결을 보여준다. 나샤에 대한 태도, 티모와의 관계, 죽음에 대한 감내 방식 등에서 이들은 결코 동일한 존재가 아니다. 복제라는 기술적 일치는 이들의 실존적 차이를 지워버리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들은 끝내 복제된 존재로 간주되며 하나는 제거되어야 할 불필요한 잉여로 전락한다.
이러한 복수성의 거부는 단지 개인의 혼란이나 감정의 충돌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영화가 암시하는 더 거대한 체제의 작동 방식, 즉 존재의 복수성을 통제하고 억압하려는 시스템의 전략이다. 영화는 앨런 매니코바 사건을 통해 멀티플 금지의 기원을 설명한다. 복제된 두(세) 존재 중 누가 범죄자인지를 식별할 수 없었다는 혼란은 결국 멀티플 존재 전체를 법적 위험과 윤리적 공포의 상징으로 낙인찍는 계기로 작동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지 우연한 오류가 아니라, 체제가 복수성을 억제하기 위해 구성해 낸 ‘공포의 서사’다. 지배 계층은 이 서사를 활용해 멀티플을 불법화하는 대신, 프린팅 기술의 독점적 사용을 제도화한다. 즉, 멀티플 금지는 존재의 윤리 문제가 아니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권력의 관리 장치이며 복수의 존재 자체를 질문할 수 없게 만드는 통제의 언어로 기능하는 것이다.
결국 <미키 17>은 복제라는 급진적 실험을 수행하면서도, 그로부터 열릴 수 있었던 존재론적 잠재성─복수 존재의 사유 가능성─을 끝내 수용하지 않는다. 영화는 두 존재가 서로를 이해하거나 공존할 가능성을 탐색하지 않고, 이들의 관계를 갈등 구도로만 전개하며, 결국에는 하나를 소거하는 제거의 논리로 귀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이기보다는 서사적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방식에 몰입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유일성’이라는 미명 아래 타자를 제거함으로써 살아남은 하나의 존재다. 그는 살아남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증하지만, 그 확증은 윤리적 성찰의 결과가 아니라 생존 본능에 따른 타자의 제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로써 등장한 유일한 미키는 더 이상 익스펜더블이 되기 이전의 ‘미키 반스’와 동일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하나의 ‘본래적 자아’로 회귀한 것이 아니라, 복제와 반복의 과정에서 타자를 제거함으로써 구성된, 즉 미키n의 계열 중 살아남은 불완전한 파생물로서의 유일성이다. 따라서 그의 유일성은 주체의 통합적 완결성이 아니라 오히려 상실과 배제, 소거의 흔적 위에 세워진 균열된 정체성에 불과하다.
3. 질서의 형벌, 질문하지 않는 자로서의 미키
<미키 17>은 케네스 마샬이라는 권위적 인물을 정면에 배치하며, 체제의 명확한 권력 구조를 드러낸다. 마샬은 군사적 질서와 생존 논리를 내세우며, 통제를 위한 폭력과 희생을 당연한 전제로 삼는다. 하지만 이 체제가 유지되는 데 필요한 것은 폭력 그 자체보다, 그 폭력을 가능케 하는 무지와 순응이다. 미키는 바로 그 체제를 뒷받침하는 존재이다. 그는 마샬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지만, 동시에 체제를 거부하지도 않는다. 체제와의 마찰 없이 살아남는 미키는 스스로를 반체제적 존재라고 여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상 그는 체제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조용한 협력자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키의 존재는 고통을 감각하지만, 그 고통을 사유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또한 고통의 윤리로부터 추방된 존재다. 예컨대 미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적어도 영화의 초반부에는 그렇다. 사이클러에 빨려 들어가기 직전에도 그는 담담하게 “괜찮아유~”라고 웃어 넘긴다. 죽음은 그에게 더 이상 실존의 마지막 순간이 아니다. 죽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그의 태도는 죽음을 ‘통과해야 하는 기술적 절차’ 정도로 받아들이는 시스템의 인식과 맞물린다. 그가 반복적으로 죽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죽음의 무게를 제거한다.
그러나 정작 사라지지 않는 것은 고통의 무게다. 미키는 고통을 ‘견디는 자’일지언정, 그 고통을 ‘사유하는 자’는 아니다. 그에게 고통은 단지 반복되는 물리적 체험일 뿐 존재의 깊이를 만들어 주는 경험으로는 전환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미키의 비극이며, 동시에 영화가 회피하는 윤리의 지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시포스와 프로메테우스를 떠올릴 수 있다. 이들은 고통받는 존재였지만, 고통을 인식하고 때로는 사유의 도구로 전환함으로써 자신의 형벌을 지연된 윤리로 치환할 수 있었다. 시시포스는 끊임없이 돌을 굴리는 형벌 속에서도 그 무의미를 자각하며 자신의 운명을 수용했고, 프로메테우스는 고통 속에서도 독립적인 지성과 반역의 정신을 유지한 존재였다. 반면 미키(특히 미키17에 이르기까지)는 반복되는 고통을 감각하되 그 고통을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는 형벌을 견디면서도 끝내 그것이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는다.
결국 <미키 17>이 보여주는 가장 큰 위협은 명확한 폭력이나 가시적 권력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체제에 복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 스스로를 피해자라 착각하는 자, 질문하지 않는 자다. 미키는 그런 존재다. 그리고 균열의 동기가 된 미키18이 아닌 체제에 순응하며 침묵을 택한 미키17이 살아남는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불편하고도 근본적인 윤리적 질문을 남긴다. ‘어째서 균열은 제거되고, 침묵은 생존하는가?’ 이 선택은 단지 이야기의 결말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어떤 존재를 살아남게 둘 것인가에 대한 무언의 응답처럼 들린다.
4. 크리퍼, 이름있는 존재들
영화 속 크리퍼는 인간과 가장 먼 곳에 있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들의 외형은 괴물적이며, 처음에는 언어를 갖지 않은 타자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 괴물성은 인간의 시선이 부여한 외피에 불과하다. 크리퍼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기보다, ‘이해받지 않은 존재’에 가깝다. 실제로 ‘크리퍼’라는 호명은 그들이 스스로 명명한 이름이 아니라, 마샬이 주도하는 체제가 통제를 위해 붙인 범주다. 이름 붙이기란, 이해의 첫걸음이기보다 종종 지배의 방식이 된다. 타자를 범주화하고 분류함으로써 타자성을 제거하려는 시도. 즉, ‘말할 수 없는 자’로 만들기 위한 권력의 행위다.
여기서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은 <괴물>의 괴물이다. <괴물>에서 괴물은 인간이 만들어 낸 돌연변이로 물리적으로 인간을 공격하지만, 그 폭력의 근원은 실상 인간 자신의 과오와 책임에 있다. 그러나 <미키 17>의 크리퍼는 이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인간이 만든 존재도 인간을 의도적으로 공격하는 존재도 아니다. 단지 인간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괴물화되고 체제의 통제를 벗어난다는 이유로 위협으로 간주될 뿐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체제 내부의 불안을 반영하는 장치이며, 크리퍼의 괴물성은 인간 사회가 외부의 타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통제하려는 욕망을 집합적으로 투사한 상징적 표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영화는 이 괴물성의 허구를 결정적으로 전복하는 순간을 마련한다. 크리퍼는 말할 수 있는 존재이며, 고유한 개체성─이름, 언어, 감정, 정체성─을 가진 주체들이다. 통역기의 발명 이후, 우리는 그들이 단지 침묵했던 것이 아니라 침묵하게 만들어졌던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영화는 중요한 윤리적 전환점을 맞는다. 더 이상 크리퍼는 괴물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할 수 있는 타자이며, 관계 맺을 수 있는 주체로 재의미화된다.
하지만 이 전환은 오히려 인간 내부의 소통 불가능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진정으로 말이 통하지 않았던 것은 크리퍼가 아니었다. 인간과 체제 사이의 대화는 끊임없이 어긋났고 그 어긋남은 의사소통의 부재라기보다 이해하려는 의지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크리퍼는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 사회가 끝내 이해하려 하지 않은 존재로서 인간들은 그 차이를 이해하려 들기보다는, 이해 불가능성이라는 전제를 체제의 방어 논리로 삼았다. 이 지점에서 크리퍼는 단지 외계 종족이 아닌, 인간 체제 바깥에 놓인 타자성의 은유로 기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존재들은 ‘이름 없는 존재’로 여겨졌지만, 사실은 가장 분명한 이름과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지닌 개별자들이었다. 이처럼 <미키 17>은 크리퍼를 통해 인간이 타자를 어떻게 침묵시키고, 지워왔는지에 대한 구조적 윤리를 폭로한다.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괴물화하고 말할 수 있는 타자를 침묵시키며 타자의 존재를 통제할 수 있는 언어 안에 가두려는 권력의 작동은 영화 전반에 걸쳐 작동한다. 크리퍼는 미리부터 존재했지만, 그 존재는 오랫동안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 침묵은 단지 결핍이 아니라, 타자의 발화를 구조적으로 지연시키는 체제의 윤리를 비추는 가장 잔혹한 거울이었다.
봉준호 영화의 유령들은 때로 체제의 틈에서 말할 가능성을 예고했고, 기존 질서를 교란하는 잠재적 주체로 떠올랐던 것을 상기해 보자. 처음엔 이름이 없었고 존재로 승인받지 못했으며 끝내 발화조차 허락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만, 크리퍼의 뒤늦은 발화는 체제가 배제한 타자들이 어떻게 귀환할 수 있는지를 암시하는 순간처럼 보였다. 그러나 영화는 그 가능성 앞에서 멈추어 선다. 미키18의 소멸과 함께 복수 존재의 가능성이 닫힐 뿐 아니라 체제가 재정비되고 질서가 복원되며 존재의 유령성조차 소멸된다. 그리고 말하는 타자와 함께 사는 윤리, 유령과 공존하는 정치, 침묵 이후의 관계를 수용할 수 있는 상상력은 끝내 영화의 내적 세계로 안착하지 못한다.
5. 남겨진 질문들, 그리고 식별 불가능한 시간들
<미키 17>의 엔딩은 단순한 결말이 아니다. 그것은 영화가 끝내 마주하지 못한 존재론적 질문의 문턱이자, 회피되고 만 윤리의 여백이다. ‘왜 미키18은 스스로를 삭제하는 방식의 희생을 택했는가?’, ‘왜 미키17은 그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마침내 감정의 균열을 드러내는가?’ 이 감정들은 단지 연민이나 인간적 반응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그것은 ‘나’와 ‘너’가 동일하지 않음을 인식한 순간, 자기동일성의 꿈이 무너졌음을 자각한 자의 혼란이며, 동시에 그 꿈을 복원하려는 마지막 무의식적 저항이다. 그러나 이 감정은 끝내 윤리로 전화되지 못한 채, 체제가 반복해온 타자 제거의 제스처로 회귀한다.
이 결말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비극적 전환의 핵심을 생략한 채 감정의 표면만을 흐르게 만든다. 미키17과 18의 관계는 단순한 복제가 아닌 실질적인 분리를 겪고 있음에도, 그 분리는 각성의 계기로 진전되지 않는다. 미키18은 나샤와의 쾌락을 향유하며 정서적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미키17은 실험체로서의 반복된 고통과 수치를 감내하며 기능적 삶에 종속된다. 이들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인식과 정서의 결은 현저히 갈라져 있음에도, 영화는 이 분리를 구조적으로 체화하지 않는다. 그저 서로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방식으로 시각적 구분을 제공할 뿐, 이중적 존재의 실존적 간극은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 마치 1인 2역의 극적 장치를 통해 관객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는 형식적 기제로만 작동하는 듯하다.
예컨대 <기생충>의 계단, <설국열차>의 칸 이동처럼 봉준호 영화에서 존재의 전환은 항상 공간적 이행과 상징적 지연을 통해 감각적으로 증명되곤 했다. 하지만 <미키 17>에서는 그런 서사적 매개가 과도하게 생략된다. 미키17과 18 사이의 단절은 선언되지만, 그것을 가로지르는 긴장, 이행, 혹은 저항의 과정은 실종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이 분리는 자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단지 플롯의 변화로 대체된다. 깨달음은 도래하지 않고, 오직 상황만이 바뀌는 것이다. 변화는 발생하지만, 주체는 그것을 인식하거나 체화하지 못한다. 이때 미키17은 고전 비극의 주인공처럼 앎으로 도달하는 존재가 아니라, 끝내 자신을 통과하지 못한 채 변화만을 겪는 자, 혹은 변화에 휩쓸리는 자로 남는다.
고전 비극에서 주인공은 무지에서 앎으로 이행하며, ‘아나그노리시스’의 순간을 통해 자신의 파멸을 자각하고 그것의 의미를 직면한다. 그러나 미키17은 무지를 벗어나지도, 그것을 정면으로 응시하지도 못한 채, 끝내 무언가를 흉내 내는 자로 남는다. 그는 미키18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미키18은 반대로 미키17의 수치를 자신의 체험으로 오인한다. 이 기묘한 감정의 교환은 타자에 대한 진정한 인식 없이 발생한 혼동의 파편일 뿐이다. 그 결과 미키17은 타자의 죽음 앞에서도 ‘자기 자신’으로 말하지 못하고, 타인의 감정과 기억을 재현하는 자리에 머문다. 이때 그가 발화하는 문장은 고백이 아니라 차용된 대사이며, 윤리적 책임이 아닌 감정의 모방이다. 결국 그는 말할 수 있는 타자로서의 가능성을 부여받았음에도, 그 가능성을 실현하지 못한 자, 다시 말해 타자의 언어로만 존재하는 유령으로 퇴장하게 된다.
영화는 이 실패를 둘러싼 또 하나의 구도를 제시한다. 카이는 미키17을 ‘프린트된 게 아니라 그냥 사람’ 같다며 그를 실존적 존재로 명명하지만, 나샤는 미키17과 미키18을 동일한 존재로 인식하며 그 구별을 무화시킨다. 이렇게 대비되는 인식은 ‘나샤–미키18’, ‘카이–미키17’이라는 평행 구도를 형성하는 듯 보이지만, 영화는 이를 더 깊이 밀어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 대립은 곧 마샬 암살 시도라는 외부적 사건으로 급격히 정리된다. 문제는 이 시도조차도 존재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라기보다, 자신과 타자의 경계를 혼동한 채 격발된 미숙한 충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미키18은 끝내 타자와의 공존이 아닌 체제 전복의 언어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며, 그 순간 멀티플의 가능성은 처참히 무너지게 된다.
6개월의 시간이 흐른 후, 미키는 인간 복제 시스템을 폐지하는 선택을 앞두고 있다. 버튼을 누르기 전, 미키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죄책감의 층위를 되짚는다. 영화는 다시 미키의 몽환적 내레이션으로 회귀한다. 오프닝에서의 내레이션이 정렬된 기억의 회상 장치, 즉 플래시백의 서사적 기능을 수행했다면 엔딩의 내레이션은 더 이상 그런 구조적 안정성을 제공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 상상과 회상은 끊임없이 겹쳐지고 뒤엉킨다. 기억은 더 이상 시간의 지표가 아니며, ‘나’라는 주체는 더 이상 그것을 정리하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 버튼을 누르려는 손, …죄책감을 지우려는 충동, 현재를 다시 살아보려는 미키의 몸짓은 표면적으로는 주체적 결단처럼 보이지만 그 선택조차도 그 자신의 것이 아닐 수 있다.
결국 미키17은 미키18을 상상하며 혹은 그의 자리를 대신해 행위 한다. “죄책감은 그만, 행복하자.”라는 말은 자각에서 비롯된 고백이 아니라, 자신이 되지 못한 자가 타인을 흉내 내며 읊조리는 문장처럼 들린다. 그는 지금 누구인가? 미키17인가, 미키18인가? 혹은 그 어느 쪽도 아닌 체제가 허용한 유일성의 허상, 복제된 윤리의 가장자리에서 살아남은 존재의 그림자인가? 영화는 끝내 답하지 않는다. 그는 말할 수 있는 타자였지만, 자기 자신을 말하지 못한 채 유령처럼 퇴장한다. 기억과 시간 속에서 식별되지 않는 잔존으로. 그러나 그 실패 안에서 단 하나, 무엇이 되지 못한 존재들이 남긴 어긋난 흔적만은 진실로 남는다. 바로 그 불완전한 문장, 그 도달하지 못한 고백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남긴 유일한 윤리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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