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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프레시 2025년 3월 월요시네마 <에밀리아 페레즈>에 관하여2025-04-10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포스터 이미지

'에밀리아 페레즈' 포스터.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피프레시 3월 월요시네마 <에밀리아 페레즈>에 관하여...

자유의 몫과 죽음의 값



┃3월 24일 안숭범 영화평론가 발제, 20여 명 열띤 토론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국제영화비평가 ‘줌’ 세미나 열어


국제영화비평가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la Presse Cinématographique. 이하 FIPRESCI/피프레시) 한국지부는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 오후 8~10시, 줌(Zoom)으로 월요 시네마 세미나를 열고 있다. 피프레시는 1930년 전 세계의 전문영화비평가와, 영화기자, 각국의 영화 단체들이 영화문화의 발전을 위해 결성한 단체로, 한국지부는 1994년 창립됐다. 



사회자 : 오늘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사회를 맡은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회장 심영섭입니다. 오늘은 안숭범 영화평론가를 모시고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겠습니다. 안숭범 평론가는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대학 부설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 소장이시기도 하고요. 영화평론가이자 시인이기도 합니다. 제가 좋아했던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하신 바 있으며 영화평론가협회 총무이사,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사무총장도 지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등 여러 영화제에 관여했고, 저서로는 영화평론집 <환멸의 밤과 인간의 새벽> 등이 있습니다.  


발제자 : 안녕하세요. 방금 소개 받은 안숭범입니다. 오늘은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에밀리아 페레즈>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저의 발제에 문학적인 제목을 붙여 봤는데요. ‘자유의 몫과 죽음의 값’이란 제목으로 준비한 발표를 해보겠습니다. 


자크 오디아르는 누구인가

여기에 참여하시는 선생님들이라면, 영화를 사랑하고 저명한 감독과 작품들에 대해서는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을 줄 압니다. 물론 자크 오디아르 감독과 그의 전작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래도 몇몇 사전 정보를 공유하면서 본격적인 발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자크 오디아르 감독은 1952년생으로 벌써 73세입니다. 소르본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아버지가 프랑스 고전 누아르, 범죄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했기에 아버지의 영향을 물려받은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그리고 로만 폴란스키 감독 밑에서 편집 보조 등으로 일을 하면서 영화적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자크 오디아르는 범죄 장르, 그중에서도 누아르 영화의 시청각적 약호화 방식을 잘 활용하면서도 사회적 리얼리즘을 결합한 영화들로 명성을 쌓아왔습니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이미지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최근 그의 작품들 대부분은 유럽 3대 영화제라는 칸, 베니스, 베를린은 물론이고 아카데미 영화제에서도 주요상을 수상했습니다. 프랑스 영화 거장 중에서는 한국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국제적인 지명도 면에서 동시대 프랑스 최고 감독 중 한 명이라고 말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최근 그가 만든 작품 중에서는 서부극의 외피를 입은 작품(<시스터스 브라더스>)을 비롯해 범죄, 누아르 장르 이외에도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시도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필모그래피 전반을 보면, ‘작가주의적인 장르영화’ 또는 ‘장르영화적 작가영화’란 말로 그 성격을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먼저 <에밀리아 페레즈>의 줄거리를 캐릭터의 성격에 기반해 요약적으로 공유해보겠습니다. 이 영화는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 수장이었던 사람(마니타스/에밀리아)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찾아 거듭나는 과정과 그 이후의 삶을 다룹니다. 그의 곁에는 관찰자이자 조력자로 등장하는 흑인 여성 변호사가 있습니다. 많은 관객들이 마니타스/에밀리아에 더 주목하지만, 저는 흑인 여성 변호사 리타의 상징적 위치가 흥미로웠습니다. 그녀가 다루는 법이란, 상식적 차원에서 사회 정의를 지키는 보루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유능하고 야심이 있지만 비윤리적이거나 모순적인 변호를 맡아 성공시켜야 하는 등, 직업적 환멸을 느끼는 상태로 등장합니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이미지2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영화 초반 마니타스는 자기 정체성에 맞는 삶을 실천하기 위해 성전환수술을 감행하고자 결단합니다. 그때 리타에게 도움을 간청하지요.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삶으로 거듭나기 위해 리타의 능력이 필요했던 거지요. 리타의 도움으로 마니타스는 결국 에밀리아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신체로 거듭납니다. 또 사회운동을 위해 ‘라 루세시타’라는 단체를 세웁니다. 그 뜻이 ‘작은 빛’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마니타스가 에밀리아가 된 이후, 그는 폭력으로 점철된 과거와 작별하고, ‘작은 빛’이 되고자 합니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그 비약적인 과정을 관찰자인 리타를 통해 매개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영화의 제작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라종의 소설 <에쿠트>를 원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원작을 보면, 수술을 받고 싶어하는 트렌스젠더 마약상이 등장합니다. 소설에서는 폭력적 전과들에 쫓기던 그가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성전환을 도피적 도구로 삼는 것처럼 나옵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성전환 수술이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결단인 것처럼 그려집니다. 성전환의 성격이 크게 바뀐 셈입니다. 리타가 연기한 변호사도 소설 속에서는 남성 변호사였는데요. 자크 오디아르는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야심찬 여성 변호사로 대체합니다. 영화 첫 장면을 보면, 리타는 백인 남성 변호사가 주문하는 비도덕적•비윤리적 변호 활동을 수행해야 하는 존재로 나옵니다. 아내를 죽인 살인범이지만, 돈과 권력을 가진 그를 무죄로 만드는 변호에 나서고 성공하지요. 백인 남성 변호사의 변론 내용을 모두 그녀가 써준 것으로 나옵니다. 그렇게 그녀는 사회적 성공을 거두기 위해 때로는 자신의 양심을 속여야만 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결과적으로 마니타스도 리타를 통해 삶의 출구를 찾지만, 리타 역시 에밀리아가 된 마니타스의 이후 행보를 도우면서 다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하지요.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이미지3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자 다시 이 영화의 제작 과정에 대한 몇몇 정보를 더 공유하겠습니다. 마니타스/에밀리아를 연기한 스페인 출신 트랜스젠더 배우인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은, 현실에서 코로나 시기 직전 성전환 수술을 한 인물입니다. 잘 알다시피 그는 칸영화제에서 트랜스젠더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받습니다. 영화 시나리오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오디아르 감독은 그와 메일을 주고 받으며 마니타스/에밀리아 캐릭터 구축에 필요한 다양한 정보를 갖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녀는 현실에서 10대 딸과 와이프와 함께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한편 이 영화는 멕시코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멕시코 바깥에서 촬영된 것으로 알려집니다. 압도적으로 스튜디오 촬영이 많고요. 영화가 세상에 나온 이후 배우들의 어색한 억양과 대사 소화 능력을 놓고 비난이 있었습니다. 주연 배우들이 스페인 출신,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이다 보니 멕시코식 스페인어 구사에 실패했다는 지적입니다. 또한 할리우드 등에서 반복 재생산해온 멕시코 갱단 이야기, 마약상 이야기에 대한 클리셰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멕시코시티를 범죄에 얼룩진 이미지로 소비해온 관습에 기대고 있다는 겁니다. 한편 뮤지컬 넘버가 나오는 장면 상당수는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는데요. 그 장면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굉장히 복잡한 리허설을 거친 것으로 느껴집니다. 스테디캠으로 역동적인 장면을 만들어내느라 상당히 고생한 흔적이 있습니다. 또 다른 사실은, 마니타스/에밀리아 캐릭터를 성격화하기 위해 오디아르가 영화의 3분의 1을 밤, 곧 어둠 속에서 촬영했다는 전언입니다. 그런데 오디아르의 전작들 역시 도시의 야경 안에 숨겨진 어두운 뒷골목을 다룹니다. 오디아르는 누아르의 시각적 클리셰를 충분히 활용해왔고 이 작품에서도 이를 연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의 몫 ①- 소외의 가시성

네 이제부터 본격적인 발제에 들어가겠습니다. 첫 번째로 <에밀리아 페레즈>는 자유의 몫, 혹은 자유의 대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주제는 오디아르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디아르는 그동안 수많은 영화에서 흥미로운 캐릭터들을 창조했는데요. 그들 대부분은 범죄 혹은 폭력으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감옥에서 이제 막 출소해서 보호 감찰을 이미 받고 있거나(<내 마음을 읽어 봐>) 지금도 크고작은 범법 행위와 더불어 살아가지요(<예언자>, <러스트 앤 본>, <시스터스 브라더스>). 예를 들어 <러스트 앤 본>의 알리는 아들이 보는 앞에서 상점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고, 그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어린 아들은 아빠의 모습을 그저 받아들입니다. 한편 오디아르 감독이 만든 캐릭터의 또 다른 특징은 장애인들을 주인공으로 활용한다는 거지요. <내 마음을 읽어 봐>의 칼라는 청각장애인이고, <러스트 앤 본>의 스테파니는 다리가 잘리는 사고를 입지요. <시스터스 브라더스>의 찰리도 손이 잘립니다. 그가 많이 다룬 또 다른 캐릭터는 난민입니다. 예를 들어 <디판>의 디판은 스리랑카에서 반군 활동을 하다가 프랑스로 건너 가 난민으로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에밀리아 페레즈>가 다룬 성소수자는 지금까지 언급한 캐릭터들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범법자, 장애인, 난민 등은 사회의 변방으로 밀려나기 일쑤입니다. 주류 사회의 시선에서 편견을 갖기 쉬운 부류입니다. 실제로 여러 영화들에서 그들은 다른 기준의 폭력에 노출되어 왔습니다. 오디아르는 그들이 그런 폭력적 조건 속에서 어떤 의지와 결단을 해나가는가를 지켜보게 하지요.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이미지4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그렇게 오디야르는 자기 구원의 길, 자기실현의 방도를 찾는 인물들로 하여금 ‘자유’의 몫을 견디게 합니다. 그런데 이때 ‘가시성(visibility)’이 그들의 발목을 잡습니다. 미셸 푸코는 “가시성은 함정이다(Visibility is a trap)”라는 말을 합니다. 이때의 가시성은 차별과 편견을 일으키기 쉬운 그들의 ‘타자성’의 문제를 상기시킵니다. 봉준호의 <마더>에서 살인을 저지른 진범인 도준 대신 경찰에 붙들린 종팔은 외모에서부터 장애의 흔적(다운증후군 얼굴)이 역력합니다. 도준에겐 혜자(엄마)가 있지만, 종팔은 보호자조차 없지요. 그가 도준을 대신해서 범죄자의 낙인을 쓰는 과정은 여러 차원에서 ‘가시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당 국가의 정식 구성원으로서 ‘증이 없는 자’인 난민들은 인종적, 민족적 차이에서뿐만 아니라, 제도적 차원에서 명징한 가시성을 부여 받곤 합니다. 장애인은 신체적 차이로 인해, 성수자들 역시 성정체성, 성적 지향성 때문에 가시성의 덫에 붙들리기 마련입니다. 오디아르는 영화 속 인물에게 그런 소외의 흔적을 입힌 후, 지난한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그렇게 보면 마니타스/에밀리아 역시 오디아르가 항상 성찰해 온 ‘소외의 가시성’을 지닌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의 몫 ②- 떠남과 떠돎

‘소외의 가시성’을 가진 오디아르의 인물이 이끌어가는 플롯은 ‘떠남과 떠돎’으로 설명됩니다. 기욤 르 블랑은 『안과 밖: 외국인의 조건』이란 책에서 특정 국가의 제도권 바깥에서 들어와 구성원으로 인준받지 못한 사람들의 실존을 분석합니다. 저는 오디아르 영화의 인물들 중 많은 수가 물리적으로, 또 상징적으로 망명, 이민, 이주의 도전 앞에 선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으면서 오디아르의 최고작 중 하나로 언급되는 <디판>은 프랑스로 망명을 간 스리랑카인을 다룹니다. 실제 이 배우는 16세에서 19세 때까지 스리랑카에서 타밀 반군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영화 속 인물 설정이 현실의 삶을 그대로 끌어안고 있는 셈이지요.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이미지5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에밀리아 페레즈>도 에밀리아를 연기한 스페인 배우가 현실에서 경험한 트랜스젠더 과정을 핍진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 속 에밀리아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망명자(떠나는 자), 이민자(들어온 자), 이주자(떠도는 자)의 표상을 보여줍니다. 디판이 폭력과 차별의 불안을 안고 국경을 넘은 것이라면, 마니타스는 성격이 다른 두려움을 안고 섹슈얼리티와 젠더의 경계를 넘어간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남성적 폭력의 세계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명백한 타자성의 가시화를 각오한 것입니다. 일종의 ‘잘려진 주체’가 되는 거지요. 그들이 들어간 주류 사회 입장에서는 ‘침입한 주체’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에밀리아가 ‘라 루세시타’를 세우고, 아이들과 함께 사는 삶을 꿈꾸는 장면은 내면의 ‘정처’를 찾기 위한 여정으로 보입니다. ‘진짜 정체성’으로 사는 삶에 안착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는 폭력으로 얼룩진 자기 과거를 속죄하듯, 폭력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유골을 찾아 유가족에게 되돌려주고, 유가족을 보호하는 활동 등을 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에밀리아의 자기실현, 곧 자기 구원의 여정이 실패하면서 끝납니다. 그는 새로운 정체성을 입고, 당당하게 양지에서 살기 위해 방송 카메라 앞에도 섭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극악한 폭력을 행사하던 자신의 ‘원죄’를 비약적으로 씻으려는 시도입니다. 이처럼 ‘원죄-속죄’ 구조는 오디아르 영화에서 반복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 마음을 읽어 봐>의 폴도 과거 저지른 범죄(원죄)를 만회하기 위한 과제를 안고 새출발을 하지요. <러스트 앤 본>의 알리도 누나 집에 정착한 이후, 엉망진창으로 살아온 과거를 벗고 사회에 적응하려 합니다. <시스터스 브라더스>의 찰리와 일라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찰리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 아버지를 죽인 것으로 나오고 그들 형제는 복수의 순환 고리, 곧 청부 살인 총잡이의 삶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고민하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들이 다다른 각각의 결말은 뉘앙스가 다 다릅니다. 에밀리아의 경우는 다른 신체로 거듭났다는 것만으로는 폭력적 가해자로서의 원죄를 씻을 수 없었습니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이미지6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저는 리타가 마니타스의 소굴에 납치되어 와서 그들이 처음 대면하는 씬을 굉장히 인상적으로 봤습니다. 그때 리타의 대사를 보면, 마니타스는 유능한 정치인에게 뒷돈을 대면서 자기 폭력을 정당화했고, 그렇게 정적을 제거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에밀리아가 된 이후에도 그는 마니타스 시절에 행했던 폭력을 정당화하는 방식과 절연하지 못합니다. 아내 제시가 그의 곁을 떠나려고 할 때, 그가 행사한 폭력은 그것을 방증합니다. 괜찮은 명분을 가진 사회운동을 하면서도 부정부패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고위 관료와 정치인들의 돈을 뜯어내는 방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멕시코시티의 거리를 메운 에밀리아의 장례식 행렬을 보면서 두 가지 이론이 적용 가능한가를 생각해 봤습니다. 하나는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입니다. 모방 욕망에 의해서 점증한 공동체의 폭력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트렌스젠더 에밀리아가 희생양으로 도구화된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지젝의 폭력론인데요. 우리가 일상에서 더 자주 보는 가시적인 폭력을 그는 ‘주관적 폭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젝은 객관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이 개인과 공동체 배면에 은밀하고 강력한 힘을 행사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저는 오디아르가 할리우드 범죄 영화나 HBO 드라마 등에서 익숙하게 차용해온 멕시코 마약상 이미지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이를테면 <에밀리아 페레즈>는 범죄와 부정부패로 얼룩진 멕시코 사회의 이미지를 재생산하며 서사를 끌고 갑니다. 그래서 마니타스는 에밀리아가 되었음에도 개인적인 자신의 ‘원죄’가 뿌리내려 있는 구조적인 폭력의 자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겁니다. 물론 이런 해석은 에밀리아의 개인적 폭력을 무마해주고픈 정서와 타협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역시 완벽한 분석이라거나 합리적인 해석이라고 말하기엔 주저됩니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이미지7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여튼 <에밀리아 페레즈>의 마지막 귀결점은 최근 오디아르 영화의 흐름과는 조금 다릅니다. <디판>의 디판은 가족을 모두 잃고서 스리랑카의 전장을 떠납니다. 그런 반인륜적인 폭력을 피해 프랑스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그는 다시 마약 갱단의 본거지에서 총을 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립니다. 그는 폭력을 피하고자 이름도 바꾸고, 브로커를 통해 가족도 아닌 이들과 가족인 것처럼 꾸며서 프랑스에 정착하려 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디판>의 마지막 씬은, 함께 국경을 넘은 가짜 가족과 진정한 가족을 형성하면서 새로운 삶이 가능하리라는 전망을 낳습니다. <시스터스 브라더스>의 마지막 장면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살인이 펼쳐지던 황량한 광야를 뒤로 하고, 그들은 엄마가 기다리는 평원 위 고향집으로 되돌아 갑니다. 남성적 폭력의 세계와 결별하고, 폭력을 일삼던 아빠가 이제 없는, 엄마의 품으로 들어가지요. 그들의 성이 ‘시스터스’라는 점에서 그 집은 엄마와 자매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때문에 에밀리아가 죽고 사라지는 결말은 최근 오디아르 영화에서 예외적입니다. 사실 에밀리아는 두 가지 폭력으로부터 ‘떠남’을 실천해야 하는 숙제가 있었습니다. 먼저 무관심과 권위에 찌든 아버지, 남편의 위치에서 떠나야 합니다. 또한 마약 갱단 두목으로서 살아온 사회적 위치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첫 번째 ‘떠남’을 완성하기 위해 그는 고모의 이미지로 아내 제시와 아이들을 불러들여 사랑 많고 친절한 가족구성원이 되려 합니다. 두 번째 ‘떠남’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라 루세시타를 통해 사회에 ‘작은 빛’이 되는 공헌 활동을 하려 합니다. 개인적•사회적 속죄를 통해 자기 구원에 도달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구조적 폭력이 세계 내에서 과거의 폭력적 수단을 답습하며 절망으로 침잠합니다. 떠돎을 끝낼 수 있는 정처를 끝내 찾지 못한 것입니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이미지8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죽음의 값- 그 이후의 구원에 대하여 

이제 <에밀리아 페레즈>의 장르 영화로서 특징과 서사적 개성을 살펴보겠습니다. 리처드 다이어를 비록해 많은 장르 이론가들이 뮤지컬이나 웨스턴 등이 미국적 장르라는 것을 논증하지요. 그리 대단한 발견이나 어려운 주장은 아닙니다. <에밀리아 페레즈>도 외관상 할리우드 뮤지컬 장르의 문법을 준용한 듯 보입니다. 주인공이 처해 있는 현실과 내적 환상을 착종시키면서 갈등의 봉합 지점을 끊임없이 찾지요. 넘버들은 현실과 환상이 교차되는 자리에서 낭만적인 결말에 이를 수 있을지를 타진하는 목소리를 담아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영화의 장르를 신체에 대한 은유로 풀어보면, 뼈는 필름 누아르인 것 같아요. 이미 언급했듯이 누아르는 오디아르가 가장 잘 다뤄 온 장르입니다. 인물의 모순성과 이중성을 드러내기 위해 강렬한 콘트라스트를 사용하고, 과장적 광원을 통해 빛과 어둠의 세계를 극명하게 구분합니다. 선악이 모호한 세계에서 회색 윤리에 젖은 인물들의 분투를 다룬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살은 멜로드라마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이 영화는 리타와 마니타스/에밀리아의 내면에 고이는 감정의 맥락을 보여주는 데 굉장히 공을 들입니다. 사랑과 희생 사이에서 사적 선택을 하는 장면이 인상적인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관객이 직접적으로 느끼는 이 영화의 피부에 해당하는 장르는 텔레노벨라와 뮤지컬입니다. 가족, 계급, 젠더 문제가 교차하는 장에서 극단적인 긴장을 낳는 사건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사회적 메시지도 확연하지요. 서사적 진행 과정은 여러 텔레노벨라를 섞어 놓은 듯한 느낌도 줍니다. 물론 이 영화는 뮤지컬 영화의 특징을 안정적으로 수렴합니다. 리타, 에밀리아, 제시의 노래들은 그들의 심리와 의지가 확장된 세계를 불러옵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문제 해결이나 낭만적인 봉합의 순간을 기대하게 하면서 안정적인 관습을 따라가지요.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이미지9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이제 뮤지컬의 관습 안에서 이 영화의 성격을 말해보겠습니다. 뮤지컬 영화의 주인공은 대개 드리머(Dreamer)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끝은, 드리머에게 긍정적 삶의 전망을 선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관찰자, 곧 리타에게 과제를 남기면서 끝나지요. 저는 이 대목에서 <에밀리아 페레즈>가 평범한 뮤지컬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장르주의적 작가영화’, 혹은 ‘작가주의적 장르영화’답게 전형적 캐릭터에서 벗어난 인물을 통해 재미의화를 하는 전략을 씁니다. 반복하자면, 리타는 구조적 폭력이 난무하는 멕시코에서 양심에 어긋나는 변호 활동도 해왔습니다. 그는 자기 입장을 비판적으로 반성하면서도, 돈도 벌고 더 유능해지고 싶은 욕망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리타가 마니타스를 처음 마주치는 장면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CCTV 카메라로 관음하는 듯한 쇼트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강렬한 감정을 자아내는 클로즈업 쇼트들이 계속 틈입하면서 진행됩니다. 마니타스의 내면에 역동하는 새 삶의 의지를 보여주죠. 그의 클로즈업된 눈은 애원과 압박이 공존합니다. 반쯤 벌린 입 안에서 번뜩이는 이빨은 그가 살아온 폭력의 세계와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진심을 동시에 웅변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비좁은 공간이 마니타스뿐만 아니라 리타가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지 실험되는 ‘고래의 뱃속’과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일차적으로, 리타는 밀폐된 공간에서 극악한 마약상 두목, 곧 기이한 드리머의 꿈을 실현시키는 도구가 될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한편으로는, 부당하게 악용될 수도 있는 법이 아닌, 자신의 순수한 의지와 선택으로 한 인간을 변호하고 구원할 수 있는지를 고심하게 됩니다. 그 씬에서 관찰자인 리타 역시 현실적인 자기 구원의 출구를 찾는 인물이란 게 짐작됩니다. 영화 말미, 리타가 부모 없이 남겨진 에밀리아의 아이들을 포옹하며 “이제 나랑 살자”고 할 때, 그 장면은 타인에 대한 책임적 포용과 환대의 제스처를 보여줍니다. 리타는 에밀리아가 끝내 살아내지 못한 어떤 ‘더 나은 삶’을 소명으로 물려받은 것이지요. 뮤지컬 장르의 전형적 캐릭터에서 벗어난 그는, 관객을 대리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 때문에 리타의 마지막 종착점은 오디아르의 관객을 향한 종국적인 메시지를 유추하게 합니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이미지10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디아르는 엔딩씬 에밀리아의 장례 행렬 중 군중의 한 명으로 우리를 위치시킨다고 말이죠. 장례 행렬 중에는 에밀리아가 라 루세시타를 운영하면서 만나 사랑을 느낀 플로레스도 있습니다. 성격은 다르지만, 그녀 역시 리타와 함께 죽은 에밀리아를 대신해서 숙제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오디아르가 관객에게 주문한 것은, 에밀리아의 죽음의 값을 성찰하라는 겁니다. ‘그(죽음) 이후의 구원’이 우리 각자의 소명이제 과제인 겁니다.


질문, 그리고 질문의 질문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해명되지 않는 틈새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저는 이 영화가 오디아르의 전작들보다 서사적 틈새가 좀 많다고 느꼈습니다. 서사적인 연결이 약간 느슨하고 많이 단속적이에요. <에밀리아 페레즈>는 로드 무비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포함해 그의 일부 영화들은 도시, 공간, 장소명으로 단락을 이루며 진행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물들의 ‘떠남’과 ‘떠돎’을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에밀리아 페레즈>도 여러 국가, 도시명을 붙여가며 진행됩니다. 그런데 장소가 전환되는 어떤 순간에 인과적 맥락이 잘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전환에 성공한 에밀리아는, 제시와 아이들을 멕시코시티로 불러들이려 합니다. 리타가 제시에게 가서 먼 친척 고모가 잘 챙겨줄 거라고 하면서 제시를 설득하지요. 그런데 제시 입장에서 보면, 남편은 이미 죽었고, 멕시코시티의 폭력적 위험은 여전하다고 느낄 것 같습니다. 이미 미국에 안착해서 아이들과 살고 있는데, 알지 못하는 죽은 남편 친척의 부름에 쉬이 응할 수 있을까요? 멕시코시티로 쉽게 삶의 거처를 옮길 수 있었을까요? 제시는 남편의 죽음 직후 평생 쓸 돈이 저축되어 있는 스위스 로잔으로 갈 때에도 “내가 왜 거기에서 살아야 돼 나는 미국에 있는 언니 집에 갈 거야.”라고 말하면서 저항감이 컸거든요.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이미지11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또 다른 틈새는, 에밀리아 주변의 누구도 마니타스였던 에밀리아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는 성전환 이후에도 외모가 비슷할 수밖에 없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에밀리아는 성전환 이후에도 수하에 폭력을 동원할 수 있는 이들을 가까이에 두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기존 환경을 완전히 등진 게 아니라면, 완벽한 제2의 인생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낭만과 환상을 허용하는 뮤지컬 영화가 주문하는 태도일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다소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에피파니아 플로레스라는 캐릭터가 다소 도구적으로만 이용되고 끝났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저는 이 캐릭터가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플로레스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 항상 폭력에 시달린 것처럼 나옵니다. 그래서 남편 실종 이후 수년 동안 오히려 안도하면서 살아왔지요. 라 루세시타가 남편을 찾았다고 말했을 때, 플로레스는 칼을 준비하고 갑니다. 혹시 남편이 살아 돌아왔으면 죽이려는 심산이었죠. 저는 그때 플로레스에게 남편의 자리가 제시와 부부로 살던 시절 마니타스의 자리라 느꼈습니다. 그래서 에밀리아가 플로레스에게 연민을 느끼면서 그녀를 끌어안아 줄 때, ‘과거에 대한 속죄’와 ‘미래에 대한 약속’이 공존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플로레스는 곧 영화에서 소략적으로 지워지고, 이후 장례식 행렬 때 등장합니다. 상징성에 비해 이 캐릭터가 도구적으로 소모되었다는 느낌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이것으로 오늘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긴 발제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이미지12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 Q&A > 


사회자 : 오늘 발표 감사합니다. 자크 오디아르의 영화세계를 기호로 읽는다면, 경계 짓기의 불가능성을 다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에밀리아 페레즈>에서 여성과 남성, 폭력적인 두목과 평화주의자, 이성애와 동성애는 한 사람의 몸 안에 다층적 정체성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안숭범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일종의 디아스포라도 이 감독의 주제이지요. 에밀리아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이는 <디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지난한 과정을 통해 결국 주인공은 어떤 각성 상태에 들어가지요. 


이때 정말 중요한 것이 ‘뼈’인 것 같습니다. 자크 오디아르 영화는 신체성이 중요합니다. 내면의 변화를 일으키는 ‘육체의 흔적’을 명확히 보여주지요. 우리가 감정을 ‘마음’ 속에서 느낀다고 생각하지만, 오디아르는 그것을 몸으로 말합니다. ‘뼈’는 그중에서도 존재의 본질, 기초 구조, 또는 깊은 고통을 상징합니다. <러스트 앤 본>에서 마리옹 꼬띠아르는 고래 사고로 다리를 잃고, 뼈를 잘라내야 합니다.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은 제목부터 신체 기관이고, 주인공은 피아노를 연주하며 손, 근육, 뼈대를 의식적으로 조율하죠. 범죄와 예술 사이의 갈등이 육체적 긴장으로 드러납니다. <예언자>에서는 감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을 단련하고, 상처를 입고, 뼈가 부러지며, 그 과정에서 인간이 형성돼요. 그리고 <에밀리아 페레즈>에서는 육체의 재구성과 재탄생을 직접적으로 다룹니다. 뼈대마저 바뀌는 대변화를 통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권리를 물어보죠. 그처럼 오디아르에게 정체성은 정신이 아니라 몸을 통해 구축되는 것이고, 뼈는 가시적이지 않지만 존재의 구조를 떠받치는 것이죠. 뼈는 단순한 신체 부위가 아니라 존재론적 선언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오디아르의 인물들은 살이 아닌 뼈로 기억하고, 뼈로 고통을 겪으며, 뼈로 다시 태어납니다. 제 감상은 여기까지이고요. 안숭범 교수님께 묻고 싶은 건, 오디아르의 영화들은 관객의 감정을 깊게 자극하는데요? 이를 신파로 봐야 할까요? 그의 이야기 구성과 캐릭터의 구성 방식이 궁금합니다.


발제자 : 오디아르의 영화는 <에밀리아 페레즈>뿐만 아니라 서사적 쾌감, 극적 쾌감이 있습니다. <러스트 앤 본> 속 알리는 수많은 폭력을 저질러 왔고 지금도 뒷골목에서 불법 복싱 게임을 통해 돈을 버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점점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감정을 주기 시작합니다. 그는 다리가 절단된 돌고래 조련사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아들에 대한 애정도 깊어집니다. 영화 말미, 아들과 겨울 호수 위에서 놀다가 아들이 사고로 얼음 호수 아래로 잠겨 버립니다. 그때 얼어붙은 수면 아래에 기절해 있는 아들을 발견하고 주먹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얼음을 내려치죠. 불법적으로 주먹을 휘둘러 온 알리였는데, 이때의 주먹질은 명백히 사랑을 위한 필사의 희생입니다. 그때 그런 대사가 나옵니다. 인간의 손에는 뼈가 27개 있는데, 그들 뼈가 한번 부서지면 완치될 수 없고 펀치를 날릴 때마다 깨진 유리 조각처럼 찔러 오는 통증을 견뎌야 한다는 거죠. 이는 명백하게 폭력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경유해 자기 구원의 희망에 다가가는 알리에 대한 해석을 가능케 합니다. 이처럼 오디아르의 영화는 노스럽 프라이가 말한 봄의 플롯, 곧 상승하고 고양되는 전철을 밟는 플롯의 쾌감을 절절하게 전달합니다.  


사실 대중적인 선호도가 높은 이야기라면, 중요한 전환점으로서 결절점(node)을 잘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에밀리아 페레즈>의 경우에는 그 지점에 넘버가 배치되어 있고, 인물 내면의 혼란과 고통, 의지와 희망이 강렬하게 드러납니다. 저는 그런 중요한 결절점에서 서사가 관객의 기대와 예측에 부합하게 흘러가는 경우와 예측을 빗나가거나 완전히 역전되는 경우(반전)의 비율이 7 대 3, 8 대 2 정도일 때 대중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자크 오디아르는 동시대 프랑스 거장들 중에서 대중적 호흡이 가장 좋은 감독 중 한 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참가자 1 : 저는 이 영화가 대중이 가진 강한 욕망을 반영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안숭범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에밀리아가 성전환수술을 한 후, 멕시코로 돌아왔을 때, 누군가는 알아볼 만한데도 알아채는 사람이 없었다는 허술함이 있긴 하지만 그런 의심을 일부러 누를 만큼 서사의 매력이 강했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서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고 싶은 욕망이 있잖아요. 그런데 에밀리아는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는 욕망이 강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에밀리아는 성정체성을 바꾼 후에도 아빠의 위치를 절대로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아요. 사회사업을 하는 것도 정의를 실현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잘못된 과거를 씻어내고, 사회적인 존경까지 받고 싶어 하는 욕망으로 보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했기 때문에, 결코 좋은 결말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게 만듭니다. 


그리고 멕시코 사회의 저명인사를 초대한 파티에서 리타가 빨간색 수트를 입고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때 리타는 부패한 상류층 인사들을 비난하며 통쾌한 감정을 줍니다. 영화 <조커>에서 빨간색 양복을 입은 조커가 등장하는 유명한 계단씬처럼 관객을 매혹시킵니다. 마지막 장면인 에밀리아의 장례식에서 에밀리아를 우상시하는 것도 어쩌면 멕시코 사회에 대한 비난 섞인 풍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에밀리아는 자신의 동기가 어찌 됐든, 결국 사람들을 돕는 이로운 일을 했기 때문에 그런 대우를 받은 것이니까요. 그렇게 에밀리아를 향한 대중의 입장은 부패한 상류층에 대한 입장과 대별됩니다. 


사회자 : 저는 <에밀리아 페레즈>가 한 개인의 욕망에 주목하는 게 아니라고 봅니다. 자크 오디아르 특유의 스타일답게, 사회적 맥락 속에서 변모하는 복합적인 욕망의 층위를 보여주죠. 미셸 푸코의 관점에서 보면, 에밀리아의 몸은 이전에는 권력의 장이었으나 트렌스젠더 수술 후 에밀리아의 몸은 더 이상 국가나 조직, 이성 중심 권력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구성한 주체로 변모합니다. 푸코식으로 말하면, 신체는 권력이 통과하는 통로지만, 동시에 저항의 장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또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적 관점에서 보면, 에밀리아는 젠더 수행의 혁명가죠 그의 ‘성전환’은 젠더 규범을 해체하고 다시 구성하는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어요. 에밀리아는 여성으로서 살아가며, 모성애와 관계적 돌봄, 정서적 연결을 실천해요. 그녀는 기존의 ‘여성성’을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여성성의 형식을 창조해요. 버틀러의 이론처럼, 젠더는 본질이 아니라 행위와 반복, 선택의 집합체임을 보여주죠. 


마지막으로 에밀리아는 타자의 욕망을 넘어서려는 주체로 등장합니다. 마니타스 시절, 그는 타자가 원하는 ‘남성성’(권력, 폭력, 지배)을 수행했어요. 라캉의 관점에서 보면 ‘타자의 욕망’, 타자가 자신에게 기대하는 욕망을 수행했습니다. 에밀리아는 이제 그 시선을 거부하고, 자신이 진짜로 욕망하는 자리를 차지하려고 해요. 그러나 욕망은 항상 결핍을 전제로 한다는 라캉의 말처럼, 에밀리아의 욕망은 완성되지 않고 계속 ‘되돌아오는’ 거죠. 이러한 면에서 에밀리아를 단순히 자기중심적인 욕망의 덩어리로 봐선 안 된다고 봅니다. 폭력이 횡행하는 멕시코 사회의 맥락안에서 매우 다층적인 주체성을 보여주고 있는 흥미로운 캐릭터라고 봅니다  


발제자 : 네. 그런 해석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수많은 할리우드 범죄 영화에서 재생산되어 온 멕시코 이미지, 특히 멕시코 마약상 두목의 이미지를 가져온 것도 영리한 전략일 수 있지요. 에밀리아는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진 않지만, 자기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폭력적 수단을 방치하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그녀는 스스로 폭력으로부터 멀어졌다고 믿지만, 시스템 안에서는 여전히 폭력의 수행과 운동에 일조하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마니타스에서 에밀리아로 외피를 바꾸었지만, 그를 둘러싼 폭력의 구조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고, 어쩌면 더 교묘해졌다는 점에서, 폭력성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판단도 가능성 있는 해석이라고 봅니다.


참가자 2 : 네 저 역시 이 영화가 멕시코와 멕시코인에 대한 일정한 스테레오타입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데 주목합니다. 그런데 저는 오디아르 감독이 의도적으로 이러한 스테레오타입을 전유하고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마니타스/에밀리아의 자기실현 과정에서 라틴 아메리카 문화, 히스패닉 여성의 연대성 등을 부각시키기 위해 그런 포석을 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한편 마니티스가 성전환 수술로 트랜스젠더가 된 이후, 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그의 남성성이 부각되는 것 같았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과 부인 제시에 대한 소유욕과 지배욕이 다시 꿈틀대지요. 멕시코에서 폭력 사건의 가해자들을 응징하고 피해자들을 돕는 운동을 할 때, 특히 공익단체 라 루세시타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그런 권력욕과 사적 의도가 두드러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안교수님이 가시성을 언급하시면서 인용한 푸코의 "가시성은 함정이다"는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마니타스와 에밀리아 페레즈가 수행하고 있는 퍼포먼스의 가시성과 그 이면에 내재한 전복적인 비가시성을 동시에 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첨언하면 리타와 페레즈는 서로의 자기실현을 돕는 공모자인 것 같습니다. 안교수님이 말씀하셨듯이, 관찰자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리타가 ‘희미한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영화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요.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영화는 들뢰즈가 말하는 ‘보는 자(seer)’의 영화로서의 현대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에밀리아 페레즈>는 주인공의 지난한 자아실현을 과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폐쇄된 시스템에서 소진되는 그를 지켜보게 하는 영화입니다. 남겨진 에밀리아의 아이들과 새 삶을 약속하는 관찰자 리타에게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찾게 하는 영화인 것 같습니다.


참가자 3 : 도입부와 마무리에서 폐가전을 모은다는 소리가 배경에 깔립니다. 이 역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쓸모가 다한 폐가전이 다시 쓸모를 찾는 것처럼 세상의 잉여처럼 보였던 마니타스도 에밀리아로 변할 수 있다는 것, 곧 새로운 쓸모로 거듭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주제를 암시하는 내용이 시작과 끝에 있는 셈이지요.  


참가자 4 : 저는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고, 응당 받아야 할 주목을 더 받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트랜스젠더 에밀리아 페레즈의 비극적인 결말을 암시하듯, 그를 연기한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의 인종차별적 발언들과 거친 언사들은 영화가 더 빛을 볼 기회를 차단한 것 같아요. 가스콘의 소셜 미디어 등에서의 발언 등이 공개되자, 북미 배급사인 넷플릭스는 가스콘에 대한 홍보를 중단했고,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여우조연상과 주제가상 등 2개 부문 수상에 그치지 않았습니까? 영화 외적인 부분이 영화 안의 메시지와 충돌하면서 영화 속 인물에 대한 입체적 해석을 반감시킨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사회자 : 오늘 열띤 시간을 보냈는데요. 이제 마무리해야 할 시간입니다. 참가하신 분들 중 오디아르의 <파리 13구>를 보지 않으신 분들이 있다면, 적극 추천합니다. 오디아르의 다른 영화들이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의 느와르 작품에 대한 존경이라면, <파리 13구>는 에릭 로메르의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에 대한 오마주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 영화의 자장 안에서 자크 오디아르 감독은 여전히 프랑스 영화의 다양한 층위를 탐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상담을 하다 보면 자기로부터 해방을 꿈꾸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심지어 피를 흘리고 살을 찢으며 뼈를 분지르기도 하지요. 오늘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를 통해 치열하게 자기로부터 해방을 꿈꾸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난 것 같습니다. 3월 월요 시네마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달에는 정문영 계명대학교 영문학과 명예교수님이 <콘클라베>를 발제해주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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