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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프레시 2025년 2월 월요시네마 : <브루탈리스트>에 관하여2025-04-09
영화 <브루탈리스트> 포스터 이미지

'브루탈리스트' 포스터. 사진 제공=유니버설 픽쳐스



피프레시 2월 월요시네마 : <브루탈리스트>에 관하여



2월 24일 정재형 평론가 발제, 20여 명 열띤 토론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영화평론가 ‘줌’ 세미나 열어


국제영화비평가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la Presse Cinématographique. 이하 FIPRESCI/피프레시) 한국지부는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 오후 8~10시, 줌(Zoom)으로 월요 시네마 세미나를 열고 있다. 지난 2월 24일 정재형 영화평론가가 브래디 코베 감독의 <브루탈리스트>에 대해 발제한 뒤 참가자들이 총 2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이번 줌 세미나에는 20여 명이 참여했다. 피프레시는 1930년 전 세계의 전문영화비평가와, 영화기자, 각국의 영화 단체들이 영화문화의 발전을 위해 결성한 단체로, 한국지부의 경우 1994년 창립됐다. 



사회자: 선생님들 안녕하세요. 오늘 피프레시가 주최하는 월요시네마 바로 <브루탈리스트>를 갖고 정재형 교수님이 발표를 해 주시겠습니다.


발제자: 안녕하십니까? 정재형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인간 중심주의를 비판한 시각으로 봤어요. 인간 중심주의는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고 또 인간과 사물을 나누죠. 인간 중심주의는 인종, 계급, 젠더로 차별하고 또다시 중심과 주변의 차별을 만들어내거든요. 나치가 인종 우월주의를 통해서 유대인을 학살했듯이, 미국에서는 계급을 통한 차별이 행해지죠. 라즐로는 헝가리에서 나치에게 당하다가, 미국에 와서 또 계급 차별을 받죠.인간 드라마긴 하지만 라즐로는 건물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죠. 그의 영혼은 건물에 들어가 있고 건물은 그의 노력에 의해서 스스로 행동한다고 봅니다. 그하고 건물의 관계는 종속적인 게 아니에요. 인간이 물질을 지배하는 관계가 아니라 인간이 건물 안에 들어갔어요. 수평적인 관계를 형성해요. 그가 건물을 만드는 게 아니에요. 그의 혼이 움직이고 건물이 실행하는 거예요. 건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존재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는 자신의 제단을 쌓는다는 대사가 나오죠. 그와 건물은 동격화되어 있어요.


영화의 중심, 건축물

사물 중심적으로 읽을 때 건축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건축 중심적으로 본다면 라슬로가 미국에 도착해서 해리슨을 만나기 전까지는 전사(prehistory)에 해당하는 거예요. 이후 센터가 구상이 되잖아요. 그다음에 센터가 중단되고 마지막에 재평가되는 이런 이야기를 갖고 있어요. 건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전사가 있고, 구상이 되고, 구축이 되고, 중단되고, 다시 부활하는 건물의 이야기인 거예요. 다섯 단계를 거쳐 센터의 변신과 센터의 탄생과 영생의 주제를 갖는 거예요. 어머니를 위한 추모 공간이었다가 기독교인을 위한 시민 공간이 되었다가 그렇게 구상돼서 건축이 됐죠. 그러다가 중단되면서 결국은 나치 수용소를 경험한 희생자의 추모 공간으로 바뀌게 되는 거예요. 이 건축 공간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아요. 그 정체성은 과정 속에서 변화되고 계속 의미가 수정되어 간다라는 그런 존재론을 느낄 수가 있어요. 건축물은 인간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그런 수단이 아니라는 거예요. 건축가가 자기 우월성을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는 거예요. 오히려 인간과 공생하면서 그 관계 속에서 창의적인 의미를 교환하는, 인간과 대등한 비인간이라는 거죠. 다시 말하면 인간이 아닌 사물이 인간과 동등하다는 거죠. 그렇게 건축의 의미가 변한다면 건축이라는 사물 자체가 인간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라는 거예요. 인간이 사물에게 관계 맺기 위해서 다가왔다고 볼 수 있어요. 사물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다가온 거지 인간이 사물을 끌어와서 인간의 의견을 발표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사물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자기한테 온 거예요.자연속에 돌들과 철제들이 있었겠죠. 인간들이 온 거예요. 해리슨이 건축물을 욕망했고 라즐로와 함께 물질에게 다가 온 거예요.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이미지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사진 제공=유니버설 픽쳐스


건물의 잠재성

철학자 들뢰즈가 말한 잠재성이죠.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현실화됐다고 보는 거예요.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죠. 거대한 원석을 보면 그 안에 이미 작품이 깨고 일어나려는 욕망이 보인다. 그래서 자기는 그를 억누르고 있는 주변을 쪼아내서 그를 해방시킨다,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자연속에 이미 센터가 있었던 거예요. 돌과 철제 사이에서 뭔가 어떤 형태가 있었던 거예요. 인간이 물질에게 다가와서 해방시켜준 거죠. 그걸 관계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관계가 중요한 거지 사물의 정체성이나 누가 만들었다는 인간의 우월성은 중요하지 않아요. 라슬로가 만들었다고 보는 순간 인간 중심주의가 되죠. 

인간과 물질의 동등한 개념은 전이(transpostion), 즉 위치를 바꾼다라는 거죠. 포스트휴먼철학자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의 용어지만 들뢰즈 용어로는 ‘–되기’입니다. 모든 모든 사물이나 생명은 한순간에도 자기 존재로 자기의 정체성대로 남아 있는 경우는 없어요. 끊임없이 ‘-되기’를 하는 거죠. 영화속 건축물의 의미가 변형되고 적응돼서 새로운 의미로 변했잖아요.유목적 주체라고 합니다. 주체는 유목민처럼 한시도 고정돼 있지 않다. 라즐로의 삶도 계속 유목적 주체잖아요. 헝가리에서 살다가 미국으로 갔고 미국에 사는 헝가리계 유대인 그의 정체성이 뭘까요? 그에게 고정된 정체성을 질문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유목적 주체

어머니를 위한 센터를 해리슨이 기획했다고 해서 끝까지 어머니를 위한 센터로 남지는 않았죠. 그것을 전이라고 얘기를 했는데 인간인 라즐로에게도 적용이 되죠. 젠더적으로 남성이지만 여성적이에요. 아내인 엘리사벳하고 비교하면 양성성(androgyny)을 갖고 있어요. 엘리사벳이 더 행동적이고 남성성인 것처럼 보여요. 능동성을 남성성이라고 얘기하고 수동성을 여성성이라고 얘기한다면 둘다 양성성이죠. 이분법적인 젠더 정체성으론 설명이 안 되죠. 그냥 계속 변화되는 거예요. 영화의 처음에 라즐로가 창녀를 만나는 장면이 있어요. 씨네 21에 ‘건축가의 눈으로 본 영화 <브루탈리스트> 아름다움을 팝니다’라는 제목의 평론에 이런 귀절이 나와요. “영화 <브루탈리스트>에는 미국에 도착한 이민자 라즐로 토스가 매춘부를 품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상하게 이 장면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 이유는 매춘부보다 라즐로의 몸을 전시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매춘부의 머리 위로 라즐러의 조각상 같은 몸을 보여주고 있다. 누가 몸을 파는 것인지 다소 모호하게 느껴졌다.” 


장면을 보면 창녀가 몸을 팔고 전시를 해야 되는데 오히려 라즐로가 웃통을 다 벗고 있고 여자가 그걸 더듬는 거예요. 마치 구매자가 여성이고 라즐로는 남창같이 보여지는 거죠. 이 글을 쓴 건축가는 종래의 남성우월적인 시각에서 봤을 때 이 장면은 정말 이상한 느낌이라는 것을 고백하죠.전 이 장면이 바로 라슬로의 유목적 주체를 설명하는 대목이라고 보는 겁니다. 라슬로는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이지만 여성‘-되기’의 모습이라 볼 수 있죠. 여성성을 더 많이 가지려고 노력하거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여성‘-되기’의 과정으로 변형됐다고 보이거든요. 종래의 남성 주체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여성‘-되기’로 변신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나아가서는 여성-되기 뿐 아니라 라즐로의 건축물-되기가 보여지죠. 사물이 되고자 하는 사물‘-되기’가 보여지는 거예요. ‘-되기’의 과정 그게 바로 모든 존재의 생성 변화 과정이라고 봅니다. 생성 철학에서는 환원론으로 설명을 할 수가 있는 거죠.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이미지2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사진 제공=유니버설 픽쳐스


그의 존재라는 게 건축물로 남고 건축물은 철근과 콘크리트고 그거는 뭐예요? 자연으로 귀속되는 거죠. 환원되는 거예요. 라즐로의 건축은 인공이 아니라 자연을 구현했다,라고 얘기하죠. 그게 바로 거친 콘크리트고 브루탈리즘이라는 건축 사조가 거기서 나온 거거든요.그의 삶은 자연으로 환원이 되는 거예요. 그 사람이 그러한 브루탈리즘 콘크리트 건축, 자연과 닮은 건축을 했다,라는 거는 그의 삶 자체가 자연으로 환원되고 그와 자연은 하나고 자연에서 나와서 잠시 문명에 머물렀지만 다시 자연으로 환원된다,라는 환원론으로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거죠.


사물간의 관계성센터를 헤리슨이 기획했다가 헤리슨이 중단시켰다고 보면 인간 중심주의적인 시각입니다. 센타는 해리슨의 욕망을 달성시키기 위한 수단이고 인간의 정신이 물질을 지배한다는 발상이죠. 물질은 도구다, 이렇게만 생각하는 사고에서 나오는 거예요. 근데 센터의 설계는 사실 라슬로가 한 거잖아요. 그리고 재정의 상당수는 어디서 나왔어요? 시에서 나온 거예요. 시에서 나온 돈은 누가 낸 거예요? 시민들이 낸 거예요? 그렇죠. 공사는 누가 했어요? 노동자들이 했어요. 그리고 재료는 뭐예요? 콘크리트 철근 기타 등등. 그것만 있나요? 날씨도 있고요. 기온도 있고요. 땅과 모든 요소들의 합작품이에요.부뤼노 라투르(Bruno Latour)같은 철학자가 말하는 관계성이라는 거죠. 인간과 인간관계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사물과의 관계도 다 동등하다는 것. 라즐로의 정체성은 그와 관계를 맺은 모든 관계성으로 설명을 해야 돼요. 그의 아내 엘리자벳, 조카 조피아, 친구 아틸라, 미국에 사는 유태계 헝가리 이주민들, 흑인 고든과 같은 노동자들, 해리슨과 그의 가족, 사교계 인물들, 이런 모든 관계 속에서 형성된 인물이 바로 라즐로라는 사람인 거예요. 


그의 정체성인 거예요. 이들의 비중은 다 같아요. 도나 해러웨이(Donna Harraway)의 사이보그(Cyborg)론으로 보면 모든 사람은 다 기본적으로 인조 합성물이라는 거죠. 인간이 비인간, 즉 사물과 같이 일심동체가 돼 있다는 거예요. 엘리자벳은 휠체어를 탄 채 등장하고, 라즐로도 나중에 휠체어를 타죠. 휠체어는 안경하고 똑같은 거예요. 인간과 분리할 수 없는 사물인 거죠. 사이보그 인간이라는 말이 타당함을 증명해주죠. 휠체어에 탄 인물은 이 영화의 주제를 나타내는 은유일 수 있어요. 이걸 조금 더 설명하면 사물 권력(thing power)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설명을 해볼 수 있어요.사물 자체가 이미 권력을 갖고 있다는 말이죠. 인간이 권력을 갖고 있듯이 사물도 권력을 갖고 있다는 거죠. 센터의 권위나 라슬로가 건축가로 누리는 권위나 똑같다는 거죠.주체와 타자의 이분법이 아니라 다 객체라는 거예요. 인간도 사물도 객체로 불러야 된다고 얘기를 하죠. 주체와  타자의 이분법 대신 공생주의, 서로 같이 살아가야 된다라는 것을 통해서 평화를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해리스와 라즐로를 평평한 존재로 간주합니다. 평평한 존재론입니다. 주인이 노예를 시켜서 건축했다고 생각해도 되지만, 객체와 객체가 만나서 건축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이미지3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사진 제공=유니버설 픽쳐스



인간과 비인간의 공생관계

마지막에 라즐로가 휠체어에 의존하는 모습은 인간의 신체가 태어날 때부터 완성된 것이 아니라 계속 완성되어 간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죠. 그렇게 보면 인간이 늙거나 병들어서 장애가 되는 것도 불행한 일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물과 공생하면서 계속 진화되어가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죠. 인간이 피부로 완성되었다는 말을 부정됩니다. 피부 조직은 맨 말단 조직이고 그래서 완성되었다고 표현하는데 그건 잘못된 표현이라는 거예요. 인간은 많은 보조 비인간들과 같이 한 몸이 돼서 살아가는 거예요. 비유컨대 제가 안경 쓰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글을 쓴다고 하면 흔히 정신으로만 쓴다고 생각하지만 완전히 오산인 거죠. 그날의 습도와 온도와 공기와 모든 것들의 공생된 관계에서 글을 쓰고 있는 거예요. 나는 홀로 존재하는 주체가 아니라 그들과 공생하는 존재인 거예요. 그래서 나도 그들고 다 객체라고 얘기하는 거죠. 


영화속에서 식사 장면이 의도적으로 계속 반복 돼요. 식사는 반려와 비반려의 은유로 사용된 장면입니다. 원래 반려(companion)라는 말은 ‘같이’라는 뜻의 컴(com)과 ‘빵’이라는 뜻의 패니(pani)가 합쳐진 말입니다. 빵을 같이 나눈다 즉, 식사 자리를 말하는 거예요. 이것을 반려라고 얘기하는 거예요.처음 해리슨이 라즐로를 알아보고 호의를 베푸는 그 첫마디가 뭐죠? 식사하실래요? 엘리자베스가 미국에 왔을 때 또 식사 장면이 나옵니다. 해리슨은 아내가 보는 앞에서 라즐로에게 동전을 던지고 주어달라고 하죠. 첫 장면에서는 좋은 반려로서의 의미를 두지만, 두 번째 장면에선 라즐로를 개로 취급하는 해리슨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비반려의 의미죠. 라즐로는 인간이라기 보다는 사물처럼 다뤄지죠. 라즐로는 사물과 다름없이 일방적으로 노예처럼 취급됩니다. 그는 정신으로서 예외를 갖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몸일 뿐인 존재입니다. 그의 정신성은 곧 그의 몸성입니다. 그의 몸이 힘든 상태를 위로해주는 상황으로 마약과 매춘, 술에 찌든 사람으로 제시됩니다.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이미지4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사진 제공=유니버설 픽쳐스



미장아빔(mise-en-abîme); 영화가 인유(allusion)하는 것들

첫 번째 인유는 괴테의 말입니다.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가장 절망적으로 노예다운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엘리자벳은 미국으로 가는 라즐로에게 조언합니다. 괴테의 이 말은 미국에서의 삶을 얘기하는 거예요. 기회와 평등과 꿈의 나라 미국. 미국에서 결국 그는 한동안 자유로운 삶을 얻지 못했고 노예가 됐죠.라즐로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자유의 여신상이 거꾸로 뒤집어져 있는 모습을 발견하잖아요. 영화후반부에 건축물 위로 빛이 통과되면 바닥에 있는 대리석에 십자가가 투영되는데 거꾸로 보입니다. 거꾸로 보인다는 건 뭔가 안 좋은 상징입니다. 자유를 잃어버린 상태를 은유한 겁니다.


두 번째 인유는 뉴욕의 34번가에 있는 펜스테이션 터미널이에요. 해리슨은 빈민들이 구걸하고 난리 북새통을 떠는 그곳을 엘리자베스에게 말합니다. 엘리자베스는 나도 난민이었다고 말하면서 네덜란드 화가의 그림을 말하는 거냐고 되묻습니다. 그 그림은 1400년대 히로니머스 보슈의 [쾌락의 정원] 연작 시리즈입니다. 그림은 지옥에 빠진 인간을 그린 지옥도입니다.


세 번째 인유는 바벨의 도서관입니다. 해리슨의 도서관을 본 한 사람이 내가 옛날에 읽었던 단편 소설이 하나 떠오른다고 말합니다. 그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그런 도서관을 연상시킨다고 말합니다.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 작가 보르헤스의 단편 [바벨의 도서관]이에요. 그 소설은 불멸성과 라즐로의 부활하는 불멸의 건축에 대한 주제를 암시하고 있다고 보여지거든요.


네 번째 인유. 예수의 수난과 부활. 서양 영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유 중 하나입니다. 언덕 위에 기중기 모습이 보입니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하고 비슷해요. 예수의 이야기 자체를  끌고 간 면도 있어요. 예수의 일생은 전도, 수난, 부활 3단계로 나타나거든요. 라즐로가 센터를 건립하는 게 전도에 해당한다면 사고가 나고 해리슨에 의해서 린치를 당하고 공사가 중단되는 것은 수난입니다. 1980년 노년에 그는 미국에서 유명한 건축가로 이름을 남긴다. 부활 딱 들어맞잖아요. 성서에 나오는 “나의 몸은 성전이다. 허물고 3일 만에 다시 짓겠다”라는 예수의 말은 건축의 부활과 부합됩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이미지5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사진 제공=유니버설 픽쳐스



Q1 사회자: 저는 이 영화의 가치 중 하나가 형식과 내용이 매우 일치되는 영화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 영화는 비스타 비전과 35mm 필름 촬영을 한 영화죠. 1950년대 배경이 되고 1950년대 촬영 방식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상영 방식도 1950년도 로드쇼 방식 즉, 로드쇼라는 게 몇몇 소수 극장에서 상영을 하는데  나중에는 소수 정예 극장에서 하는 프리미엄 상영을 의미하잖아요. 에픽 사가(epic saga) 즉, 헐리우드의 고전주의적 스타일을 되살린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영화에 대한 형식과 내용이 대단히 일치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교수님께 여쭤보겠습니다.


발제자: 고전 영화를 다시 부활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메시지로 준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현재 영화관의 위기에 처한 영화 문화를 되돌아보고 이 영화가 이 시대 관객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되는 그런 영화 체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Q2: 예술가가 창조적인 예술 활동을 하려고 정신을 드러내면 그게 인간 중심주의로 간다니까 창의적인 작업을 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가우디의 사그리다 파밀리아 같은 거는 가우디의 정신이 들어 있잖아요. 근데 인간의 인간 중심주의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예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요. 주인공이 마약 하는 모습을 보면 예술가와 인간으로서의 모습이 다르잖아요. 그런 인간적인 모습에 실망하기도 하는데 그 두 가지에 대해서 얘기해 주시면 좋겠어요.


발제자: 예술가는 당연히 자신의 입장에서 혼을 불어넣어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거죠. 그 행위 자체를 인간 중심주의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점에서 인간 중심주의를 얘기하는 측면입니다. 작업 자세와는 별개의 문제인 것 같아요. 그다음에 예술가와 사생활의 문제. 예술과 삶은 다른 거지요. 영화는 그런 사생활을 얘기하기 위해서 마약하는 장면을 보여줬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라즐로는 몸의 존재다,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보여준 거죠.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이미지6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사진 제공=유니버설 픽쳐스


Q3: 육체적인 고통에 정신을 갉아먹는 모습을 저는 영화를 통해서 많이 느꼈거든요. 심지어 키스까지도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아내도 계속 육체적 고통을 호소하잖아요. 그러면서 섹스를 하는데 그 섹스마저도 굉장히 고통스럽고 즐겁지 않았던 그런 영화로 기억됩니다. 채석장에서 갑자기 해리슨이 라즐로를 겁탈하는듯한 장면은 약간 충격적이었는데요. 그 장면에 대해서 좀 여쭤보고 싶어요. 발제자:  저는 라즐로의 지성에 대해 해리슨이 느끼는 열등의식이 폭발한 거라고 느꼈어요. 해리슨은 계속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자기가 쌓아온 미국에서의 사회적 지위로만 보면 아무도 자기를 무시할수 없지만 라슬로 앞에서 자신은 무식하고 텅 빈 지성이라는 것을 느껴왔던 거죠. 그러던 차에 라즐로가 마약과 술로 형편없이 널부러진 모습을 보고 그를 멸시할 기회를 얻었다고 봐요. 


Q4: 저는 개인적으로 라즐로와 해리슨의 관계는 파우스트 같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즐로가 성격적으로 유약하다기보다는 역사가 그의 영혼을 살해했고, 그 살해당한 영혼이 미국으로 가서 새로운 희망을 찾았으나, 결국은 또 다른 미국식 자본주의라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게 되고, 또다시 아주 깊이 살해당하는 그런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근데 조금 의문나는 점이 강철하고 대리석이 대비된다는 설명인데요. 강철은 인공적인 것이고 대리석은 자연적인 것이다,라고 대립으로 보셨는데, 채석장에서 산이 다 깎여지고 자연이 훼손되면서 화강암을 채취하는 장면을 보면 화강암 역시 인간에 의해서 훼손되는 자연의 이미지를 보여준다고 봤거든요. 선생님께서는 강철하고 화강암이 대립된다고 보셨는데 조금 궁금해서 질문드리겠습니다.


발제자: 말씀하신 대로 채석장은 자연을 훼손하는 모습을 보여준 거예요. 제가 말씀드린 강철과 돌의 대립을 설명하려면 뉴스릴 다큐 장면을 예로 들어야 합니다. 강철이 필라델피아에서 생산되고 그게 가장 좋은 강철이라는 내용의 뉴스를 볼수 있어요. 필라델피아가 미국 내에서 강철의 최대 산지고 강철이 미국의 산업을 견인해낸 가장 중요한 것이라 말하죠. 미국이 전 세계를 주도하게 된 건 철강산업 때문이고 필라델피아의 중요성으로 결론짓죠. 그 강철이 뭘 상징하겠어요? 바로 미국의 산업화를 상징하는 거거든요. 자연 파괴를 통한 산업화를 상징하는 거예요. 따라서 철은 자연 파괴고 그에 대립되는 돌은 파괴되지 않은 자연을 상징한다고 봐요.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이미지7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사진 제공=유니버설 픽쳐스


Q5: 후반부에 등장하는 해리슨의 실종도 궁금합니다. 반면 라즐로는 치욕스러운 삶의 생애가 다시 살아나서 마지막에 시간이 경과하고 80년대 비엔날레에 참석을 하잖아요. 해리슨의 실종이 자본주의의 몰락이라든가 반지성주의, 비인간주의, 인간주의의 몰락이라든가 라즐로의 삶과 대비해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혹시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좀 여쭤보고 싶습니다.


발제자: 저도 그렇게 봅니다. 해리슨이 실종된 마지막 장소가 센터라는 게 어떻게 해석될까요? 전 어머니한테 갔다고 봤어요. 해리슨은 미국의 재벌이었지만 너무 외롭고 쓸쓸한 사람인 거죠. 그 인물을 통해서 미국 자본주의의 이면을 보는 겁니다. 오슨 웰즈(Orson Welles)의 <시민 케인>(1941)에서 대재벌 케인이 어머니를 부르면서 쓸쓸하게 죽어간 것처럼 말이죠. 사회자:저는 감독이 해리슨을 증발시켰다고 봅니다. 이유는 억만장자지만 영화의 끝에 다다르면 증발되는 거죠. 악인으로조차 기억되지 않으니까요. 그것이 헤리슨에 관한 가장 지독한 형벌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자기를 앞세웠고 자아의식을 앞세웠고, 자기가 영원히 돈을 가지고 미국에서 기억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결국은 라즐로의 건축 미학을 사람들이 주목했고, 어떻게 보면 악인으로조차도 기억되지 않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형벌이 아닐까. 자의식을 갖고 있는 나르시스틱한 사람에게는.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Q6: 발제에서도 들뢰즈 얘기가 나왔는데 책 [시네마 원]에 보면 조셉 로지(Joseph Losey)의 <하인>(1960)이라는 영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에 내재한 가장 기본적인 충동을 노예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라즐로가 수용소 생활을 거치면서 몸이 피폐해지고 부러진 코가 상징하는 것처럼 자존심이 깨지고 처참한 상태의 몸이잖아요. 그 사람에게 있어서 섹스는 성적 욕망의 만족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피학적인 행위라는 생각이 들고요. 라즐로와 해리스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 관계로 볼 수 있죠. 또 영화가 시오니즘 등 유대이즘을 그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정재형 선생님은 이런 식으로 영화를 해석하는 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발제자: 이번에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전쟁이 있을 때에도 미국 내 시각이 두 개로 쪼개졌잖아요. 팔레스타인 지지하는 사람, 이스라엘 지지하는 사람. 미국의 재벌들과 많은 정치 세력은 다 이스라엘 지지해요. 이스라엘 나라가 생긴 것도 미국의 지지로 생긴 거예요. 영화 속 조피아는 시오니즘을 표방하죠. 유대인들이 고향 이스라엘로 돌아가자는 주의입니다. 라즐로가 너는 너 자신의 정체성으로 살아라, 이렇게 얘기를 하는 대사가 나와요. 하지만 정작 유대인 라즐로는 시오니스트가 아니에요. 민족주의자도 아니예요. 그 사람은 이스라엘로, 헝가리로도 가지 않았잖아요. 가고는 싶어 했죠. 너무 괴로우니까. 근데 이 사람은 가지 않았어요. 감독은 두 가지 시각을 분배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조피아의 시오니즘과 라즐로의 코스모폴리타니즘.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이미지8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사진 제공=유니버설 픽쳐스


사회자: 저는 교수님하고 완전히 견해가 다른 것 같습니다. 저는 일단 이 라스트 엔딩은 절대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브래디 코베(Brady Corbet) 감독은 상당히 냉소적이라고 생각해요. 역사를 보는 관점은 조피아로 시작을 해서 조피아로 끝나는 영화거든요. 왜 그렇게 배치를 했을까? 어찌 보면 조피아가 바라보는 라즐로에 관한 자서전 같은 느낌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피아에 대해선 상당히 오독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뭐가 오독이냐 하면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목표가 중요하다,라는 걸까요? 이 영화가 보여주는 건 지독한 과정입니다. 예를 들면 라즐로가 아메리칸 드림에 배반당하면서도 고작 몇 미터 높이를 포기하지 않는 거죠. 그리고 그 후에 만취한 상태에서 당한 후에 얼마나 지독하게 그것을 고통스러워하는지 그 과정들 즉 과정의 서술 방식은 여기서 굉장히 집요해요.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조피아의 목표가 중요하다는 서술은 제가 볼 때 상당히 라즐로의 삶을 오독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시오니즘의 상징으로 보는 것도 상당한 오독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엘리자벳하고 라즐로는 서로에 대해서 거울상처럼, 영혼의 한쌍처럼 묶여 있고 결국 마지막에는 엘리자벳은 서게 되는데 라즐로는 엘리자벳처럼 다시 휠체어에 앉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결국은 그 건축물조차도 오독을 당하고 있는 그것이 굉장히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숨은 연쇄성이고, 결국에는 아메리칸 드림에 관한 전복이자, 저는 어떤 예술가가 예술품 즉,  자신의 아이를 세상에 내놨을 때 갖고 있는 운명, 수많은 사람이 자기 아이를 평가하고 자기 아이를 오독하고 자기 진심을 몰라주고, 그러나 자기 자신을, 어쨌든 꿋꿋이 그 지독한 과정을 견뎌내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의 불멸성을 얻는 대가라고 생각을 합니다.


발제자: 그렇죠. 건물은 강제 수용소로 볼 수 있지만 비치는 그 빛이 상징하는 거꾸로 된 십자가는 또한 종교적 의미도 가질 수 있죠. 한편으로 강제 수용소로 본 조피아의 해석도 맞지만 어떻게 보면 거꾸로 된 자유의 여신상처럼 지고 가야 할 아메리칸 드림의 역전된 모습을 보여주는 냉소적인 영화의 엔딩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사회자: 그리고 그 건축물에 창이 없다는 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즉 창이 있다는 건 세상을 바라보는 어떤 소통이 있고 세상을 바라보는 어떤 시선이 있는 건데, 이곳은 굉장히 닫힌 공간이고 창이 없죠. 어찌 보면 라즐로의 내면이자 아주 위배된 자폐적인 공간 같은 느낌도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해석은 절대로 시오니즘에 관한 것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저는 보고 싶습니다.


Q7: 저는 브루탈리즘 건축의 미학이랄까 이런 거를 생각하면서 보게 됐는데요. 브루탈이란 단어가 갖는 느낌, 이 제목 자체도 야수성 혹은 잔혹함 이런 뜻이 있잖아요. 공간이 보여주는 것, 브루탈리즘 건축이 보여주는 것은 거대하게 보이지만 안에는 개인적인 내밀한 공간들로 구성되어 있고, 기억들을 불러온다는 것이죠. 진실 본질을 드러내는 그런 공간으로 보여졌고요.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는,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성찰적인 구조 그리고 창문이 없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창문이 그냥 높이 있잖아요. 창문을 보기 위해서는 위를 바라봐야 된다, 이런 얘기를 하는데 실제로 바라볼 수 있는 일상의 창문이 아니죠. 위를 쳐다보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그런 구조 아니었나요?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어떤 허영이 벗겨지는 순간에는 그 사람의 공허함이나 섬김이나 혹은 속물적인 정숙함 이런 것들이 갑자기 드러나는 장면들이 있어요. 그것이 오히려 잔혹함으로 표현이 되는 것 같고, 마지막에 엄청난 대리석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며 압도됐을 때가 인상적이었어요. 마치 들어갈 수 없는, 막혀 있지만 사실은 문처럼 보이는 어떤 것을 보여주죠. 자연의 본질 그 앞에서 압도당하는 경험을 통해서 자기가 껍데기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데 이것이 잔혹함으로 나온 것이 아닌가 싶고요.


해리슨 같은 경우에는 자신이 중요한 본질을 상실했기 때문에, 공허한 껍데기 허용밖에 없고, 남아 있는 게 없어서 실종된 것이라고 느껴졌어요. 라즐로 같은 경우에는 훼손되고 망가졌지만 고결한 본질을 그래도 유지하고 있는 존재로 느껴지고, 그게 지구라는 생각도 하게 됐어요. 인터미션에서 가족 사진을 오랫동안 보여주는데, 지구에 대한 의도적인 의미 같거든요. 가장 아름다웠고 행복했던 순간이면서 본질적인 부분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인터미션 시간 동안 그 사진에 머무르게 만들고, 아무리 훼손해도 깨지지 않는 본질을 보여주려 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요. 


사회자: 마무리하겠습니다. 라즐로의 유산에 대해서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막 여러 가지 해석을 한 후에 그것들은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단지 존재할 뿐이다.” 저는 정재형 교수님이 건축이 사람하고 동일하게 이용하여서 취급된다는 걸 너무나 동의합니다. 바로 이 대사가 그것을 말하죠. 인간도 존재하고, 건축도 존재한다고. 아마 감독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선한 시각을 전해주신 정재형 교수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다음 달에 <에밀리아 페레즈>로 다시 만나 뵐게요.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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