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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프레시 2024년 11월 월요시네마 <룸 넥스트 도어>에 관하여2025-03-17
영화 <룸 넥스트 도어> 스틸컷 이미지



피프레시 11월 월요시네마 <룸 넥스트 도어>에 관하여



11월 25일 맹수진 영화평론가 발제, 20여 명 열띤 토론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국제영화비평가 ‘줌’ 세미나 열어


국제영화비평가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la Presse Cinématographique. 이하 FIPRESCI/피프레시) 한국지부는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 오후 8~10시, 줌(Zoom)으로 월요 시네마 세미나를 열고 있다. 지난 8월 26일 이명희 영화평론가(피프레시 전 회장)가 트란 안 홍 감독의 <프렌치 수프>(2023)에 대해 발제한 뒤 참가자들이 총 2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여섯 번째 줌 세미나에는 20여 명이 참여했다. 피프레시는 1930년 전 세계의 전문영화비평가와, 영화기자, 각국의 영화 단체들이 영화문화의 발전을 위해 결성한 단체로, 한국지부는 1994년 창립됐다. 



영화 <룸 넥스트 도어> 포스터 이미지

<룸 넥스트 도어> 포스터.


사회자- 월요 시네마. 오늘 사회를 맡은 저는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장 심영섭입니다. 오늘은 맹수진 영화평론가를 모시고 <룸 넥스트 도어>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하겠습니다. 맹수진 선생님은 전주국제영화제, DMZ 국제다큐영화제, EBS 국제다큐 영화제, 서울환경영화제, 제천국제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셨습니다. 


발제자- 안녕하세요. 맹수진입니다.<룸 넥스트 도어>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최근 작이죠.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고 베니스영화제 사상 가장 긴 기립박수라는데, 18분의 기립 박수를 받은 작품으로 한국에서는 10월에 개봉했습니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에 대해서 간략히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는 현대 스페인 영화의 메신저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우상 파괴적인 영화를 만들었고 가톨릭 교회의 권위, 가족의 가치, 성적인 규범 등 전통적인 가치들을 통렬하게 풍자, 조롱, 비판해온 감독입니다. 모순 형용이지만 마드리드를 배경으로 초현실주의적인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그만큼 매우 이질적인 요소들이 뒤섞여있는 영화들을 만들었습니다. 초기에는 치기, 분노, 도발, 냉소가 뒤죽박죽 뒤섞인 파편화된 영화들을 많이 만들었지만 후기로 갈수록 같은 소재와 테마를 다루더라도 인물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더 따뜻해지고 삶에 대한 성찰의 깊이가 심화되어 왔다고 말씀 드릴 수 있겠습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일어난 라모비다(la movida) 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았습니다. 라모비다는 프랑코 통치 기간 억눌려온 스페인의 답답한 문화적 분위기를 깨면서 80년대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펼쳐진 문화 운동인데 전위적이고 포스트모던한 스타일의 문화적 실천이었습니다. 알모도바르는 라모비다 문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라모디바 영화의 대표자가 되었습니다. 가장 힙하고 포스트 모던한 당시 문화적 분위기를 자기 영화 속에 녹여냈다는 점에서 알모도바르를 현대 스페인 영화의 메신저라고 말하는건 타당합니다.


‘나쁜 교육’(2004)은 알모도바르 후기에 속하는 영화이지만 라모비다 문화에서 유행한 전위 만화나 그래피티적 요소를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지요. 그의 영화 세계는 후기로 갈수록 서사가 심화되고 시선이 깊어지지만 알모도바르 고유의 스타일과 색채, 미적인 감성 만큼은 변함 없이 지속됩니다. 무엇보다 그는 카톨릭의 권위를 조롱하고 비판합니다. 그의 많은 영화들에서 사제, 교회는 굉장히 억압적인 존재로 등장하죠.


예를 들어 ‘나쁜 교육’에서 어린 시절 교회 신부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했던 소년이 트랜스젠더가 되어 신부를 찾아와 협박을 할 때, 신부는 “사람들은 당신이 아니라 내 말을 믿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는 “지금은 1977년이예요”라고 말하지요. 1977년이라는 시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페인 내전을 유발한 독재자 프랑코가 1975년에 죽거든요. 프랑코 체제에서 억압적이던 사회는 그가 사망하면서 자유의 물결로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1977년은 바로 그러한 변화가 시작되던 시기인 것입니다. 돈키호테의 배경인 라만차 출신의 알모도바르는 수도원에서 엄격한 카톨릭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습니다. 성가대 활동도 했습니다. <나쁜 교육>에 나오는 어린 주인공이 성가대로 등장하는 것은 그의 자전적 경험이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는 10대 때부터 헐리우드 영화를 비롯해서 수많은 영화를 봤던 시네필이기도 했습니다. 리처드 브룩스 감독의 < 뜨거운 양철지붕의 고양이>를 통해 죄의식, 성적인 의식을 깨달았다고 하는 알모도바르 감독은 빌리 와일더, 더글라스 서크, 알프레드 히치콕 같은 헐리우드의 거장 감독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룸 넥스트도어>에는 더글라스 서크의 멜로드라마적 장치와 빌리 와일드적인 블랙코미디의 유머가 있고 <내가 사는 피부>같은 영화에는 히치콕적인 서스펜스가 느껴집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헐리우드 장르 영화에 심취한 감독이었던 것입니다. 다양한 장르 영화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스페인의 대표 감독인 루이스 부뉴엘로부터도 짙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프랑코 독재 체제가 가장 암흑기이던 1969년에 16살의 알모도바르는 마드리드로 갑니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코가 사망하는 75년까지 스페인은 한국 영화의 암흑기인 유신 시대와 비슷한 시기였습니다. 마드리드의 영화 학교들은 폐쇄되었고 영화에 대한 억압과 검열 때문에 아예 영화를 만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 이후, 프랑코가 죽은 이후 스페인의 민주주의가 진전되면서 알모도바르는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영화를 만들게 됩니다. 


1936년부터 39년 사이에 벌어진 스페인 내전은 좌파 공화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들 vs.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대립이었습니다. 전세계의 지식인들이 스페인 내전에 참여해 싸웠지만 최종 승자는 프랑코였고 이후 스페인은 오랜 독재 체제에 접어듭니다. 공화파들의 입장에서 보면 스페인 내전은 독재에 맞선 민주주의자들의 싸움이었지만 프랑코는 이 내전을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에 맞선 로마 카톨릭 국가 스페인을 수호하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규정합니다. 그런 이유로 프랑코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스페인 교회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습니다. 프랑코 시대, 카톨릭을 중심으로 한 스페인 통합 이데올로기의 중심은 마드리드였습니다.


반면 바르셀로나, 바스크 등은 분리, 독립을 추구했던 이방인들의 지역이었습니다.흥미로운 것은, 알모도바르의 영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  프랑코 시대에 정립된 스페인 문화의  아이콘들, 이를테면 붉고 강렬한 태양, 플라멩고, 세비야나 등은 사실은 마드리드, 카톨릭을 중심으로 한 스페인 주류 문화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문화는 북서부의 바스크, 북동부의 카스튜나, 바르셀로나, 대표적으로는 안달루시아에 속한 문화였습니다.


이질적인 문화를 스페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굉장한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드리드 언더그라운드 문화에서 꽃 피운 알모도바르의 영화에 등장하는 많은 노래들, 민요들의 출처가 비 마드리드 지역의 것들이라는 것이요. 영화 <귀향>에서 페넬로페 크루즈가 부르는 노래 역시 어렸을 때 할머니가 들려줬던 노래, 그러나 할머니를 부정하면서 더이상 부르지 않았던 노래인데, 이 역시 이런 전통 민요의 계보에 속합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라모비다,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한 프랑코 시대의 억압에서 탈출하려는 욕망이 분출하던 마드리드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세례를 받았지만, 마드리드로 대표되는 질서와 가치, 규범들을 가장 전복적으로 파괴했던 사람이었고 이를 위해 그는 주변부의 이질적인 문화들을 자신의 영화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알모도바르의 영화에서 마드리드는 굉장히 불쾌하고 권위적이며 자식들, 아들과 딸들이 끊임없이 벗어나 어디론가 도망을 치고 싶어하는 장소로 묘사됩니다.


그의 영화에는 아버지가 부재하거나 훼손당하거나 또는 성전환하는 모습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렇게 아버지의 권위를 상실하고 거세되거나 기존의 아버지의 권위를 거부하는 이들은 모두 마드리드를 떠납니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성 전환한 남편이 바르셀로나로 떠난 뒤 마누엘라 역시 남편을 찾아서 바르셀로나로 떠납니다. <귀향>에서는 반대로 딸 라이문다가 엄마와 가족, 고향을 부정하고 마드리드로 떠났다가 결국은 고향이 자신의 거처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제목 ‘귀향’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000년대 이후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개인적이고 성찰적이면서 좀 더 따뜻한 영화로 변화합니다. 일반적으로 알모도바르 영화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은 버림받고 훼손되고 거세되고 살해되거나 사라지는 인물, 혹은 여성화되거나 폭력적인 인물들입니다. 정상적인 아버지의 부재. 이런 남성 캐릭터가 반복되는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폭력, 무능, 부재를 채우고 온 힘을 다해서 자식들을 키우는 것은 바로 여성들입니다. 


<귀향>에서 자식들은 자신의 아버지들로부터 강간을 당합니다. 이 영화는 로만 폴로스키 감독의 <차이나 타운>을 알모도바르적으로 재해석한 영화라 할 수 있는데, 페놀로 크루즈가 연기하는 라이문다의 딸 파울라는 사실은 그녀의 딸인 동시에 여동생입니다. 그런데 이 딸이 또 의붓 아버지로부터 강간을 당할 뻔하고 결국은 자기 아버지를 죽이게 됩니다. 라이문다는 딸이 벌인 행동을 자기가 한 것처럼 꾸미죠. 왜냐하면 과거에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했을 때 엄마가 자기를 지켜주지 않고 모른 척했던 것 때문에 상처받았고 그 때문에 고향을 등지고 마드리드로 갔던 것이니까요.그러나 외면했던 엄마 장례식 참석을 위해 고향에 돌아와 몰랐던 과거의 진실을 알게 되고, 엄마의 유령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살아있던 엄마를 만나서 화해하게 됩니다.


결국 이 영화에서도 마지막에 남는 것은 모두 여성들입니다. 아버지들 남편들 아들들은 다 죽고 사라졌어요. 여기서 남는 것은 여성들이고 여성들의 이해와 용서, 우정입니다. 과거의 어머니는, 이를테면 <내가 사는 피부>의 어머니처럼 아버지의 권위와 아버지의 폭력에 동조하고 맞장구치는 엄마는 여성 주인공의 적이었어요. <귀향>은 어머니의 세계, 모성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는 여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거기에는 일종의 살부 의식(殺父 儀式),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든 국가적인 것이든, 프랑코라고 하는 정치 지도자든 교황이든 가족의 아버지이든 그 상징적인 상속자로서의 아들이든, 이들의 존재는 모두 부정당합니다.


여성들의 연대, 공감, 이해와 우정에 대한 영화라는 점에서 <룸 넥스트 도어>는 알모도바르의 이러한 세계관이 활짝 꽃 핀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알모도바르가 75세에 만든 영화입니다. 알모도바르 최초의 영어 장편 영화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주제는 죽음입니다. 특히 스스로 선택한 죽음, 즉 존엄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게 영화의 전부는 아닙니다. 


영화에는 마사(틸다 스윈튼)와 잉그리드(줄리안 무어),  두 여성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너무도 다른 두 사람이지만 공통점도 있습니다. 마사는 뉴욕타임즈의 종군 기자로 전쟁터를 누볐던 인물로 암에 걸렸고 임상 치료까지 실패해서 살 날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의사는 당신의 심장은 튼튼하니까 계속해서 항암 치료를 하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사는 고통스럽고 의미 없는 치료 대신 존엄을 지키면서 깨끗이 퇴장하는 방법을 택하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딸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여행에 동행해달라고 부탁하지만 어느 누구도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옛 친구 잉그리드에게 부탁합니다.


잉그리드는 고민하다가 결국 마사의 제안을 허락합니다.마사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도와줄 사람 assitance’이 아니라 함께 해줄 사람(accompany)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죽는 것을 옆에서 지켜봐 줄 사람. 왜? 그녀는 수없이 고독한 죽음을 보고 겪었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절대 고독의 성격, 그 외로움을 너무나 잘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간절한 마음을 딸에게도 거절당한 것입니다. ‘룸 넥스트 도어’. 내 옆 방에 있어 달라. 죽음은  어느 누구도 같이 해줄 수 없는 절대적으로 혼자 감당해야 할 사건입니다. 사는 것은 누군가 함께 할 수 있지만 죽는 것은 오로지 전적으로 혼자 떠맡아야 할 실존적인 문제입니다. 그 때, 그 곁에 최대한 가까이 있어 달라는 절절한 요청이 제목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문학의 인용

이 영화의 원작인 시그리드 누네즈의 [어떻게 지내요]는 한국에서도 출판되었습니다. ‘어떻게 지내요’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소설의 영어 제목은 “What Are You Going Through? 어떻게 헤쳐나가고 있나요?”입니다. 프랑스어 제목은 시몬즈 베이유의 1942년 글에서 영감을 받은 Quel est ton tourment? 당신의 고통은 무엇인가요?/당신은 무엇으로 고통받는가요?’입니다.


시몬 베이유는 ‘어떻게 지내요? Quel est ton tourment?’라는 말이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담은 말이라 합니다. “What Are You Going Through?”  “Quel est ton tourment?”는 단순히 “How are you?”라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어떻게 헤쳐나가고 있나요? 어떻게 견뎌내고 있나요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요?라는 질문은 타인의 삶에 대한 관여의 질문입니다.


그 관심을 나와 타인이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거리, 즉 공간으로 표현한 것이 ‘룸 넥스트 도어’입니다.영화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문학 작품이 있습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에 수록된 단편 [죽은 사람들 The Dead]입니다. 영화에서는 [죽은 사람들]의 특정 구절이 세 번 반복되는데 영화와 소설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1)“His soul swooned slowly as he heard the snow falling faintly through the universe and faintly falling, like the decent of their last end, upon all the living and the dead” (소설)


(2)“the snow falling faintly through the universe and faintly falling, like the descent of their last end, upon all the living and the dead." (영화)


둘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소설의 주어는 그(he), 그의 영혼(his soul)입니다. 반면 영화에서 인용한 구절의 주어는 눈(snow)입니다. he라는 남성 지시사가 삭제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알모도바르 영화의 궤적을 돌아볼 때  아버지라는 존재,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가부장의 성별 지시사인 he를 삭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인용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의 시선은 가져가되, 그 주어가 아버지, 남성이라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거죠. 이 영화에서는 죽음의 당사자도 여성이고 그 여행에 동행하는 이도 여성입니다.


에드워드 호퍼

두 사람은 숲속에 위치한 아름다운 집에서 그 계획을 실천합니다. 그곳은 초록색이 가득합니다. 소파도 녹색이고 바깥 창문을 열면 숲이 보이고 그 속에서 그들은 산책도 합니다. 그 집에는 그림이 하나 걸려 있습니다. 에드워드 호퍼의 ‘햇볕 쬐는 사람들’입니다. 이 그림의 햇볕은 인상주의자들이 묘사한 찰나의 빛이 아닙니다. 그것은 굉장히 정교하게 디자인된 빛입니다. 축하와 행복, 삶의 의지가 타오르는 빛이 아니라 기억과 기록, 삶을 정리하는 느낌의 절제된 빛입니다. 그림 속 햇볕 쬐는 사람들은 장소와 괴리되어 냉랭하게 거리를 두는 느낌을 줍니다. 채도가 낮은 그림은 사실 이미 죽음을 준비하는 마사의 내면의 풍경이 투영된 풍경입니다.


마사와 잉그리드 : 삶과 죽음의 얼굴마사와 잉그리드는 애초에 같은 출판사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출발점에 서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후 마사는 뉴욕타임즈의 종군 기자로 전쟁 현장을 누볐습니다. 종군 기자라는 건 끊임없이 죽음을 찾아다니는 직업입니다. 마사는 사람은 죽음을 기록하기 위해 다큐를 찍습니다. 다큐멘터리는 삶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냉철한 묘사이며 그녀는 죽음에 좀 더 가까이 붙어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 잉그리드는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소설은 픽션입니다. 다큐멘터리와 정반대의 영역이죠.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창조하는 직업. 작가는 생산자입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자식을 낳는 것과 같습니다. 마사가 죽음을 추적하고 기록하는 것과 달리 잉그리드는 삶을 창조하고 생산하는 역할을 합니다.그들은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했지만 다른 길을 걸어갔고 다른 삶의 궤적 속에서 삶과 죽음을 상징하는 두 개의 얼굴로 만납니다.


이 영화의 포스터에는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마사와 잉그리드의 얼굴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삶과 죽음은 분리되거나 대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삶과 연결되어 있고 죽음은 삶의 최종 국면이자 완성입니다. 두 사람이 같은 베개에 기대어 한 방향을 보는 엔딩부의 장면을 기억해보세요. 영화는 두 사람이 다른 방향을 보다가 마지막에 같은 방향을 보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들의 얼굴은 포개져 있습니다. 죽음의 원칙과 삶의 원칙을 상징하는 둘은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있습니다.


미셸& 프레드: 영화 속 또 하나의 중요 인물은 마사의 딸 미셸입니다. 미셸은 프레드의 딸이기도 합니다. 프레드는 마사가 젊은 시절에 만났던 남자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뒤에 완전히 망가져서 돌아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면서 둘의 관계는 끝이 납니다. 프레드가 떠나려할 때 마사는 연민 때문에 프레드와 하룻밤을 보내는데 그 날 잉태된 아이가 미셸입니다.


미셸은 단 한 번도 아버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생면부지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엄마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합니다. 10대에 자신을 낳고 돌보지 않고 홀로 세계를 떠돌아다닌 엄마에 대한 원망 때문에 엄마와 거의 만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마사가 자신의 존엄사 여행에 동반해달라 부탁하지만 미셸은 “그건 엄마의 선택이죠. it’s your choice.”라고 말하며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프레드의 죽음입니다. 프레드는 다른 여성과 결혼을 하고 그녀와 벌판을 달려 드라이브를 하다가 불이 나서 타고 있는 헛간을 발견합니다. 알모도바르 영화에는 불타는 장면이 참 많이 나옵니다. 그 집은 빈 집이었지만  프레드는 누군가 안에 있다며 뛰어 들어가 다시 나오지 못합니다. 그의 착란은 베트남전의 트라우마 때문입니다. 경찰은 집 안에 아무도 없었고 프레드가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해줍니다.


그러나 미셸은 자신이 그 집에 있었고 아빠가 자기를 구하러 온 거라고 말합니다. 이건 전적으로 미셸의 판타지입니다. 아버지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불타는 빈 집에 자신을 지켜주는 아버지라는 판타지를 투영한거죠. 그 집은 미셸에게는 일종의 상상의 스크린, 아버지라는 남근을 투영하는 상상의 스크린입니다. 미셸이 보여주는 것은 엘렉트라 콤플렉스입니다. 그러나 <귀향>의 라이문다처럼 미셸은 결국 엄마 마사와 화해를 합니다. <룸 넥스트 도어>는 <귀향>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연대, 공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데이미안: 여기서 아이러니하면서 흥미로운 인물이 데이미안입니다. 그는 마사의 애인이었고 잉그리드의 애인이기도 했습니다. 데이미안은 마사와 잉그리드의 캐릭터를 외부에서 비추는 조연입니다. 그는 마사와의 섹스가 마치 죽음이 임박한 것처럼 격정적이고 일회적이었다고 말합니다. 반면 마사는 잉그리드에게 자신은 데이미안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데이미안과 오직 섹스를 했을 뿐이고 그것은 자기 삶에 항상 어른거리는 그림자같은 죽음을 떨쳐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섹스였기 때문이라며 “전쟁이 날 문란하게 했다”고 농담도 합니다.


반면 데이미안은 잉글리드와는 좀 더 지속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럼에도 데이미안 역시 알모도바르 영화의 일반적 남성인물의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는 잉그리드와의 대화에서 죽음, 기후 변화, 신자유주의 문제 등 여러 사회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뭔가 피상적이고 부정적이며 해결을 향한 궁극적 의지나 낙관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가 주장할 때 카메라가 멀리서 목소리만 과장되게 들려주는 촬영도 이러한 느낌을 강화하는데 일조합니다. 


붉은 문마사는 잉그리드에게 매일 열려있는 자기 방 문이 닫혀 있으면 그 때가 자신이 죽음을 결행한 때라고 알려줍니다. 잉그리드는 매일 그 방의 붉은 문이 닫혀있을까봐 불안에 떱니다. 그러나 마사가 죽었을 때 이 방 문은 닫히지 않았습니다. 햇볕이 좋은 날, 잉그리드는 산책하러 나갔다 돌아와서 수영장 카우치에 누워 영원히 잠든 마사를 발견합니다. 마사는 그 어느 때보다 화사하고 아름답게 세상을 떠납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발견하는 세상의 아름다움

마사는 죽음의 도우미 assistant가 아닌 동행자 accompany를 원했지요. 그 동행인은 잉그리드였습니다. 영화는 타인으로서 죽은 자를 배웅하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동시에 이 세상 모든 순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마사의 죽음을 겪으면서 관객은 죽음이 무조건 피하고 싶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됩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함께 창밖을 내다볼 때 석양에 물든 핑크빛 눈으로 덮여가는 도시의 풍경에서 가장 미적으로 표현됩니다. 이 핑크빛 눈은 소설 [죽은 사람들]에도 나오는데, 알모도바르는 이 눈 풍경을 지극히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죽음의 순간에 이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그 어느때보다 아름답습니다다. 그들이 세 번에 걸쳐 반복해서 읊조리듯이 그 눈은 죽은 자와 산 자 모두에게 내리는 아름다운 눈이고,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유하는 공간이자 물질입니다. 마사는 마지막 순간에 잉그리드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너는 죽음을 맞는 자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치의 동행을 해줬어. 고마워.” 영화의 제목 ‘룸 넥스트 도어’의 주제를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족

개인적으로 여기서 영화가 멈췄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마사와 잉그리드가 하나로 포개지는 순간, 삶과 죽음이 겹쳐지는 순간에서 영화가 끝나도 참 아름다웠겠다 싶습니다. 그러나 알모도바르는 마사가 죽은 뒤에 딸 미셸이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장면을 굳이 삽입합니다. 이러한 엔딩은 알모도바르 월드에서 ‘딸과 어머니의 화해’라는 매우 중요한 주제의 완결이라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그의 세계 완성을 위해 조금은 도식적으로 끌어온 마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틸다 스윈튼은 마사와 미셸 1인2역을 합니다. 영화에 대해 이 정도로 이야기하고 토론으로 넘어가도 좋겠습니다.



■ 토론

사회자- 네 좋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미학적 죽음이라는 것. 죽음을 아름답게 그리고자 하는 게 사람들의 본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할머니가 굉장히 예쁘고 화사하게 꾸미고 양산 들고 돌아가시는 모습으로 그려지잖아요. 감독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혹은 죽음 그 자체를 미학적으로 그리고 싶어 하는 욕망이 많은 영화에서 드러난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영화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죽음 3부작의 마지막 작품처럼 보이는데 알모도바르가 이렇게 미학적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토록 욕정과 섹스, 욕망에 대해 천착하던 감독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의 해답이 이렇게 아름답고 그림같은 죽음이라는 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발제자- 죽음은 누구에게나 고독하고 공포스러운 사건이지만 나의 죽음을 상상할 때 어느 누구도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룸 넥스트 도어’에서 알모도바르가 보여주는 죽음에 대한 성찰은 관객에게 위로가 되고 용기를 줍니다. 죽음에 대한 의학적인 판단이 있고 사회적, 윤리적인 판단이 있지만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기대하는 것은 그러한 층위의 판단이 아닌 예술적인 판단이죠. 죽음은 누구에게나 끔찍하고 피하고 싶은 경험이지만 우리가 영화나 예술에서조차 그 끔찍함과 고통만을 경험해야 한다면 감당하기 힘들지 않을까요?


죽음은 우리가 희망하는대로 오지 않습니다. 사실 죽음은 느닷없이 찾아와서 모든 마음가짐과 준비를 무위로 만들고 비참하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 우리의 목숨을 가져갈 수도 있겠죠. 그러나 적어도 예술이 상상하는 죽음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고통스럽지는 않기를 바라는거 아닐까요?  예술의 중요한 기능 하나는 위로니까요. 알모도바르의 초기 영화에서는 부조리한 죽음이 많았어요. 정말 의미 없고 부조리한 죽음이요.


<비밀의 꽃>에서 바람 피우는 남편한테 화가 난 아내가 남편에게 하몽을 휘두르니까 머리를 맞은 남편이 그 자리에서 죽어버려요. 그런 어이 없는 죽음에 무슨 존엄이 있겠습니까? 그랬던 감독이 이 영화에서는 제가 “죽음을 포옹한다”고 표현한 죽음의 미학을 보여줍니다. 그만큼 죽음에 대한 감독의 고민, 시선이 무르익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술이 관객에게 그런 위로를 건넬 때 저는 얼마든지 그 위로를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참석자- 원작 소설을 읽었는데 소설 캐릭터들에게는 잉글리드나 마사같은 이름이 없습니다. 또 하나, 영화에서 ‘마사’라는 이름이 주어진 인물이 소설에서는 죽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거든요. 그러면서 여러가지 성찰을 하면서 끝이 납니다. 영화에서 인용한 제임스 조이스의 [죽은 자들] 부분도 소설에는 없고요. 발제자께서 영화하고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비교하셨는데, 영화의 대사와 제임스 조이스가 쓴 [죽은 자들]의 마지막 장면을 비교해보면 조이스의 소설도 역시 ‘그’가 의식을 잃어가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눈 내리는 것에 대한 비유, 삶과 죽음의 비유 그리고 이것이 산 자와 죽은 자들 모두한테 내린다는 것을 중시해요. 소설 번역자 역시 영화처럼 눈내리는 게 중요하다고 느끼는거 같아요. 모든 산 자와 죽은 자 위에 눈이 내리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도 세 번이나 리라이트하면서 이미지 메이킹을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요. 알모도바르는 이 소설의 죽음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아요. 기껏 죽는다고 해놓고 왜 집에  돌아가? 이런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영화에서는 마사가 죽는 상황을 굉장히 멋있게 표현하잖아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 겹쳐지면서요. 번역자도 이렇게 번역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틸다 스윈튼이 마사와 미셸 1인 2역을 했는데 무슨 의미일까? 그리고 소설과 달리 영화에서 마사가 죽는 것으로 끝낸 이유는 무엇일까? 발제자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발제자- [죽은 사람들] 영어 원서에 그(He)가 주어인 것과 달리 영화에는 he가 빠지고 눈(snow)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알모도바르는 분명히 제임스 조이스의 [더 데드]를 읽었을 거예요. 그가 한국어 번역본을 읽지는 않았을테고 영어본을 봤을텐데 그렇다면 그것은 의도적으로 he를 뺀 것이죠(알모도바르는 직접 이 영화의 영어 각색을 했다). He라는 남성 지시 대명사를 삭제한 이유는 그동안 알모도바르의 영화 서사의 궤적을 볼 때 어쩌면 당연합니다. 틸다 스윈튼의 1인 2역은 제가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부분인데(틸다 스윈튼은 <옥자>같은 다른 출연작에서도 종종 1인2역을 한다), 선생님께서 좀더 설명해주시죠. 


참석자- 영화는 여성의 서사에 많이 포커싱을 했잖아요? <안토니아스 라인>처럼 어머니의 서사에서 딸의 서사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주기위해 1인2역을 한 게 아닐까요? 미셸은 엄마를 싫어했지만 결국 그녀는 제2의 마사다. 그렇게 살아가는 여성들의 서사를 제시하기 위해 1인2역을 시킨 게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발제자- 소설과 달리 영화에서 마사가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은 알모도바르 감독의 나이와도 관계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75세라는 나이는 인간이 결코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죽음에 대해 정말로 깊이 생각할 나이이기 때문에 원작과 별도로 감독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주제일 것입니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구해야할 시기입니다. 스스로를 향한 질문을 밀고 나가서 이러한 결말을 맺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사와 잉그리드의 관계였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고 분리되고 하는 과정이요. 상대적으로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 특히 마사를 둘러싼 프레드나 미셸, 데이미안같은 인물들은 알모도바르 영화 세계의 일관성을 구축하는데 필요한 인물들이지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저는 굳이 엔딩을 마사와 미셀의 화해로 끝맺을 필요가 있었을까? 마사를 배웅하는 잉그리드 장면에서 멈춰도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는 지극히 알모도바르적이기는 하지만 저에게 그렇게 흥미로운 부분은 아니었고 영화의 메인 줄기와 비교해 겉돈다는 인상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사회자- 왜 알모도바르가 굳이 딸 역할을 틸다 스윈튼에게 시켰는가,에 해답이 있을 거 같아요. 1인2역을 하지 않고 비슷한 여배우를 쓰면 되거든요. 그런데 굳이 틸다 스윈튼을 다시 쓴 데는 알모도바르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고 봅니다. 또 다른 잉그리드가 나타나는 거죠. 단순히 자식을 낳아서 DNA가 나타났다기보다는.. 우리가 죽더라도 영화 평론계는 끝나지 않고 누군가 다른 이들이 나타나서 다양한 평론을 하는 것처럼요. 우리가 죽더라도 그 죽음 안에는 대체할 만한 것들이 있다는거죠.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여겨도 그러나 죽음 이후에 어떤 것들이 우리를 대체하거든요. 그것은 희망이자 어찌보면 우리의 오만함을 다시 보게 하는 다른 대체들, 다른 똑같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이어간다는 메시지도 있다고 봅니다.


참석자- 사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마사라기보다는 잉글리드 아닐까요? 잉그리드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지닌 여자인데 절친인 마사의 죽음에 동행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잖아요. 마사가 자기의 죽음에 동행할 사람을 찾는 것은 영문학이나 중세극의 ‘에브리맨’을 떠올리게 합니다. 최후의 심판의 소환을 받은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자기와 죽음까지 동행할 사람을 구하는 연극인데요. 중세 연극의 고전 가운데 하나로 죽음 자체가 주제입니다. 구원의 문제나 죽음을 겪는 사람에 대한 작품으로는 이 영화 외에도 <더 위트>라는 영화가 있어요. 2001년에 나온 이 영화는 영문학과 여교수가 투병하면서 끝까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죽음 니가 죽으리라’ 하는 존 단의 형이상학 시를 인용하면서 끝납니다. <룸 넥스트 도어>는 제임스 조이스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동행, 그것을 통해서 산 자의 입장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고 또 그걸 통해서 우리 누구나 맞이할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연대감을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사회자- 그밖에 이 영화에는 무척 재미있는 설정들이 있는데요. 코치가 잉그리드에게 훈련방법을 가르쳐주는 장면 기억나십니까? 그 장면이 왜 나왔을까요? 


발제자- 제 생각인데 그 남자 헬스 코치의 몸이 상당한 근육질이잖아요. 처음에는 잉그리드가 잘 따라하지만 그 다음 가르쳐준 업그레이드된 동작은 잉그리드에게는 좀 버겁고 통증을 유발하는 동작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 장면이 상당히 우스꽝스러웠습니다. 알모도바르 영화의 아버지들, 데이미안이나 프레드, 또 이 트레이너까지도 제가 봤을 때는 상대방의 진정한 관심사를 이해하고 마음을 헤아리는데 무능한,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그런 캐릭터로 느껴졌습니다. 알모도바르 영화 속 남성군의 이미지 하나가 더 추가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알모도바르 영화의 남성들 가운데 과연 매력적이거나 긍정적으로 그려진 인물이 누가 있을까 생각해 봤는데 못 찾겠어요. 이 트레이너 역시 개그콘서트의 징맨처럼 희화화되거나 과장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알모도바르 영화에서 ‘과장’은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특히나 자기의 권위와 힘을 과장함으로써 더 웃음과 조롱을 유발하는 일들이 아주 많기 때문에 남성 근육질의 이미지에 대해서도 저는 알모도바르 감독이 모두까기 식으로 남성 캐릭터들의 이미지를 조롱 내지 희화화하고 있다, 즉 부정적인 캐릭터로 봤습니다.


경찰도 마찬가지였고요. 형사로서 경찰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당신의 판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잉그리드에게 이야기할 때 그가 드러낸 강한 확신. 결국 그도 남들에게 가르치는 일종의 교육자잖아요. 사법의 교육자이기도 하고 종교의 교육자이기도 하고 육체 훈련의 교육자이기도 한 이 남성들의 다양한 모습들은 다들 좀 희화화 돼 있다. 저는 좀 그런 느낌이 조금 더 강했습니다.


참석자- 이 영화를 본 사람들 중에는 존엄사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영화가 너무 아름답게 포장 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발제자- 자살을 존엄사라는 이름으로 미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우려는 앞으로 더욱 심해질 것이고 관련 논의도 점점 더 치열해질 겁니다. 사실 우리가 존엄사, 조력사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게 얼마 안 되잖아요. 이 논의들은 의학의 발달과 함께 진전되어 왔습니다. 신앙인들 가운데 특히 존엄사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 분들의 논리는 신이 주신 생명을 인간이 스스로 포기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인데 그것은 생명 윤리와도 연결됩니다.


제가 얼마 전에 읽은 책에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는데요. 저자는 의사 선생님이십니다. 그 분은 외과 의사로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많은 환자들을 겪어 왔는데 그중에서 CPR이라고 하는 심폐소생술을 세 번이나 실시한 환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기계적으로 CPR을 반복해서 두 번을 살려냈는데 세 번까지는 도저히 안되겠더랍니다. 의사 본인이 과연 이 환자에게 무의미한 CPR을 계속 하는 게 맞는가,라고 생각하는데 환자의 가족들, 딸들이 와서 “절대로 안 됩니다. 끝까지 해주셔야 합니다.”라고 하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목숨을 절대로 인간이 버려서는 안된다”고요.


의사는 이 순간 느낀 아이러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사실 지금까지 이분들은 자연적인 힘이 아니라 의학의 도움으로 수명을 연장해온 거거든요. 어찌 보면 의술 행위야말로 신의 섭리를 거슬러 신이 주신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하는 행위인데 그것을 당연한 전제로 자연 수명을 억지로 연장하는 것을 신앙의 이름으로 지지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라는 논지였어요.


얼마 전에 스위스에서는 질소를 충전시켜서 고통 없이 죽게 하는 자살 보조장치 ‘사르코’가 시판되었습니다. 스위스 안에서도 문제가 되서 다시 사용 금지가 됐다고 하지요. 의술이 고도화될수록 이런 논란은 앞으로 더욱 심해질 겁니다. 생명이란 무엇이고 천수(天壽)란 무엇인가? 생명의 중단과 연장에 의학적 개입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개인이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으며 어디까지 도움을 받아야 되는가,는 사실 매우 복잡한 이슈입니다.


참석자- 알모도바르 영화 중에 죽음과 연관된 작품 중에 ‘페인 앤 글로리’라는 영화가 있습니다.‘페인과 글로리’는 사실 연결돼 있는 삶과 죽음의 의미거든요. 삶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그 안에 어떤 영광스러운 면이 있다는 거죠. 악취를 맡아야 자스민 향을 더 생생하게 느낀다라고요. 주인공의 입을 빌려서 저는 알모도바르가 삶의 고통이나 또 삶의 어떤 뒤틀린 기괴함 욕정 같은 것들을 굉장히 깊이 천착했고 이것이 얼마나 악취나고 원색적이고 또 강렬한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반대인 죽음만큼은 조금 더 평온하게 조금 더 무채색으로 눈은 원래 색깔이 사실 없어야 되죠. 이 영화에서는 분홍색 눈이 내리지만 그래서 그런 식의 대비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참석자- 저는 그냥 단순하게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봤고요.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볼 때마다 어려운데 이 영화는 가장 편하게 다가온 영화였습니다. 죽음이 다가오는 시점에 거장이 범인들에게 들려주는 선물 같은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죽음에 대한 주인공의 선택이 미화됐다고 누가 말씀하셨는데 영화를 보는 사람이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해석은 각자의 몫인 것 같습니다.


저는 아, 저기 어디지? 저기 가서 죽고 싶다 이 생각했고요.일생을 종군 기자로 살아온 사람, 어찌보면 죽음의 본질을 경험으로 이해한 사람이 죽음에 대한 불안을 안고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죽음을 다시 볼 수 있는지 알려주는, 그래서 새롭게 죽음을 마주하면서 살아 남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남은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그 여행에 초대를 하는거죠. 그래서 죽음에 대해 가장 두려워했던 친구가 따라 나서는거고요.


저는 치료사로서 나는 나의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이며 누가 마지막 순간에 저런 부탁을 했을 때 나와 동행해 줄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품게 되었어요. 작년에 한국에서 열린 에드워드 호퍼 전시회 제목이 ‘길 위에서’였거든요. 히치콕이나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호퍼의 그림에 영향을 받아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설명을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이 영화가 주는 의미가 더 새롭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는 길 위에 내리는 그 눈이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축복으로 느껴지는데요. 그래서 우리에게 죽음이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데 위기에 대비하지도 않는 이 불안 내지 감각 없이 살아가는 세대에게,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게 더 이롭다거나 또는 죽음에 조력하면 안 된다는 식의 고정된 세계관에서 벗어나서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또 어떠한 생명의 신비가 이 세상을 다시 뒤덮고 죽음이 다시 삶으로 연결되고 죽었지만 다시 화해의 순간이 올 수 있을 것이라는 좀 희망적 메시지로 다가온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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