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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프레시 2024년 10월 월요시네마 <조커: 폴리 아 되>에 관하여2025-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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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프레시 10월 월요시네마 <조커: 폴리 아 되>에 관하여
… <조커>와 비교해서 본, 대중의 변화와 사회적 의미
10월 28일 정병기 영화평론가 발제, 20여 명 가까이 열띤 토론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국제영화비평가 ‘줌’ 세미나 열어
국제영화비평가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la Presse Cinématographique. 이하 FIPRESCI/피프레시) 한국지부는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 오후 8~10시, 줌(Zoom)으로 월요 시네마 세미나를 열고 있다. 지난 10월 28일 정병기 영화평론가가 토드 필립스(Todd Phillips) 감독의 <조커: 폴리 아 되>(2024)에 대해 발제했다. 이 세미나에는 20여 명 가까이 참여해 약 1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피프레시는 1930년 세계 각국의 전문영화비평가와 영화기자, 영화 단체들이 영화문화의 발전을 위해 결성한 단체이며, 한국지부는 1994년 창립됐다.
[발제]
<조커: 폴리 아 되>는 호평과 혹평이 엇갈리는 영화입니다. 이색적인 속편으로 높게 평가하는 평론가도 있지만, 관객을 비롯해 많은 평론가들이 전편에 비해 흥행과 예술성에서 꽤 부족하다고 평가하죠. 필립스 감독은 전편을 의식하지 않고 속편을 찍었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이 영화만큼 전편의 내용을 모르고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영화도 없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속편인 <조커: 폴리 아 되>만을 두고 논평하기보다 전편인 <조커>와 비교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네 가지 지점에서 비교하겠습니다. 첫째, 환상 혹은 망상과 현실의 구성, 둘째, 살인의 의미, 셋째, 주인공 심리와 정체성의 변화, 넷째, 주인공과 대중의 관계 혹은 대중의 모습. 사실 이 네 가지는 영화의 흐름과 메시지를 읽는 핵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상 혹은 망상과 현실의 구분과 혼란
첫째, 환상 혹은 망상과 현실의 구성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편 <조커>에서는 환상과 망상이 뒤섞여 있다가 뒤편으로 갈수록 분명해져요. 현실의 고통과 고난을 회피하기 위해 아서는 카니발이라는 예명을 가진 성공한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서 이웃집 여자 소피(Zazie Beetz)와 사랑하는 환상을 하죠. 어머니는 아서에게 행복하라는 의미에서 ‘해피’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고담시에서 최고의 금융업자이자 성공한 정치 엘리트이기도 한 토마스 웨인(Brett Cullen)의 사생아라는 망상을 심어줘요. 하지만 실제 아서는 아동 학대의 피해자이자 입양아인데다 멸시받고 조롱받는 광대일 뿐이라는 사실을 처절히 깨닫고요. 모든 환상이 깨어지고 난 후 그의 예명 카니발은 축제라는 의미의 카니블(carnival)이 아니라 식인하는 사람의 의미인 캐니블(cannibal)이 되고 말아요. 조커의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연상되죠.
자신이 존경하던 머레이 프랭클린(Robert De Niro)의 코미디 쇼에 초청받지만 그것도 그를 웃음거리로 소비하려던 것이었어요. 하지만 아서는 이미 어릿광대나 슬픈 광대 혹은 바보광대가 아니라 조커라는 살인광대로 거듭나 있어요. 성공한 코미디언으로서의 카니블 아서 플렉과 엘리트의 사생아라는 것은 환상이자 망상이었지만, 현실을 직시한 아서 플렉은 캐니블을 거쳐 조커로 변한 겁니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반면 <조커: 폴리 아 되>에서 환상, 망상, 현실은 뒤섞여 있는데요. 화려한 의상을 입고 할리 퀸과 함께 쇼를 하는 뮤지컬 장면은 환상입니다. 아서가 하늘을 보자 흑백 우산이 칼라 우산으로 바뀌듯이 말이에요.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는 코미디언 조커는 환상이자 망상이라는 얘기예요. 전편에서 소피가 착실한 아서 플렉을 원했다면, 속편에서 할리 퀸, 즉 리 퀸젤은 살인광대로서의 조커를 원해요. 영화의 구성에서도 뮤지컬은 환상만을 표현하지 않고요. 그들은 실제 대화할 때도 가끔 노래로 합니다. 나중에 아서가 리 퀸젤에게 노래가 아니라 말로 해달라고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이 이 혼란스런 구성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대사죠.
전편 <조커>에서 조커로 거듭난 것은 현실을 깨뜨리는 또 다른 현실입니다. 실제 조커가 된 후 아서의 감정실금은 해소된 것처럼 보이죠. 반면, 속편 <조커: 폴리 아 되>에서 조커는 지나가는 망상일 뿐 아니라, 이 망상을 부추기는 할리 퀸과 대중들은 조커와 함께 집단 감응정신병에 걸린 망상자들이에요. ‘폴리 아 되’(Folie à Deux)라는 부제가 이것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전편이 엘리트와 인민으로 구성된 사회 구조에서 엘리트에 의한 인민의 억압이라는 현실을 폭력적으로 타파하는 현상이 생겨나는 원인과 그 파행적 결과를 잘 보여준 영화라면, 속편은 그것은 하나의 망상에 불과한 것이며 무질서를 초래하는 폭력적 파행은 결국 자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반성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죠. ‘조커는 없다’라는 아서 플렉의 마지막 발언이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요.
범죄와 처단, 정신과의사 살해의 배제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둘째, 살인의 의미에 대해 보겠습니다. ‘조커’ 전편에서 아서가 살해한 사람은 모두 일곱 명이에요. 금융회사 직원 세 명, 광대회사 동료 랜든, 어머니, 머레이 프랭클린, 정신과의사, 이렇게 일곱 명이죠. 그런데 <조커: 폴리 아 되>에서 재판은 다섯 명의 살인에 대해 이루어지며, 나중에 아서가 한 번을 더 고백해 모두 여섯 명의 살인만 언급돼요. 나중에 고백한 어머니 살해도 분열적 인격인 조커로서의 행위와 연결성이 약하기 때문에 법정 다툼에서 드러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자백을 통해 드러내는 것은 아서의 심경 변화를 더 처절하게 보여주는 수단으로도 기능하죠.
반면 정신과의사 살해에 대해 속편은 끝까지 입을 다뭅니다. 사실 전편에서도 정신과의사 살해 장면이 직접 나타나지는 않는데요. 다른 장면으로 유추할 수 있을 뿐이죠. 하지만 아서가 정신과의사와 상담하고 자리를 뜰 때 그의 발자국이 피로 흥건한 것을 볼 때 살해는 일어난 걸로 보여요.
<조커: 폴리 아 되>에서 정신과의사 살해는 왜 언급되지 않는 걸까요? 할리 퀸이 정신과를 전공한 의대생이었기 때문일까요?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아요. 전편에서 우발적 살인은 지하철 안에서 일어난 두 번의 살인뿐이에요. 자신을 괴롭히는 금융회사 직원 두 사람에게 아서는 자기 방어를 위해 자신도 모르게 총을 발사한 겁니다. 이후 도망가는 한 명을 지하철 바깥까지 쫓아가 죽이고 머레이 프랭클린까지 죽인 것은 조커로 거듭나는 과정 혹은 거듭난 후 억압적인 엘리트층 혹은 엘리트층에 동조하는 자나 민중 내부 파괴자들을 처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행위죠. 금융회사 직원에 대한 살인도 나중에 조커가 된 아서에 의해 ‘처단’으로 정당화돼요. 정신과의사도 사회 엘리트로서 처단의 대상이 됐죠.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면서까지 목표를 추구하려는 극단주의적 포퓰리스트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전편의 정신과의사 상담 장면과 그 처단 장면으로 속편을 시작했다면 전혀 다른 구성이 됐을 거예요. 연출된 의도와 많이 달라졌겠죠. 그래서 그 장면을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전편 <조커>에서 살인은 극단적 포퓰리스트가 행한 의도적 처단 행위라면, 속편 <조커: 폴리 아 되>에서 살인은 미치광이 조커가 벌인 정신 착란 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변호인에 의해 언급되다가 심경 변화를 일으킨 아서가 뉘우치는 반사회적 범죄 행위에 불과합니다.
대자적 포퓰리스트의 갈등
세 번째 주인공 아서 플렉의 심리와 정체성 변화로 들어가겠습니다. 앞에서 첫 번째 비교 지점을 설명할 때 이미 조금씩 말씀드리기도 했죠. 즉자적 존재와 대자적 존재로 설명할 수 있는데요. 아서 플렉은 어머니가 해피라고 부르고 세상에 웃음을 주기 위해 코미디언이 되기를 꿈꾸는 가난하고 장애를 가진 청년이에요. 그는 세상의 멸시와 조롱을 참아내요. 하지만 자신의 모든 삶이 거짓이었고 세상의 모든 조롱이 엘리트 지배계층의 구조적 모순에 있다는 것을 깨닫죠. 구조적 모순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 속에 갇혀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 돌리던 즉자적 존재가 사회적 모순을 깨닫고 이를 집단적 정체성으로 극복해 나가고자 하는 대자적 존재로 변한 거예요. 조커는 그렇게 탄생했죠. 하지만 그 방법이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는 극단주의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전편 <조커>는 신자유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을 때 또 다른 극단적 저항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소격 기법으로 보여준 영화라고 할 수 있어요.
속편 <조커: 폴리 아 되>에서는 이 변화가 다시 거꾸로 진행된 것처럼 보입니다. 작품성과 관련해 여러 혹평들 중에서도 클라리스 파브르(Clarisse Fabre)가 Le Monde 지에서 “연금술은 작동하지만, 창의성은 찾을 수 없다.”라고 혹평했고, <씨네21>에서 이병현 평론가도 “정(正)도 없고 반(反)도 없는” 시리즈라고 깎아내렸어요. 하지만 안치용 평론가가 <오마이스타>에 게재한 평론에서 설명했듯이 아서는 자신을 따르던 한 젊은 수감자가 교도관들에게 폭력을 당해 사망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방법이 잘못된 것을 깨닫죠. 초기의 아서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재각성한 것으로 본 거예요. 저도 이러한 해석에 동의하는데요. 재각성한 아서는 조커라는 인격을 안고 가요. 사실 <조커: 폴리 아 되>에서 대립되는 인격은 아서 플렉과 조커라고 얘기되고요. 하지만 아서 플렉은 종합적인 인격이에요. 그 안에서 대립되는 인격은 전편에서는 해피와 축제 카니블이라는 인격과 식인자 캐니블이라는 인격이 충돌하고 종합돼 조커라는 각성이 생겨났다면, 속편에서는 조커라는 인격과 이를 부정하는 ‘다른 아서’의 충돌과 갈등을 통해 ‘새로운 아서’라는 재각성이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어요.
이 전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 전편에서는 아서가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오고 이후 자신을 조커라고 불러달라는 장면이라면, 속편에서는 아서가 자신을 따르던 젊은 수감자가 교도관의 폭행을 당해 죽게 되자 심경 변화를 일으키는 장면과 리 퀸젤에게 노래가 아니라 말로 해달라는 장면이에요. <조커: 폴리 아 되>에서 조커를 부정하는 ‘다른 아서’와 재각성을 통해 생겨나는 ‘새로운 아서’는 뚜렷한 명칭이 없습니다. 다만 ‘다른 아서’는 리 퀸젤을 사랑하고 자신을 따르는 젊은이를 측은해할 줄 아는 측은지심 혹은 인간애를 갖춘 아서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새로운 아서’는 이 ‘다른 아서’를 중심으로 조커의 사회 비판성도 수용한 새로운 존재라고 할 수 있고요. ‘다른 아서’가 또 다른 즉자적 존재라면, ‘새로운 아서’는 또 다른 대자적 존재입니다.
전편에서 탄생한 ‘조커’라는 인격은 식인 캐니블에 가깝게 극단적 존재로 종합되었으므로 폭력적 변증법의 결과예요. 사회적으로 볼 때 그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혹은 집단적 차원으로 종합됐고요. 반면, 속편에서 탄생한 최종적인 새로운 아서 플렉은 폭력적 방법에 대한 반성과 부정을 거친 온건한 변증법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차원이 다시 개인적 차원으로 옮겨간 종합이에요. 대자적 존재와 즉자적 존재의 이분법적 구분으로 본다면, 대자적 존재가 다시 즉자적 존재로 전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즉자적 존재가 이전의 즉자적 존재와 동일하지는 않죠. 하지만 대자적 존재인 조커 추종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후퇴일 뿐 아니라 민중 내부 파괴자의 모습으로 돌아간 거예요.
민주주의 위기의 집단화된 사회적 징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마지막 비교 지점인 대중의 모습과 주인공과 대중의 관계는 영화의 결말뿐 아니라 메시지와도 관련되는데요. 대자적 존재인 조커 추종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아서의 반성은 민중 내부 파괴자의 모습으로 돌아간 ‘후퇴’로 보입니다. 과연 감독도 그렇게 볼까요? 분명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재각성을 통해 변증법적 종합으로 거듭난 걸까요? 그렇게만 보는 것도 석연치 않아요. 아서 플렉이 변하는 것으로 영화가 마무리되지 않기 때문이죠.
아서를 살해한 수감자가 아서를 죽이면서 한 말은 “너 같은 놈은 죽어도 싸다”입니다. 머레이 프랭클린을 처단할 때 조커가 한 말, 그리고 조커 가면을 쓴 대중 속의 한 사람이 토마스 웨인을 죽이면서 한 말인 “너 같은 놈은 죽어야 해”와 같은 말이에요. 이미 대자적 존재로 거듭난 수많은 조커들은 조커를 포기한 아서 플렉을 처단하고 극단적 포퓰리즘을 이어갈 것으로 보여요. 이때 포퓰리즘은 “사회를 인민과 엘리트라는 두 진영의 대립 구도로 파악하며 정치는 인민의 의사를 가능한 한 직접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념”입니다. 그 자체로는 인민 주권을 주장하는 민주주의 본연의 이념과 가깝죠. 하지만 이것이 극단주의와 결합하면 반민주적 폭력성을 띠게 돼요. 할리 퀸도 그중의 하나겠죠. 물론 조커 가면을 쓴 대중의 모습도 상세히 들여다보면 한 가지 양태로만 나타나지는 않죠. 그를 태우고 도망가게 한 사람들, 심경 변화의 계기가 된 젊은 수감자 등이 다른 양상을 보이거든요. 이것은 또 다른 분석이 필요한 세부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아서 플렉은 극단적 포퓰리스트 대중의 한 사람이었죠. 그 한 사람으로서의 아서를 미분적 존재라고 한다면, 대중과 일체화돼 그 상징적 존재가 되었을 때의 아서는 적분적 존재라고 할 수 있고요. 이제 수많은 미분적 존재들이 이룬 적분적 존재는 아서를 떠나 독자적으로 움직입니다. 아서가 칼에 찔린 후 다시 환상으로 이어지는 뮤지컬 넘버에서 “자랑스러운 내 아들이 날 대신하리라.”는 노랫말은 이런 메시지도 포함하는 복합적 의미로 들려요.
게다가 아서를 죽인 인물은 그를 찌른 칼로 자신의 입을 찢는 듯한데요. 흐리게 처리돼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본 것이 맞다면, 그 행동은 아서처럼 되돌아가지 않도록 가면이나 분장이 아니라 아예 입을 찢어서 조커 얼굴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서 플렉처럼 반성하고 <조커: 폴리 아 되>처럼 전편의 폭력성과 사회적 악영향에 대한 반성문을 쓴다고 해도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사회적 징후는 더 이상 막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숨겨둔 것은 아닐까요.
[Q&A, 토론]
❍ 참가자 1: 배트맨이 아니라 조커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탄생했는데, 그게 바로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예요. ‘폴리 아 되(Folie à Deux)는 무슨 뜻일까요. 공유정신병이란 뜻이에요. 망상을 두 사람이 서로 공유하는 심리 현상이죠. 조커와 그를 사랑하는 할리 퀸에게는 공유정신병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과연 그럴까,하는 게 이 영화의 의문점이에요. 감독은 뒤집어서 얘기하는 것 같아요. ‘너희들이 <조커>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환상은 정신병이야. 나는 이것을 모두 뒤집어 버리겠어.’라고 말이죠. 조커가 그토록 매력적인 이유는 조커를 우리가 억압한, 무의식 속의 또 다른 자아로 봤기 때문이에요. 굉장한 슬픔을 감추고 있으면서도 사회 전복적이고 폭력적인 그런 캐릭터라고 느꼈던 거죠. 영웅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왕에게 직설을 날리지만 그것을 웃음으로 포장할 수 있죠. 그런데 <조커: 폴리 아 되>는 이 모든 조커의 의미를 뒤집었다고 생각해요.
❍ 참가자 2: 정치사회학적으로도 접근하는 새로운 방향을 본 것 같아 놀랐습니다. 저는 조커와 할리 퀸의 관계에 대해 더 궁금했는데 언급이 없었던 같아요. 할리 퀸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 발제자: 할리 퀸은 추종자의 한 사람으로 봤어요. 할리 퀸은 아서 플렉 자체를 좋아한 게 아니고 조커 같은 인격만 좋아해요. 좀 과장을 한다면 아서 플렉이 죽은 후에는 그를 죽인 사람을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요. 할리 퀸은 조커로 상징되는 특정한 이념을 추종하면서 아서 플렉을 수단으로 생각한다고 볼 수 있어요.
❍ 참가자 2: 할리 퀸이 아서 플렉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었으면 아서가 진정한 뉘우침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어요.
❍ 참가자 1: 놀랍게도 할리 퀸의 모습이 <조커 1>을 봤던 관객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할 수 있어요. <조커 2>가 주는 메시지 중의 하나는 ‘꿈 깨’라는 거예요. ‘조커는 없어. 너희들 마음 안에 있는 악과 통쾌함, 웃음과 비극, 그 모든 걸 던져서 만들어낸 조커가 있는데, 그건 너희들이 만들어 낸 꿈일 뿐이야.’라고 관객에게 말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참가자 3: <조커 2>가 재미는 없는 게 맞아요. 그런데 영화사적으로 보면, <조커 2>가 더 야심적이고 실험적이어서 가치가 있는 것 같아요. 마이클 치미노(Michael Cimino) 감독의 <천국의 문>(1980) 같은 이른바 ‘저주받은 걸작’에 비유할 수도 있어요. 뮤지컬로 제작되어 영화의 환상성을 자기 반영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예요. 마지막에 아서 플렉을 한 수감자가 죽일 때 환상이 완전히 깨지는데, 이게 영화가 관객한테 환상을 심어주는 메커니즘하고 똑 같아요. 뮤지컬로 환상적 장면을 연출하다가 ‘여러분 이거 사실은 영화입니다.’라고 그 환상을 깨버리는 거죠. 브레이트적 소격 효과를 뮤지컬로 과다하게 만든 다음 마지막에 조커를 아예 죽여버려요. 어떻게 보면 고다르가 만든 ‘조커’ 같은 느낌이에요.
❍ 발제자: 영화사적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선생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뮤지컬은 환상만을 포현하지는 않아요. 영화 속 현실에서도 노래를 불러요. 이 영화는 환상과 현실을 섞어놓는 방법을 구사했어요. 저는 환상을 깨려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환상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봤을 때 망상일 수는 있지만 환상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들의 망상이 집단화되면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현실로 드러난 겁니다. 누군가 혹은 영화가 반성문을 쓴다 한들 이제는 더 이상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영화는 오히려 한번 더 뒤집은 게 아닐까요.
❍ 참가자 4: 저는 서사적 측면에서 아쉽게 느꼈습니다. 할리 퀸이 아서 플렉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외롭고 소외당한 아서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할 때 깊은 비애를 느꼈어요.
❍ 참가자 1: 레이디 가가가 과연 이 역할에 적합했는가를 묻고 싶습니다. 미스 캐스팅이 아닌가? 토드 필립스라는 감독은 뛰어난 영화를 만든 감독이 아니에요. <조커 1>은 소가 뒷걸음질로 쥐를 잡듯이 우연히 잘 나온 걸작으로 끝나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어요. <조커 1>은 이후에도 필립스 감독에게 족쇄가 될 수 있다고 봐요.
❍ 발제자: 레이디 가가가 소비 내지 소모되었다는 평론도 읽었습니다. 저도 캐스팅의 문제인지, 레이디 가가의 문제인지, 어색하다는 생각을 했죠.
❍ 참가자 5: 영화 서사에 대한 생각인데요. 약자들도 존중받고 잘 살아야겠다는 심리와 저항이 두 영화에 표현된 것 같아요. 할리 퀸과의 사랑을 포함해 그러한 염원들이 환상으로 끝나고 무너져 내릴 때의 상실감은 너무 클 거예요. 그것이 허망하게 사라진 다음에는 무엇이 펼쳐질까? 영화 속에서만이라도 그런 기대를 하고 있다가 영화관을 나오면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느낀다면. 감독이 어떤 의도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다각도로 해석할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 참가자 3: 김은남 선생님 말씀과 연결해 아까 했던 말에 조금 보태고 싶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면 현실이라는 걸 알고 다른 감정으로 전환되잖아요. <조커: 폴리 아 되>는 불이 켜지기 전에 이미 그런 경험을 하게 만드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상업영화에서 시도했다는 것이 더욱 놀랍고요. 영화가 매끄럽지 않은 것 자체도 이게 영화라는 것을 관객에게 알려주는, 어쩌면 교육하는 게 아닐까요. 너무 너무 비싸게 말이죠. 제작사에게는 악동같은 영화예요.
❍ 참가자 1: 정치학적으로 영화를 해석한 독특한 시간이었습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원조 포퓰리즘의 비애를 안고 우리를 구한 가장 박해 박은 자라는 점에서 예수와 비슷하다는 생각도 드네요. 안치용 선생님도 썼듯이 저에게도 더 깊이 들여다 보는 시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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