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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프레시 2024년 9월 월요시네마 <트위스터스>에 관하여202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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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프레시 9월 월요시네마 <트위스터스>에 관하여
… 인류세 시대의 영화를 이야기하기
9월 30일 김경수 영화평론가 발제, 60여 명 열띤 토론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국제영화비평가 ‘줌’ 세미나 열어
국제영화비평가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la Presse Cinématographique. 이하 FIPRESCI/피프레시) 한국지부는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 오후 8~10시, 줌(Zoom)으로 월요 시네마 세미나를 열고 있다. 지난 9월 30일 김경수 영화평론가가 정이삭 감독의 <트위스터스>(2024)에 대해 발제한 뒤 참가자들이 총 2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이번 줌 세미나에는 60여 명이 참여했다. 피프레시는 1930년 전 세계의 전문영화비평가와, 영화기자, 각국의 영화 단체들이 영화문화의 발전을 위해 결성한 단체로, 한국지부의 경우 1994년 창립됐다.
'트위스터스' 포스터. 사진 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왜 이 영화를 보아야 하는가?-Cli-fi 서사의 시대
미국에서는 정이삭 〈트위스터스〉(2024)가 개봉한 직후 둘러싼 논란이 생겼다. 영화 곳곳에 과학자와 기업가의 거래, 재난 피해자의 재산으로 돈벌이하는 기업가, 황폐화된 시골 농장, 전례 없는 규모의 재난에 파괴당한 생태계 등 기후 위기 시대를 둘러싼 징후가 가득한데도 영화 안에서는 기후위기가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이삭 감독은 이에 “영화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배제하려 했다”라고 답했다. 이는 전략적인 선택에 가깝다. 정이삭 감독이 의도했든 아니든 과거엔 재난 영화라 불렸을 법한 영화가 지금은 기후 위기의 알레고리로 독해되고 있다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기후위기는 지금 영화를 보는 통로 중 하나다. 이미 우리가 기후 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기 시작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지구온난화라는 말이 일반화되기도 전에 UN에서 기후 열대화global boiling이라는 신조어를 제시할 정도다. 2015년에 체결된 파리기후협정에서는 지구의 각 국가가 협력해 지구 평균 기온의 1.5도 상승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1.5도 상승은 막을 수 없다는 전망이 팽배해 있다. 이에 따라서 최악의 폭염과 장마 등으로 이미 정치권에서도 기후가 중요 의제로 떠오르는 중이다. 이미 소설에서는 기후픽션Cli-fi이라고 불리는 소설 장르가 도입되면서 날씨와 서사의 연결고리를 물색하는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롤랑 바르트가 한 말대로 “날씨는 이데올로기”다. 우리는 날씨를 통해서 사유할뿐더러 날씨의 영향권 아래에서 살아가는 중이다. 또 바다나 나무 등 자연물도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영화도 이러한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다. 이미 Cli-fi라고 이야기되는 영화가 여럿 논의되는 중이다. 〈퓨리오사〉와 〈매드맥스〉 등 블록버스터 영화는 기후 위기로 이미 망가진 황무지wasteland 장르를 그려냈다. 〈퓨리오사〉의 경우 전쟁으로 인해서 세계가 멸망하더라도 그 후에도 생존을 위해 자연과 여성을 파괴할 것이라는 에코-페미니즘에 기반한 테마를 그려낸다. 반면 〈택시 드라이버〉의 각본가이자 로베르 브레송 영화를 연구한 감독 폴 슈레이더의 〈퍼스트 리폼드〉는 환경파괴를 외적인 상황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그는 〈어느 시골 본당 신부의 일기〉의 구도 안에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속 라스콜리니코프를 보는 듯한 반-영웅Anti-hero를 그려내며 환경파괴를 인류의 실존적인 위기로 다룬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나폴레옹을 위시로 한 서구적 영웅주의를 접하고 노파를 죽이듯, 이 영화 속 톨러(에단 호크)도 환경주의자를 만난 후 종교계와 기업 등에 분노해 퍼포먼스적인 자살을 시행하려고 한다. 환경은 외적이든 내적이든 인간다움에 상흔을 내고 있고, 그 너머에는 이 상황이 불가역적이라는 종말론적 사고가 깃들어 있다. 이처럼 기후 위기에 대한 불안과 우울, 그것을 이미지로 포착하려는 생태적 사유는 영화 한가운데에 깊숙이 반영되는 중이다.
영화 감독 가운데에서도 생태적 사유를 강조하는 이도 늘고 있다. 〈그린 나이트〉를 감독한 데이빗 로워리는 〈인디와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누군가 내 영화에 생태주의적 해석을 한다면 기어이 동의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본인의 영화에 깃든 생태주의를 긍정했다. 〈돈 룩 업〉을 감독한 아담 맥케이는 “5~6년 전에 급격한 기후 온난화의 구체적인 과학적 사실과 위험성을 깨달았고 이 영화(Don't look up)를 통해서 이를 경고하려고 했다.”라고 이야기했다. 〈돈 룩 업〉은 기후위기 자체라기보단 기후위기를 둘러싼 온갖 반응을 운석 충돌이라는 전형적인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돌려서 우화적으로 그려내는 영화다. 가짜 뉴스와 과학자에 대한 불신과 음모론 등 온갖 반응은 기후위기에 대한 반응과 직결된다. 다만 이런 반응은 일부에 불과하다. 한 매체의 조사에 따르면 할리우드에서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250편의 영화에서 기후 위기의 존재 여부를 분석한 연구 결과 영화 중 32편(12.8%)에서만 기후 위기가 존재하고 그 중 24편만(9.6%)에서만 등장인물이 기후 위기를 인지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기후 위기에 대한 담론이 생기는 중이지만 기후 위기를 직접 언급하기에는 아직은 부담이 큰 듯하다. 정이삭 감독이 이야기했듯이 영화가 기후 위기에 대한 해석, 즉 정치적 해석과 기후 위기에 대한 계몽으로 환원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또한 블록버스터 등 큰 규모의 영화는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선과 악, 문명과 자연 등 이분법적인 대립 구도가 있어야 하는데 기후 위기 담론은 경계를 무너뜨리며 진행되기 때문이다. 〈트위스터스〉(2024)의 매력은 토네이도(적)와 과학자(아군)이라는 이분법을 반복하지 않는다. 대신 토네이도라는 실존적 조건을 두고 부딪히는 두 과학자, 그리고 유튜버라는 세 캐릭터의 대립 구도로 재구성한다.
〈트위스터스〉 원작과 〈트위스터스〉의 차이-자연을 해석하는 두 프레임
재난 영화가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90년대부터다. CG의 혁신적인 발전으로 인간은 우주나 사이버스페이스 등 가상의 공간을 그려내는 것은 물론 스크린 안에서 자연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연출을 가능하게 했다. 그 이전까지 영화에서 자연은 인위적으로 기후를 연출하지 않는 한 통제가 불가능했다. 데이비드 린의 〈라이언의 딸〉과 〈아라비아의 로렌스〉 등은 기후와 자연, 인간이 한 데에 어우러져 있다. 〈라이언의 딸〉은 촬영 현장에서 불어닥치는 폭풍 한가운데 인물이 위치해 있어서 인물이 자연에 감응한다는 느낌을 안긴다. 소마이 신지의 〈태풍클럽〉도 마찬가지다. 태풍은 캐릭터의 억압된 혼란을 불러오는 마술과 같은 순간을 선사한다. 인위적으로 연출하지 않기에 캐릭터와 그들이 발 디디고 서 있는 풍경 사이에 마술적인 삼투가 가능해진다. 이는 로케이션에서 촬영되었기에 인물과 풍경이 무대와 거기 앞에 서 있는 인간으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인상을 남긴다. 오히려 풍경에 인물이 들어가 있다는 감흥을 준다.
이에 비해서 〈사랑을 비를 타고〉는 어떠한가. 스튜디오에서 쓰는 강우 장치를 인물의 심상으로 연출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작품이다. 자크 드미의 〈쉘부르의 우산〉 오프닝은 기후를 인위적으로 연출함을 드러낸다. 쉘부르 시의 군중이 색색깔의 우산을 쓰고 있으며 카메라는 이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부감 숏으로 찍는 중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카메라가 구름의 시점에 있다는 것이다. 세트에서 비를 뿌리는 장치를 쓰고 있으며, 카메라는 비를 뿌리고 있는 장치를 은폐한다. 대신 물방울이 노출되면서 빗방울이 보인다. 기후가 조작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근대 소설에서 말하는 풍경론과 이어져 있다. 일본의 문학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 근대문학의 탄생>에서 회화의 기하학적 원근법을 객관과 주관을 발명한 장치로 서술하고 있으며, 여기서 근대문학에서의 풍경이 탄생했다고 본다. 원근법은 하나의 점에서 풍경을 보는 투시도법에 근간하고 있으며, 문학에서는 화자의 관점을 거쳐서 자연이 관찰되는 주관적인 풍경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원근법이 탄생하기 이전의 종교화는 풍경을 서사에 최소한의 당위만 제공한다. 원근법이 탄생한 이후 풍경은 일정한 시공간에 있는 객관적인 대상으로 묘사된다. 근대문학은 이를 삼인칭 객관적 시점 서술로 계승한다. 즉 근대 문학은 풍경을 인물이 움직이는 배경으로 고정하면서 탄생한 셈이다. 풍경은 인물이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실존적 터전이자 심상과 이어져 있다. 스튜디오 영화는 자연을 인위적으로 만들면서까지 그 위에 서려 한다.
CG는 스튜디오에서 그려진다. 레프 마노비치는 CG를 도입한 뉴미디어의 영화를 키노 브러시(그리는 영화)라고도 이야기한다. 〈포레스트 검프〉의 오프닝을 생각하면 편하다. 깃털이 동선을 그리며 정확히 캐릭터의 앞에 살포시 내려앉는 것이 자연에서 가능한가? 아니다. 깃털은 무작위로 날아가고 말 것이다. 이런 CG 이미지의 핵심은 할리우드의 자본이다. 〈투모로우〉에서 토네이도가 가장 먼저 부수는 사물 중 하나는 할리우드라는 기표다. 할리우드만이 할리우드를 파괴할 수 있는 자연을 연출할 수 있다는 자만으로 보인다. 이러한 영화 속 자연의 위대함은 자본의 위대함을 자연이라는 대리물로 드러낸 것에 불과한 셈이다. 96년에 제작된 〈트위스터〉를 포함하여 90년대 유행한 재난 영화는 모두 할리우드의 기만적인 스펙터클 위에 서 있는 셈이다.
90년대의 재난 영화는 자연물에 동선을 더하면서 인위적인 풍경으로 만든다. 더 정확히 말해서 캐릭터의 동선을 차단하고, 캐릭터를 궁지에 몰아세우는 괴물로 등장한다. 〈단테 스피크〉에서 용암이 그 사례다. 하물며 〈투모로우〉(2004)에서는 한파가 바닥에 빙하를 그리며 인물을 추적하는 동선을 지닌다. 기후 자체를 괴물화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때의 자연이 철저하게 CG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기후 위기를 처음 재난으로 그린 〈투모로우〉(2004)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트위스터스〉(2024)에서 인간에 영향을 끼치는 토네이도와는 다르게 토네이도는 블루 스크린에만 있어서 인물에게 어떤 물질로 번역되지 않는다. 강풍기로 날아오는 사물을 동원하지 않는 한 인물에게 그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는 셈이다. 〈트위스터〉에서도 마찬가지다. 오프닝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강풍기를 튼 다음 배우의 머리를 휘날리게 하면서 나무 파편을 CG 이미지를 그려내는 방식으로 재현한다. 배우는 파편이 튀더라도 상처를 입지 않는다. 이때 오프닝에서 날아가는 조의 아버지도 문이 뜯어져 날아간 후에 CG이미지로 전환되는 방식으로 재현된다. 아버지의 신체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이처럼 CG로 그려지는 블루스크린 위에 그려진 존재만 파괴할 수 있는 셈이다. 이때 영화에서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 오갔던 상호 영향이 불가능해지게 된다. 서사 또한 문제다. 〈트위스터〉는 토네이도라는 통해 이혼 위기에 처했던 두 과학자가 재봉합하는 이야기다. 재난은 판타지에 불과하며 두 인물의 심상과도 이어져 있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테크 스릴러가 원작이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이는 SF가 아니라 과학기술을 둘러싼 인간 군상을 그려내는 소설 장르에 가까워서다. 이 작품에서는 자본과 과학자 사이의 갈등이 공동의 목표로 해결된다. 다만 이러한 안온한 관점은 자본이 과학 기술을 상품화하는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 아시모프의 말마따나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술과 구분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고도로 발달한 자본의 힘이 마술과 구분되지 않는 것이다.
〈트위스터스〉는 어떤 해결책을 드러내는가
〈트위스터스〉는 괴작이다. 각본가와 감독, 제작자의 상호 충돌이 두드러져서다. 이 영화는 처음에는 조셉 코신스키(〈탑건:매버릭〉) 감독의 원안으로 제작되었다. 조셉 코신스키가 하차하면서 대체자로 정이삭 감독이 맡게 된 셈이다. 이 영화의 말미에서 드러나듯이 토네이도가 영화관을 파괴하고, 영화관에 갇힌 관객은 마치 종말을 보는 듯한 공포에 떠는 중이다. 이는 〈탑건:매버릭〉에서 그려진 OTT나 숏폼에 밀려서 사라져 가고 있는 아날로그 필름에 대한 애수와 이어지는 감정선이다. 〈트위스터스〉는 켄터키에서 생긴 토네이도에 파괴된 영화관의 이미지를 노골적으로 인용하면서 영화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 영화로 고안되었을 것이다. 시골 출신의 토네이도 유튜버와 아날로그적인 실험실을 만드는 여성이 함께 영화관을 수호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감동적이다. 정이삭 감독도 내한 기념 기자회견에서 시나리오에서 이 순간만은 살려내고 싶어서 연출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토네이도로 무너지기 직전의 극장에서 〈프랑켄슈타인〉을 상영한 것은 감독의 선택이다. 〈프랑켄슈타인〉은 무한한 과학의 발전이 만든 괴물이 아닌가. 〈트위스터스〉에서 마지막에 들이닥친 토네이도를 생각해보자. 그저 그런 토네이도로만 남을 수 있던 토네이도를 크게 만든 것은 그 동선에 있던 화력 공장이다. 화력 공장이 재난을 가속화한 셈이다. 이때 하비가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큰 트위스터”라고 경악하고 있는 순간은 흥미롭다. 기후 위기와 공해 등 여러 인과가 뒤엉켜 우리 시대의 재난이 닥쳤다는 은유로 보여서다. 그 재난이 우리가 영화를 보는 터전마저 파괴할 수 있을 가능성까지 드러낸다. 정이삭 감독은 자연의 생동감을 살리는 테렌스 멜릭의 스타일을 계승했다. 〈미나리〉에서 인물이 수풀을 스쳐가는 연출 등은 인물과 자연 사이의 감응을 잘 드러낸다. 정이삭 감독의 생태적 사유는 자연을 다스리자가 아니라 자연을 길들이며 공존하는 방향으로 간다. 어차피 위기는 계속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로데오의 황소를 길들이듯이 말이다. 〈프랑켄슈타인〉을 상영하는 선택은 이 괴물을 우리가 막을 수 없고, 이 서사를 편히 볼 수 없음을 드러내는 급진적 선택인 것이다. 감독은 재난이 들이닥칠 공간을 부감숏으로 찍는데, 이때 카메라는 픽션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찍는 듯하다. 이 재난이 마치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듯이 말이다. 감독은 (재난의 피해자이면서 재난에 매혹된) 두 주인공이 피해를 입은 마을에 봉사를 하는 장면을 찍고, 재난으로 인해 황폐화된 땅을 차지하려는 자본가를 포착하기도 한다. 재난과 그 피해자를 둘러싼 반응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자본주의와 과학이 결탁되어서 재난 피해자를 구하려는 공공선을 향하는 과학을 막으려 하는 상황에서 기업가의 편이었던 하비가 결국 다시 독립된 과학자로 가는 선택은 우리가 최소한으로 지녀야 할 양심으로 보인다. 또 이런 상황에서 로맨스 서사는 불가능한 점도 이야기할 만하다. 〈트위스터스〉의 미덕은 두 주인공이 엔딩에서 사랑을 고백하려는 순간 토네이도 경보가 울리자 곧장 달려나가는 데에 있다. 기후 위기는 두 사람을 잇는 매개로 쓰이지 않는다. 함께 팀을 이루는 연대의 매개가 된다.
Q&A 및 토론
Q1. 영화를 안 보아서 어떻게 질문을 드려야할지 모르겠는데. 마지막에 정이삭 감독이 기후 위기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피했다고 하는데, 이 영화가 기후 위기의 원인에 대해서 어떻게 언급하는가? 인류세 자본세 논쟁인데 영화가 다 피해갔는가?
-발제자: 다 피해가고 불규칙적인 재난이 점차 늘어간다고만 이야기했다. 또 이것이 전략적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후위기는 정치적 단어고, 이 단어를 직접 언급했다가는 좌파가 아닌 쪽에서 트러블이 생길 수 있다. 모든 관객에게 이 문제가 보편적임을 상기하기 위한 선택인 듯하다. 실제 영화의 배경이 되는 오클라호마 주는 보수 진영이 우세다.
Q2. 96년의 영화와 24년 영화를 비교한 것도 중요하지만 중간에 찍힌 〈투모로우〉 등 영화를 분석한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CG 촬영 기법을 통해 재난을 분석했다. CG이미지가 주는 원근법을 무시하고 입체감이 없는 것에 대한 통찰이 놀라웠다. 보통 우리가 영화의 스크린을 생각할 때 오프-스크린의 이미지를 연상해서 생각하지만 그것이 없이 만들어진 CG이미지를 사용해서 재난을 그려내는 데에 익숙해졌다. 정이삭 감독은 촬영 기법을 통해 어떻게 동시대에 재난을 드러내고 있는가. 트위스터와 트위스터즈 제목의 차이도 흥미롭다. 아까 말했듯 토네이도는 하나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생겨날 것이기 때문에, 해를 끼칠 것이지만 더불어 살아야 할 것이기에 단순히 가해-피해 구도가 아니라 어떻게 이것과 더불어 같이 살지를 고민한 제목이라 보인다. 이를 연관해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한 의견이 있는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어떻게 96년도 원작과 24년도 영화의 기법이 다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발제자: 전적으로 동의하는 의견이다. 트위스터스의 개성은 재밌는 설정이 남자 주인공은 토네이도 카우보이라 자칭한다. 남자는 토네이도 안 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생계 수단으로 삼는다. 차를 고정시킨 다음에 토네이도가 진동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다. CG이미지가 깔려 있지만 CG이미지 안으로 들어가 자연의 공포를, 거기서 생긴 사물의 운동을 통해 대리 체험하게끔 한다. 이 연출이 정이삭 감독의 개성이라 생각한다. 자연 너머에는 무엇도 없으며, 거기엔 그저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자연물에 대한 낭만화도 방지한다. 아까 말했다시피 파편이 돌아다니는데 트위스터스의 파편은 인물을 덮친다. 실제로 파편으로 인해 상처가 생기기도 하고, 토네이도로 무너뜨린 건물이 인물을 덮치기까지 한다. 저 너머의 CG로 만든 재난 이미지가 이제는 감각되는 것이다라는 이중적인 효과를 만든다. 이런 연출이 기후위기가 담론 혹은 뉴스 속의 먼 소식이 아니라 체감되고 있다는 알레고리로 보인다.
Q3. 이 영화는 지독히 미국적인 가족주의와 미국만이 이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미국중심적인 영화로도 보일 수 있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발제자: 이 비판을 피해 갈 순 없지만 출구는 있다. 토네이도는 미국에서만 발생하는 재난이기에 당연히 미국을 배경으로 할 수밖에 없다. 또한 영화 전반에서 미국적인 코드를 강조하지 않는다. 심지어 영화 전반에서 미국적 코드를 파괴하는 연출을 거듭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되려 과학자 개인이 모여서 토네이도라는 미국적 현상을 해결하는 이야기다. 이들은 미국 정부의 도움이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한다. 이들이 자본을 버는 수단은 유튜브라는 무정부적인 매체이며 계속 노마드를 하면서 어디에 소속되기를 거부한다. 유튜브 플랫폼의 관심경제를 전유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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