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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959년으로의 여행 <아푸의 세계>2019-11-26
Review 11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1959년으로의 여행 2019.11.16.(토)~11.20.(수), 11.26.(화)~12.05.(목)

 

 

떠나감의 윤리: <아푸 3: 아푸의 세계>

 

이동윤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더 없는 충만함을 어떻게 설명할까. 아푸 3부작의 최종판인 <아푸의 세계>(1959)가 가지는 흥미진진함과 사려 깊음의 정체는 쉽사리 풀어내기 쉽지 않다. 물론 이러한 어려움은 1<길의 노래>(1955), 2<불굴의 인간>(1956)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 더 넓게는 사티야지트 레이를 비토리오 데 시카와 로셀리니의 네오리얼리즘의 궤를 계승한다는 것. 또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길의 영화의 정서적 스승으로 존재하는 영화(또는 감독)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 맥락에 동의하면서도, 그렇게 얘기해버리고 말기엔 이 3부작에서 분명히 짚고 넘어야 할 영화적 순간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테면 이 3부작에서 더러 없던 미학적인 장면이 등장하는 순간들이다. <길의 노래>에서 아푸와 누나 두카가 고모 할머니를 찾기 위한 잠깐의 동행 중, 끝내 그들이 다다른 곳에 갈대밭 사이를 통과하는 기차가 등장하는 장면이라던가. <불굴의 인간>에서 죽음을 앞둔 어머니의 암흑에 둘러싸인 시야에 잠시 등장하는 하얀 반딧불의 정체 같은 것들이다. 단출한 영화적 장치와 서사를 뚫고 나오는 이 신비로운 이미지들은 그 순간 과잉의 느낌 혹은 미학적 감각에만 몰두하고 있는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살아가고 버텨내야 하는 더없이 간결한 생의 의지를 수반한다.

 

  이는 <아푸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3부작에서 도무지 잊히지 않는 장면은 여러 군데 존재하지만 반드시 언급할 필요가 있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은 아푸가 지평선 너머 떠오르는 해를 바라본 뒤, 자신이 적은 소설 종이들을 던져버리는 순간이다. 이 장면 이전에 아푸는 아내 아파르나가 아기를 낳다가 죽은 사실을 알게 되고, 친한 친구이자 엔지니어로 해외에 나가있는 풀루에게 편지를 쓴다. 이 편지에서 아푸는 어디로 갈지는 몰라. 하지만 떠나는 이유는 자유롭고 싶어서야라는 글귀를 남긴 뒤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떠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아푸가 무언가를 목격하는 순간이다. 아푸는 기차의 빠른 움직임에서도, 황량한 바닷가 모래사장에서도 어딘가를 골똘히 응시한다. 그러다 그는 산속을 지나 정상에 당도하게 되는데 때마침 저 멀리 새벽 여명과 함께 태양이 떠오른다. 곧장 그는 무언갈 결심한 듯 배낭에서 자신이 써오고 있던 소설을 절벽 아래로 버린다. 그리고 그 종이는 숲과 산 너머로 조용히 떨어진다. 이 운동은 매우 고요하면서도 활력이 넘친다. 소설을 쓴 종이가 쇼트에 등장하고 사라지는 일련의 연속들은 아푸가 3부작을 통해 밟아온 여정과 흡사하다. 사실 이 버림의 행위를 자세히 따져보면 필연적 의지를 수반하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다. 무슨 말이냐면 소설이 쓰여진 종이를 버리는 아푸의 손동작이 매우 단호하기보단 아래로 떨어지는 이끌림에 손과 종이를 맡겨버리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로 떨어질지 알 수 없는, 쇼트를 관통하는 종이들의 장중한 움직임이 새겨진 장면이 3부작 전체를 대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3부작의 시작과 끝에서 비교적 명확하게 암시되고 있다. 돌이켜보면 아푸 3부작에는 어디론가의 출반은 있어도 어디론가의 도착은 등장하지 않는다. <길의 노래>가 아푸의 유년기, <불굴의 인간><아푸의 세계>가 소년기와 청년기를 담아내고 있지만, 각각의 막이 열리는 그 순간에 아푸와 그 가족들은 이미 어딘가의 세계에 정착하고 있거나 막 도착한 상태다. 도착점이 없는 세계는 또 다른 출발점으로 인도하는 초석을, 영화의 시작부터 암시하고 있다. 그렇기에 3부작 내내 등장하는 기차에 대한 암시는 영화들을 관통해내는 핵심 장치로서 기능한다. <길의 노래>에서 기차를 처음으로 대면하는 세계로, <불굴의 인간>에선 학업과 어머니를 연결해주며 거처를 이동하는 접촉의 장치로 등장한다면 <아푸의 세계>에선 아푸-아들을 이어주는 상징으로서 기능한다. 영화의 중반부, 아푸가 여정을 떠날 때 잠시 인서트로 등장한 기차 장면을 제외하곤 <아푸의 세계>에선 기차의 가시화가 앞선 두 영화보단 덜하다. 하지만 아푸가 수년 만에 아들을 대면하는 장면에서 그 두 사람을 잇던 매개가 장난감 기차였고 아푸의 아들을 돌봐준 할아버지가 엔딩에서 그 기차를 들고 있던 점을 떠올려본다면 아푸의 여정이 다시금 어딘가로 출발할 것이라는 영화적 암시는 꽤나 분명해 보인다.

 

  마지막으로 영화 내내 존재했던 죽음에 대해 언급하려 한다. 3부작에서 죽음은 아푸와 그의 가족들을 이동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다. 누나의 죽음-부모의 죽음-아내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만남은 아푸의 심리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킨다. 더 정확히 말해 영화에 등장하는 다섯 번의 죽음(고모 할머니, 누나, 아버지, 어머니, 아내)은 아푸에게 다소 가혹하게 보이기까지 하다. 또한 이 일련의 죽음이 등장할 때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 과정이 아푸에게 전해지는 과정에서의 연출이 영화의 전반적 어조와 다르게 굉장히 냉정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불굴의 인간>에서 아버지가 죽는 장면은 <길의 노래>의 고모할머니의 죽음과 더불어 아푸가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는 것이 등장하는 장면 중 하나다. 아버지가 아푸가 떠온 강물을 먹기 직전 숨을 거둘 때, 곧장 그 쇼트는 방금 아푸가 머문 강가의 새들이 허공을 가로지르는 쇼트로 전환되고, 곧장 거기서 아푸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다. 급작스럽게 난입해 들어오는 단호한 쇼트들 사이로 아푸의 슬픈 시선이 멈춰져있다. 죽음을 목격한 아푸의 슬픈 시선들은 영화 내부를 너머 3부작이라는 연쇄를 거쳐 <아푸의 세계>의 청년 아푸까지 이어진다. 다시 말해, 이 치열한 살아냄의 과정 속에 거기에 놓여있던 죽음의 흔적들을 통해 아푸는 다시금 살아내려는 의지를 지니고 버텨나간다. 죽음은 잠시 아푸를 정지시키지만 또 다른 세계로서의 여정을 이어나가는 원동력이자 새로운 세계를 향한 접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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