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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959년으로의 여행 <강박충동>2019-11-26
Review 11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1959년으로의 여행 2019.11.16.(토)~11.20.(수), 11.26.(화)~12.05.(목)

 

 

신의 손길, ()의 손길

- 리처드 플레이셔 감독의 <강박충동>

 

 

김현진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1. 리처드 플레이셔 감독의 1959년 작 영화 <강박충동>은 여러모로 범상치 않은 의외의 영화다. 영화를 보기 전에 접할 수 있는 정보들, 제목이나 줄거리라던가 영화 포스터에서 느낄 수 있는 이 영화는 이러저러한 영화일거야같은 선입견과 예상들을 전부 헛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누구라도 <강박충동>이 범죄 영화, 수사극, 스릴러 혹은 호러 장르 같은 영화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나쁘거나 위험하거나 어리석은 짓을 하고 싶은, 억제하기 힘든 충동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의 의미부터가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이란 제목과,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두 청년이 보이는 포스터에, 거기에 오손 웰스라는 이름, 어쩔 수 없이 그가 출연한 <3의 사나이><악의 손길> 같은 필름 느와르 영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그 이름까지 더해지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우리의 예상대로 쉽게 맞아떨어지는 호락호락한 영화가 아니며 마지막에는 졌다 졌어 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의외의 영화적인 한 방이 기다리고 있다.

 

2. 강박충동>레오폴드-로엡 사건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1924년 미국 시카고에서 일어난, 두 소년이 인근에 거주하던 어린이를 잔혹하게 살해한 살인사건이다. 부유한 가정 출신의 명문대 학생 두 사람이 단지 그들의 지적 능력의 우월함을 증명하고픈 목적으로 아무 죄도 없는 어린아이를 흉기로 살해한 이 사건은, 미국 전역을 충격에 빠뜨렸다. 사건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1948년 작 영화 <로프>, 뮤지컬 <쓰릴 미>로도 만들어졌고 바르베 슈뢰더 감독의 2002년 작 영화 <머더 바이 넘버>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

  <강박충동>의 이야기는 사건의 개요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시작되면 어느 집에서 몰래 타자기를 훔쳐서 차에 타는 두 청년이 보인다. 그들은 차를 몰고 가다가 술 취한 노인을 발견하는데 처음엔 실수로 들이받을 뻔 했지만 두 번째엔 진짜로 노인을 차로 들이받으려 한다. 흑백화면 속 어두운 밤, 청년의 불길한 웃음소리와 불길한 음악과 함께 불길하게 일그러진 모양의 타이틀 ‘Compulsion’이 뜨는 오프닝 장면은, 이 영화가 괴물 같은 인간들의 괴물 같은 범죄행위를 전시하는 영화가 아닐까라는 불길한 예감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플레이셔 감독은 그들의 범죄행위를 전시하는 것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에게 그런 순간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최선을 다한다, 는 이 말이 중요하다. 잔혹하게 살해당한 아이의 시체라는 끔찍한 사태는 검시실 침대 위의 하얀 천으로 가려져 있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아이의 축 늘어진 팔이 전부다. 관객에게 잔혹함을 목격하게끔 만든 다음, 자동 반사적으로 범죄자에 대한 분노를 품게 만드는 영화적인 수법을 일부러 배제한 것이다. 이는 이 영화의 윤리이며, 곧 영화 전체의 윤리이기도 하다. 대신 플레이셔는 가해자인 두 소년의 정신상태가 얼마나 불안하고 나약한지를 보여주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 플레이셔는 영화로 그들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며 관객들을 배심원의 자리에 앉히고 이성적인 정신으로 이 영화를 보기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태도는 오손 웰스가 그들의 변호사로 등장하기 전인 상영시간 1시간까지 이어진다.

 

3. <강박충동>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오손 웰스의 등장 전과 후. 이렇게 말하면 <강박충동>이 꼭 웰스를 위한 영화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지만 어쩔 수 없다. 그의 존재감이 너무 압도적이기 때문에 때론 상대 배우의 존재감마저 지워버리는 경우가 있다. <3의 사나이>에서 웰스가 등장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 그는 살인범인 두 소년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 윌크를 연기한다. 윌크는 실제 사건에서 레오폴드와 로엡의 변호를 맡은 유명한 인권 변호사 클래런스 대로우를 모델로 한 인물이다. 대로우의 아버지는 노예제 폐지론자였고 대로우는 사형제 폐지론자였고 지공주의(地公主義), 모든 사람은 토지에 대한 권리를 평등하게 가지고 있다는 사상의 옹호자였다. 그야말로 내추럴 본 좌파인 셈이다.

 

  윌크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영화는 법정 드라마의 국면으로 접어든다. 변호사가 피고를 변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살인자, 그것도 무고한 아이를 잔혹하게 살해한 살인자의 죗값을 에누리하기 위해 변호하는 일을 어떤 마음으로 봐야 할까? 그는 살인자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인가? 이런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윌크는 놀랍게도 스스로 두 소년의 유죄를 선언하게 되고, 그때부터 그들이 종신형을 받도록 변론을 펼친다. 이때 윌크의 변론이 그들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라고 해석하면 안 된다. 그들이 사형당하는 것은 악을 악으로 처단하는 악한 마음의 승리이자, 곧 그들의 승리가 되어버리는 것이며, 어떻게든 그들을 인도주의적인 관점으로 사형을 면하게 하고 참회와 속죄, 교화의 길로 이끄는 것이 선한 마음의 승리, 죄인을 진정으로 패배시키는 모두의 승리라고 변론하는 것이다. 윌크는 살인자들의 조력자가 아니라, 그들과 그들이 죽기를 원하는 사람들(영화를 보는 관객까지도 포함해서) 모두와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이를 연기하는 웰스는 큰 제스처도 별다른 표정 변화도 없이, 담담하지만 단호한 표정과 말투로 우리 모두에게 제발 인간으로서 죄에 사랑과 자비를 베풀자고 말한다. 영화는 이 순간부터 완전히 종교영화의 경지로 들어선다. 윌크는 변호사를 넘어서 어리석은 우리를 위한 사제가 되는 것이다. 사형제 찬반의 여부를 떠나서 웰스의 이 연기는 보는 사람을 홀린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강박충동>은 필름 느와르 스타일의 범죄 이야기로 시작해서 수사극과 법정 드라마 장르를 거쳐 사형제 반대와 인간의 사랑과 자비를 노골적으로 외치는 종교영화로 끝나는 놀라운 영화다. 범죄현장에서 한 소년은 그들을 잡히게 만든 결정적 증거, 그의 안경을 떨어뜨렸다. 결국 두 소년에겐 99년형이 선고된다. 사형을 면했는데도 분개하는 그들에게 윌크는 담담히 마지막 말을 던진다. “앞으로 몇 년 동안, 그 안경을 떨어뜨린 것이 신의 손이 아닌지 생각하게 될 거요. 그분이 아니라면 누가 그랬을까?” 이 마지막 대사야말로 이 영화가 사실은 종교영화라는 확실한 증거다.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강박충동>의 이 엔딩에 완전히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신의 뜻이라는 게 정말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에게서 사랑과 자비가 사라지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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