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전당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사이트정보
home  > 영화  > 영화와 비평  >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 죽음에 대한 성숙한 시선2023-02-08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 스틸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

죽음에 대한 성숙한 시선

 

김나영 시민평론단

 

  박재범 감독의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이하 <엄마의 땅>)은 한국에서 명맥이 끊기다시피 했던 장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조긍하 감독이 1967년 작 <콩쥐팥쥐>에서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스톱모션 기법을 활용한 이후 한국의 장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1977년 조수영 감독의 <흥부와 놀부> 단 한 편만이 제작되었을 뿐, <엄마의 땅>이 제작되기까지 무려 45년의 공백 속에 놓여 있었다.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스틸

 

  움직이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한 섬세하고 반복적인 작업을 요구하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제작방식이 긴 작업 기간을 요구한다는 점은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의 열악함, 부족한 공적 지원의 문제와 맞물려 오랫동안 장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제작에 어려움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엄마의 땅> 역시 총 제작에 33개월이라는 긴 기간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제작의 지난한 작업 과정을 방증한다. 카메라의 녹화 버튼만 누르면 자동으로 1초에 24장의 정지 이미지를 만들어내어 움직임의 환영을 구현하는 영화와 달리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한 프레임, 한 프레임 인간의 손을 거친 공정을 요구한다.

  흥미로운 것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인간의 개입을 요구하는 지점이다. 실사 영화가 사람이나 물체의 운동을 24장의 정지 이미지로, 24장의 정지 이미지를 다시 운동 이미지로 변환함으로써 촬영 대상이 실제 가지고 있던 운동을 재현한 것이라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정지된 물체를 손으로 조금씩 움직여 연속된 동작을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운동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에 가깝다. 한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일반적인 애니메이션과도 차이를 보이는 지점은 운동 주체가 현실 공간을 점유하는 물리적 실체라는 사실에 있다. 이는 그림을 그리는 것에 비해 움직임을 부여하는 대상을 조작하고 통제할 때 훨씬 더 많은 변수에 노출되도록 만든다.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

 

  이처럼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작업 공정과 다른 장르와의 차이는 영화가 디지털 기술의 발전 과정에서 겪고 있는 한 가지 쟁점을 상기시킨다. 오직 컴퓨터 그래픽만으로 세상에 없는 장소를 창조하고, 배우의 표정까지 원하는 대로 만들어내는 단계에 이른 디지털 기술 덕분에 반드시 실물을 화면에 담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사실은 영화의 본질을 실존의 흔적을 담아내는 특성에서 찾았던 이들에게 당혹감을 안기는 변화였다. 컴퓨터 그래픽만으로 구현한 화면이 애니메이션과 다를 것은 무엇인가. 실물을 이용하지 않으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아니라는 점에서 현실과 실감이라는 문제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더욱 근본적인 지점과 맞닿아 있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시각적 특성은 실감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은 대개 점토 등의 재료로 만든 인형이고, 아무리 정교하게 움직이고 아무리 많은 프레임을 활용한다 해도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 남아 있다. 결코 실감을 구현하는 데 목적이 없으면서 반드시 실물을 촬영해야 성립하는 장르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인 것이다. 섬세하게 제작된 인형에 대한 감탄, 특유의 끊어지듯 이어지는 움직임은 오히려 스톱모션 기법의 인장이 되어 또 다른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구현해내는 화면에서 느끼는 즐거움의 상당 부분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제작방식에의 매혹에서 기인하기도 하는 것이기도 하다.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스틸

 

  인간 문명의 위협 속에서 점점 자연이 품은 신화적 세계에 대한 믿음을 잃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엄마의 숲>의 주제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본질에 내재되어 있으면서 오늘날 영화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의 재현)과 가상(의 창조) 두 세계 간의 긴장과도 공명한다. <엄마의 땅>은 육체적 죽음에 대한 신화적 세계의 응답을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아름다운 질감으로 보여준다. 주인공 그리샤가 엄마를 구하기 위해 세속적 세계의 방해 속에 신화의 세계로 떠난 모험 끝에 결국 얻게 된 것은 죽음에 대한 성숙한 시선이다.

다음글 <어쩌면 우린 헤어졌는지 모른다>: 불안은 연애를 잠식한다
이전글 장엄한 시 한 편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