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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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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K 디지털 클래식 <순수의 시대>2017-07-20

 


순수의 시대라는 역설


이동윤 부산시민평론단


Review 4K Digital Classics 4K 디지털 클래식 2017.7.19.(수)~8.2(수)

 

<순수의 시대>(1993)는 스콜세지의 필모그래피에서 조금은 낯선 영화다. 이러한 인상은 멜로드라마란 장르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스콜세지 영화의 일반적인 정서들은 주로 갱스터 장르를 경유해 왔다. 말하자면 늘 시도해오던 갱스터와 거의 시도하지 않은 멜로드라마가 주는 간극이 이 영화가 가지는 위치를 더욱 흥미롭게 만들었다. 갱스터는 주인공이 몰락해야만 끝을 맺는 장르다. 스콜세지 영화 속 주인공들은 표면적인 갱스터 장르가 아니더라도 비극과 맞닥뜨리는 숙명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그의 최고작 중 하나인 <성난 황소>(1980)의 오프닝을 상기시켜보자. 장엄한 음악과 함께 주인공 복서의 모습이 슬로우 모션으로 그려진다. 이때 로프 줄은 마치 철창처럼 기능하며 주인공이 갇혀있다는 인상을 준다. 링이라는 감옥은 그를 최고의 자리로 이끌었지만, 결국 무대라는 철창에 갇혀 대중의 시선에 소비되는 쇼 비즈니스맨으로 전락하게도 만들었다. 또한 코너 한복판에서 상대 없이 내지르는 주먹은 권투 기술임과 동시에 끝내 비극을 향해가는 주인공의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스콜세지는 개인과 집단의 비극적 숙명을 미국이라는 사회와 결부시킨다. 그는 이탈리아 이민 2세이자 가톨릭 신자라는 자신의 뿌리를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거나 아웃사이더로 전락한 영화 속 캐릭터들에게 투영하면서 미국에서의 생존, 더 나아가 인물이 몸담은 공간의 역사적 근원을 추적해 나가곤 했다. 초기작인 <비열한 거리>(1973)의 오프닝 대사를 생각하면 더욱 명확해진다. ‘교회에서 회개하는 것이 아닌 길거리에서 회개해야한다.’ 다시 말해 성스러운 구원과 지독한 폭력이 양립되는 곳, 다만 교회라는 내부가 아닌 거리라는 외부에 방점이 찍힘으로서 이 곳이 생성된 역사가 피로부터 출발했음을 나타낸다. 특히 <갱스 오브 뉴욕>(2002)의 엔딩은 미국이라는 세계의 설립이 폭력과 주먹으로 얼룩지게 됨을 강조한다. 피로 물든 옛 선조들의 시체들과 무덤사이로 안개에 싸인 현재 뉴욕의 마천루들이 거대한 위용을 드러낸다. 언제나 세계 최고의 도시를 자처하지만 전복적인 폭력의 야망이 들끓는 공간. 그렇기에 뉴욕은 스콜세지의 영화세계에서 근본적 질문의 대상이 되어오곤 했다. 아마 이 지점이 <순수의 시대>라는 영화를 만들게 된 스콜세지의 출발점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영화로 돌아가 보자. 영화는 1870년대 뉴욕을 다루고 있다. 뉴욕에 거주하는 뉴랜드 아처(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메이 웰랜드(위노나 라이더)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명문가의 어른들이 둘의 결혼 시기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그 즈음 메이의 사촌인 엘렌 올렌스(미셀 파이퍼)가 남편과 이혼 후 고향인 뉴욕으로 돌아온다. 당시 분위기 상 이혼은 금기시 되어 있었고, 시대를 앞서가는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엘렌은 사교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지탄을 받게 된다. 한편 뉴랜드는 엘렌의 정신적인 멘토가 되면서 차츰 그녀에게 이끌리게 된다. 앞서 밝힌 대로 <순수의 시대>는 스콜세지 영화 같지 않다. 도발적인 폭력장면은 전무하고 영화의 대부분이 실내극 형식을 이룬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수많은 인물과 인물사이를 오고 갔던 교집합의 인간관계들, 더욱이 그것을 표현했던 감독의 냉정한 시선은 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앞모습으로 대체된다. 그가 곰곰이 생각하거나 무언가를 바라볼 때, 카메라는 그의 얼굴을 응시한다. 후반부 마지막 만찬 장면이 대표적이다. 식사 테이블에서 뉴랜드는 약혼자인 메이보다 엘렌에게 더욱 가까이 위치해 있다. 메이는 이 신에서 설정 샷으로만 잠시 등장할 뿐, 뉴랜드의 시선은 엘렌 근처에 머문다. 이윽고 사교계 사람들에 대한 뉴랜드의 회의적인 시선이 등장한다. 이때 그는 입을 꼭 다문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카메라는 뉴랜드의 얼굴을 응시하고, 뉴랜드는 사교계 사람들을 응시하며 각기 대응한다. 아마도 스콜세지는 당시 사회적 관계의 부조리한 질서와 규범들을 개인의 심적 갈등으로부터 확장시켜나가는데 중점을 둔 것 같다. 덧붙여 기존의 필모그래피와 다른 방향성을 지니고 있는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연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여러 영화에서 응축된 감정이 일순간 폭발하는 캐릭터를 주로 연기 해왔다. 무언가를 감추며 시니컬하게 진실을 외면하거나 누군가를 설득할 때, 정교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그의 연기는 거대한 체구와 한데 어울리며 극의 감정을 발화시킨다. <데어 윌 비 블러드>(2007)의 거짓 회개 장면이나 <링컨>(2013)에서 노예제투표 전날 그의 측근들과의 대화 장면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순수의 시대>에서는 앞선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와 연기를 선보인다. 스콜세지 영화에서 감정은 폭발해버리거나 폭발 직전 상태에 진입하며 종결된다. 반면 이 영화는 감정이 차곡차곡 응축되지만 종국에서 분출되는 것이 아니라 소멸된다. 이때 소멸은 뉴랜드가 지닌 감정의 소멸이라기보다 그를 그렇게 만들었던 시대상황에 대한 함의가 담겨져 있다.

 

<순수의 시대>는 제목 자체가 역설적 상황이다. 뉴랜드의 내면 자체는 순수함을 지향했지만 뉴욕이라는 세계, 그리고 그가 포섭된 관계들은 제목과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의로움과 새로움을 표방했던 뉴욕은 그 이면을 조금만 들춰내면 나와 다른 타인을 쉽게 배척하고 개인의 자유로움을 관습이라는 미명하에 비난하기 바쁘다. 미국, 무엇보다 뉴욕이 이주민이 만들어낸 일종의 타인의 세계임을 환기시켜 볼 때, 이주민들이 다시금 외부인을 배척시키는 것은 비순수성을 나타낸다. 스콜세지는 관습적 문화, 허위의식에 가득 찬 당대 뉴욕 상류계층을 자세히 묘사하며 순수하지 못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오페라 이후 열릴 만찬과 가십에 더욱 관심이 있으며, 오페라를 보는 것만으로 예술을 향유하고 있다고 믿는다. 더군다나 당대 뉴욕에 유행했던 오페라와 연회장의 왈츠는 유럽의 것이었다. 유럽으로부터 물리적 독립을 꿈꾸었고 이를 행하였으나 그들의 문화를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이 이질적인 결합은 스콜세지 영화의 주요 테마이기도 한 미국(뉴욕)의 태생적 한계에 대해 양가적 감정을 지닌 사례처럼 느껴진다. 뉴랜드는 나이가 들어 엘렌이 있는 유럽으로 갈 기회가 생긴다. 하지만 그는 집 앞에 도착했음에도 끝내 그녀를 만나지 않는다. 아파트를 바라보는 뉴랜드의 시선은 복합적인 감정을 담아내고 있다. 그는 뉴욕이라는 비순수의 공간에서 순수의 기억을 복원하고 그 시간 속에서 머무르려고 한다. 그렇기에 그가 엘렌을 만나지 않고 발걸음을 돌리는 것은 엘렌, 메이, 그리고 자신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행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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