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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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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거장전 2018 <신의 간섭>2018-06-19
review 6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21세기 거장전 2018 cineastes in the 21st century 2018.6.19(화) ~7.11(수)

 

 

 신의 침묵

 

이상경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산타클로스가 언덕을 뛰어오르고 아이들이 그를 쫓는다. 그는 아이들을 향해 선물을 던지기도 하고 구덩이 같은 곳에 빠졌다가 다시 일어나서 달아난다. 여기까지만 보면 소극의 한 장면이다. 그런데 그의 숨소리가 거칠고 아이들은 놀이를 즐기는 표정이 아니다. 그가 멈춰 서면서 얼굴이 클로즈업 되고 뒷걸음질 칠 때 가슴에 꽂힌 칼이 드러난다. 언덕 위의 그를 배경으로 카메라가 더 물러나면 ‘나사렛’이란 자막이 보인다. <신의 간섭>(2002)의 첫 번째 씬은 이와 같이 요약된다. 영화의 목표는 자명해졌다. 그가 왜 쫓기게 되었고 칼을 맞았는지 퍼즐을 풀 듯 보여주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거나, 이를 중요한 모티브로 삼아 남은 얘기를 전개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술레이만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첫 번째 씬은 나머지 씬과 서사적 연결고리를 갖지 않는다. 그가 누구인지, 아이들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 지역을 표시하는 팻말처럼 등장한 자막이, 이어지는 씬들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

팔레스타인 출신 감독인 엘리아 술레이만이 직접 연기하는 E.S.(영화 내에서 이렇게 불리지는 않지만 자막에 나온다. 감독 이름의 축약으로 보인다.)의 아버지가 두 번째 씬의 주인공이다. 그는 자동차를 몰면서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혼잣말로 쌍욕을 한다. 욕설의 내용은 우리나라, 심지어 미국과도 비슷하게, 가까운 가족과 붙어먹을 놈이라는 것이다. 길이나 차 안에서 반갑게 손 흔드는 지인들에게 자동차 유리를 올린 채 은밀하게 배설하는 욕설에 쾌감을 느꼈는지 그는 미소를 짓기도 한다. 소동의 유머와 공격성은 처음 두 씬이 모두 공유한다. 이 두 가지는 이어지는 씬들을 연결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한동안 나사렛의 일상처럼 보이는, 심심하다고 해도 좋을 서사에 경찰차가 나타나면서 전개의 흐름이 변화한다. 경찰이 옥상에서 빈병을 정리하는 노인을 검거하려 할 때 노인은 빈병을 던지면서 저항한다. 도로 파괴를 이유로 검거된 노인이 끌려 내려와서 가슴이 아프다고 주저앉고 경찰이 의사를 불러 달라고 요청하자 무선으로 들려오는 본부의 대답이 걸작이다. 노인의 말이 거짓이니 소아과 의사를 불러주겠단다. 유머와 공격성이 다시 등장하였다. 나중에 풀려난 그 노인은 경찰이 복구해 놓은 도로의 일부분을 다시 망치로 부순다. 하지만 영화 안에서 E.S.의 아버지와 도로를 파괴하는 노인의 분노와 불신의 원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웃에 대한 적대적 태도와 행동은 더 다양하다. 옆집 담 너머로 쓰레기를 던지다 이웃 여자와 한 판 붙는 남자, 차고 앞에 선 차를 치워 달라고 말하는데 상대가 무슨 차, 몇 년 형, 무슨 색깔, 차번호까지 묻자 번호판을 떼어 들고 와 읽어 주고 내동댕이치는 남자, 자기 집 옥상으로 올라온 축구공을 칼로 찢어 던지는 남자 등. 이것을 나사렛의 공기, 기후라고 불러야 할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한복음 1장 46절)는 성경 구절을 증명하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는 신약 시절, 예수가 수태되고 자란 나사렛에 대한 편견과는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과 고통의 연대기’라는 부제를 단 영화임을 감안할 때 강퍅해진 형제와 버림받은 땅을 바라보며 ‘고통’에 신음하던, 구약시대 예언자의 자리와 감독의 위치가 그리 멀어 보이지는 않는다.

영화가 1/3쯤 진행되어 E.S.의 아버지가 쓰러지면(역시 이유는 모른다.) E.S.가 나타난다. 그는 부제에 들어 있는 ‘사랑’을 증언하러 온 인물이다. E.S.의 연인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도가 있는 라말라에 살고 있고 E.S.는 이스라엘이 지배하는 예루살렘에 거주한다. 그들의 데이트 장소는 두 지역의 경계이면서, 라말라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차량을 통제하는 알람 검문소 앞 공터의 차 안이다. 이 영화의 다른 주인공들처럼, 어쩌면 가장 과묵하고 무표정한 그들은 영화 내내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손을 잡고 손가락만을 움직여 그들의 사랑을 표현한다. 마치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일상적으로 대화하고 사랑할 수 있겠어요, 라는 반문처럼 보인다. 데이트 장소가 장소인 만큼 연인들은 점령자들이 팔레스타인 동족들을 유린하는 꼴을 지켜보아야만 한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군무를 하듯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동작을 하는 동안 검문검색에 걸린 팔레스타인 남자 세 명이 두 손을 들고 등을 보이며 서 있다. 동족들은 굴욕적인 자세로 배경에 전시된다. 어떤 날은 노회한 군인이 자동차들을 세워 놓고, 승객이 입은 옷을 빼앗고, 사람들을 내리게 하여 차를 바꿔 태우며, 이스라엘 국민들 오래 사세요, 란 가사의 노래를 따라 부르라며 춤까지 춘다. 이 모든 장면들은 롱 쇼트, 롱 테이크로 기록된다. 연인들의 차 안은 손가락의 관능이 춤추는 곳이면서 동족의 고통을 증언하는 현장이다.

 

   이웃끼리 적대하고 반목하며 이민족에게 유린당하는 땅에서, 침묵하는 신을 대신하여 개입하는 존재는 환상이다. E.S.가 먹는 과일의 씨를 던지면 길가의 탱크가 폭파되고, E.S.의 연인이 지나가면 검문소의 초소가 무너져 내린다. 더구나 E.S.의 연인은 닌자 복장으로 이스라엘의 전사들을 쓰러뜨린다. 그녀는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의 물맷돌, 더 정확하게는 무릿매(투석구 sling)로 불리는 발사 장치를 사용한다. 후손이 똑같은 방식으로 선대의 원한을 되갚는다는 것. 맨몸으로 이스라엘 탱크에 맞선 1차 인티파다(1987-1993, 봉기 intifada)를 상징하는 돌팔매도 이 장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환상은 슬로모션으로 표지되고 통증만이 느껴지는 건조한 화면에도 얼마간의 열기가 스쳐 지나간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경계에서 두 연인은 팔레스타인의 지도자 아라파트가 그려진 풍선을 하늘로 띄워 보낸다. 경계를 넘어선 풍선은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국기를 뒤로 하고 가톨릭 성당인 올 네이션스 처치 지붕을 지나서 모스크의 부속 건물인 바위 돔(Dome of Rock)의 둥근 황금색 지붕 위를 맴돌다 멈춰 선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위치하여 경계를 넘나드는 풍선은 종교와 인종간의 교섭과 화해를 뜻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예루살렘에 대한 팔레스타인 사람의 비원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연인은 가장 화사한 웃음을 짓는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E.S.가 모든 곤경 앞에서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은 은밀하게 우는 일이다. 영화의 끝부분, 양파를 썰다가 눈물이 났는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눈물이 났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 둘 다 일 것이다. 이민족에게 핍박받고 자신의 땅을 빼앗긴 유대 민족을 위해 울며 기도한 선지자 예레미야가 또 겹쳐진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난을 적대적인 유대인의 고난에 빗대 사고하는 실례의 일차적 이유는 내가 팔레스타인에 대해 과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난 받은 예수의 고향 나사렛에서 칼 맞은 산타클로스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을 연결하는 이 영화의 책임도 없지 않을 것이다.

나를 포함해 팔레스타인에 대해 무지한 서방 사람들에게 헤브라이즘, 기독교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역지사지의 활용은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전달하는, 피할 수 없는 전략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랑이, 환상이, 눈물이 이 땅의 고통을 이기게 할 수 있을까. 그도 아니라면 신이 나서지 않는 땅에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나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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