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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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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 카잔 감독론2017-05-29

 


엘리아 카잔 Elia Kazan 

 (1909-2003)


김은정 부산영화평론가협회 회원

 Review 캐릭터 드라마의 제왕 엘리아 카잔 특별전 2017.5.19금~5.31수 / 6.8목~6.11일

 

"나는 검은 뱀이었다. 허물을 벗으며 몇 개의 인생을 살았다.” 1988년 출판된 자서전 인생(A Life)에서 엘리아 카잔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연극 연출의 마술사이자 리얼리즘 영화의 대부’, 메소드 연기법의 기틀을 닦고 1950년대 할리우드 스타를 대거 발굴한 감독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배신자 혹은 밀고자라는 오명의 꼬리표가 그의 생 마지막 순간까지 따라붙었다.

 

* 이방인 혹은 외톨이의 성공

 

어린 시절 엘리아 카잔은 외톨이였다. 1909년 터키 이스탄불에서 그리스인 부모 슬하에태어난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꾼 아버지를 따라 미국 뉴욕에 정착했다. 가난한 이민자 2, 왜소한 체격의 카잔은 시 외곽지역에서 고교시절을 보낼 때까지 변변한 친구도 없었다. 접시 닦기나 웨이터 일로 학비를 마련하며 윌리엄스 칼리지를 다녔고, 예일 대학의 드라마 스쿨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연극이 카잔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아니었다. 훗날 그는 그저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서 학교에 진학했다고 회고했다.

예일 대학의 한 스승이 그룹 시어터(Group Theater)를 소개했고, 졸업 후 그는 브로드웨이를 향했다. 8년여의 연기생활을 했지만 스스로 연기자로서 재능이 없다고 상심하며 연극계에서도 쉽게 뿌리내리지 못했다. 브로드웨이를 떠나려던 찰나, 무대라는 공간에서 연기가 아닌 다른 일을 찾아보라는 충고를 들은 카잔은 차츰 연극연출가로 변모해나갔다. 1941년 연출작 <카페 크라운>이 호평을 받으며 연출가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고, 특히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Tennessee Williams)와의 만남이 그를 연극계의 거물로 성장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윌리엄스 극본으로 무대에 올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등이 큰 흥행 성공을 거두며 엘리아 카잔은 승승장구했다.

 

* 영화적 성취

 

외톨이 어린 시절을 지나 거물로 성장한 삶의 반영일까. 영화계로 발을 옮긴 카잔의 첫 장편영화 <브루클린의 나무>(1945)는 가난한 브루클린 뒷골목에서 꿈을 잃지 않는 소녀를 희망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소녀는 신통찮은 돈벌이에 늘 술에 취해서 허황된 꿈을 피력하는 아버지를 항상 걱정했지만, 그가 사망한 뒤 많은 사람이 그를 좋아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좋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소녀의 꿈은 이뤄지고, 아기가 태어나고, 새 아버지가 생긴다. 베어낸 나무가 다시 자라듯 아이들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조망한 이 작품에서 특히 강조된 것은 상상력이었다. 소녀의 상상력은 현실을 견뎌내는 힘이자 작가라는 꿈을 갖게 된 근원으로 강조되었다.

영화계에서 엘리아 카잔이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940년대 후반 발표한 사회성 짙은 드라마에서 기인한다. 가톨릭 신부 피살사건의 전말로 드러나는 정치적 부패를 다룬 필름 느와르 <부메랑>(1947)을 시작으로, 신사협정이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미국 내 반유대주의와 인종차별을 비판한 <신사협정>(1947), 흑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과 흑인 여성의 정체성 혼란을 그린 <핑키>(1949), 그리고 도시 전역으로 퍼지는 흑사병을 막기 위해 폭력배, 경찰 조직, 언론 모두와 대립하는 형사의 모습으로 미국 사회의 이면을 꼬집은 <거리의 공황>(1950)에 이르기까지 그는 사회파 감독이라 불리며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이 시기 카잔의 영화는 민감한 소재를 과감하게 꺼내 현대사회의 병폐를 다루고, 그 속에서 활약하는 영웅적 개인을 주된 경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1940년대 후반 카잔의 또 다른 성취는 메소드 연기법의 도입과 할리우드 신예 발굴에 있다. 카잔은 1947년 리 스트라스버그(Lee Strasberg)와 함께 액터스 스튜디오’(Actors Studio)를 설립해 기존의 매너리즘 연기 전통과의 이별을 선언했다. 배우의 사적 경험과 심리를 극중 캐릭터와 동화시키는 이 연기법을 바탕으로 그가 발굴한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 몽고메리 클리프트, 폴 뉴먼, 나탈리 우드, 리 제이 콥 등은 1950년대 할리우드를 주름잡았다. 카잔의 1951년 작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연극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카잔이 이끌어 낸, 강렬하고 거친 남성이미지의 말론 브란도와 추하게 늙은 망상병 환자로 욕망과 슬픔이 교차하는 표정의 비비안 리의 연기는 오늘날에도 찬사를 보내기에 충분하다.

 

* 낙인과 정당화

 

1940년대 말, 할리우드도 매카시즘의 광풍을 피해가지 못했다. 의회의 반미행위조사위원회에 호출당한 영화인들 중 자신의 신념에 따라 침묵한 사람들은 소위 블랙리스트에 올라 할리우드를 떠나야했다. 그러나 사회파 감독으로 불렸던 엘리아 카잔은 이 광풍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았다. 그저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195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19524, 카잔은 청문회에 나가 자신이 1930년대 중반 공산당에 적을 두었었다고 고백하며 동료 8인을 공산주의자로 지목했다. 그가 지목한 사람들은 그룹 시어터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뉴욕타임즈할리우드에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라는 선동적인 글 기고하며 공산당 동료들을 보호하겠다고 내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자신이 당원으로 몸담았던 공산주의를 전체주의의 변종으로 여겼던 것일까. 이후, 카잔은 <혁명아 자파타>(1952)<로프 위의 사나이>(1953)에서 전체주의의 한계점을 지적하며 정치색을 드러냈다. 그리고 <워터프론트>(1954)<에덴의 동쪽>(1955) 등이 연이어 흥행하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부두 노동조합의 부패상을 그린 <워터프론트>는 카잔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버드 슐버그의 각본은 리얼리즘과 스타일리시한 갱스터 영화 스타일 모두를 가진 시나리오”(로저 에버트)란 호평을 받을 만큼 완성도가 높았다. 영화의 후반부, 노조에 몸담은 형 찰리와 범죄위원회에 출석하려는 동생 테리의 택시 뒷좌석 대화신은 여전히 회자되는 유명한 장면이다. 두 인물의 미디엄 숏과 클로즈업, 총과 손, 그리고 , 찰리!”라는 테리의 나지막한 말 한 마디는 분노와 슬픔, 비통한 형제애, 과거의 앙금과 다가올 운명의 그림자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명장면이다. 20대에 이 영화를 본 마틴 스콜세지는 훗날 <분노의 주먹>(Raging Bull, 1980)에서 오마주했는데, 주인공 제이크가 얼굴을 거울에 대고 그 유명한 대사를 한다. “그건 너야, 찰리.”

그러나 <워터프론트>를 향한 찬사 이면에는 이 영화가 카잔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데 이용했다는 지적이 있다. 테리의 고발은 노조는 물론 친형에게도 불리하지만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옳은 행동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마치 카잔이 자신의 행동도 신념에 의한 떳떳한 고발행위였음을 강변하고자 한 것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카잔의 후기작 <방문자들>(1972)에는 월남전에서 동료들의 잘못된 행위를 증언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 작품도 <워터프론트>와 같은 맥락으로 읽히기도 했다.

 

* 사랑을 갈망하는 인물들

 

타인, 특히 가족과 연인으로부터의 인정과 사랑은 엘리아 카잔 드라마의 중요한 테마 중 하나다. <에덴의 동쪽>의 칼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와 아들을 못미더워하는 아버지를 향해 강한 인정 욕구를 가진 남자다. 형의 연인 에브라의 사랑도 갈망한다. 가족 간의 갈등과 굴레, 청춘의 방황을 그린 이 영화는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그것이 어떤 좌절과 폭력성을 불러일으키는지 표현한 영화로 볼 수 있다. 음악소리와 총소리의 환청을 들으며 정신착란을 겪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랑쉬도 사랑에 목마른, 사랑받지 못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젊은이들의 서투른 사랑의 미완성과 가족 간의 갈등은 <초원의 빛>(1961)에서도 다시 반복되었다.

소박했던 남자가 정치적 힘을 깨닫게 된다는 풍자극 <군중 속의 얼굴>(1957), 댐 공사를 두고 정부와 개인의 갈등을 그린 <와일드 리버>(1960) 등에서 카잔은 사회파 감독의 면모를 이어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1960년대 카잔의 명성은 예전만 못했고, 그의 후기작들은 사회적인 메시지보다는 개인의 문제에 보다 집중한 프로젝트로 채워졌다. 가족의 이민사를 영화화한 <아메리카 아메리카>(1963), 자신의 뿌리인 그리스에서 촬영한 <방문자들>(1972) 등을 연출했고, 자신만만한 할리우드 제작자가 주변인들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한다는 내용의 <라스트 타이쿤>(1976)을 마지막으로 그는 영화계를 떠났다.

 

* 그러나 존경받지 못한 자

 

1999년 아카데미시상식은 평생공로상의 주인공으로 엘리아 카잔을 호명했다. 이에 여러 영화인들은 그의 수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비난했다. 이미 25년 전, 채플린을 그 명예의 전당에 올려 매카시즘으로 인해 그가 겪었던 고난에 사죄의 메시지를 보냈던 아카데미였기 때문이다. 한편 엘리아 카잔의 수상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매카시즘의 피해자였던 극작가 아서 밀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카잔에게 동정심과 동시에 두려움도 느낀다. 그러나 공로상은 그의 작품에 주어지는 것이지 정치성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끝내 과거를 사과하지 않은 카잔은 존경받는 삶을 사는 데는 실패했다. 그의 말년은 고독했다. 그러나 제작 현장을 지휘하고, 배우로부터 연기를 끌어내는 뛰어난 연출력으로 감독으로서의 역량 발휘에는 성공했다. 그의 드라마는 현대사회의 병폐, 사회적 변화에 맞서거나 휩쓸리는 사람들, 그리고 개인의 욕망과 양심 등을 이야기한다. 그의 인물들이 지닌 소외감, 인정과 사랑을 향한 갈망, 관계 맺기 실패의 두려움, 그리고 왜곡된 욕망은 보편적 인간의 감정이지만 그들에게서 우리는 카잔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그것이 돌아오지 않음을 서러워 말아라.” <초원의 빛>에 인용된 워즈워드의 시구는 카잔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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