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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시네마 XV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 <유키와 니나>2018-03-27
Review 3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월드시네마 XV World Cinema XV  2018.3.23(금) ~4.22(일)

흘러가는 모든 것들을 위해

스와 노부히로 -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와 <유키와 니나>

 

 부산영화평론가협회 구형준

 

거부할 수 없고, 의도하지 않은 것을 이해하는 것

 

고루한 말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의도하지 않은 여러 가지 것들을 삶 속에 품고 살아가야 한다.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들,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각들, 공감이 되지 않는 관계들,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일들, 그리고 언젠가는 찾아올 죽음. 이런 것들은 언제나 우리의 도처에 존재하며 때때로 우리의 삶에 침입하기도 하고, 그 근간을 뒤흔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타의적 사건들이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우리는 좋든 싫든 이 의도하지 않은 수많은 것들과 부딪히거나 뒤섞이며 살아가야하고, 언젠가는 받아들여야한다. 삶의 타의성이나 운명론에 대한 거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스와 노부히로의 영화가 그리는 세계를 보며, 조용하고 담백한 그의 영화가 언제나 이러한 ‘의도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깊은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일상적이고 보편적이지만 동시에 누구도 제어할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근원적인 고민들이 담겨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바꿀 수 없는 것, 돌아갈 수 없는 곳

 

우선 <유키와 니나>(2009)를 살펴보자. 유키는 부모의 이혼을 이해할 수 없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은 왜 끝난 것인지, 자신은 왜 일본에 가야하며, 왜 니나와 헤어져야 하는지,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은 온통 유키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다. 그러나 이해의 문제와 별개로 유키는 모든 것을 감내해야한다. 유키에게는 결정권이 없으며, 어찌하든 엄마와 아빠의 별거를, 니나와의 이별을, 원치 않은 이민을 다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9살 아이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해 보이는 이 변화의 폭풍 속에 결국 유키와 니나는 가출을 감행하고 만다. 그러나 여기서 눈에 띄는 점은, 조용하면서도 활발한 유키와 니나의 여정이 지속되는 동안, 영화가 어느 누구의 입장도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는 유키의 심리를 강조해서 묘사하지도, 혹은 인과관계나 잘잘못을 따지지도 않으며, 그저 담담히 보여주는 것에 집중한다. 가령 초반부 엄마가 니나의 집에서 유키를 데리고 집으로 가는 장면을 보자. 엄마는 갑작스레 이혼과 이민을 유키에게 고백한다. 분명 유키는 여기서 적잖은 충격을 받지만, 영화는 그러한 유키의 표정이나 심리를 묘사하기 위해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유키는 울지도 않으며, 담담히 엄마의 짐을 나눠들 뿐이고, 엄마는 매정하고 혹독한 사람으로 그려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저 도시 한 켠에 서있는 가로수나 전봇대처럼, 묵묵하고 담담하게 유키의 고난을 지켜볼 뿐이다. 즉, 여기에는 이혼과 떠남이 있지만 거기서 비롯되는 슬픔과 아쉬움이 누군가에게 직접 부과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런 상황에 처한 유키를 담담히 바라볼 따름이다.

 

이렇게 유키에게 이입하지도, 나아가 어느 누구의 입장도 대변하지 않는 이 영화는 가족의 와해를 그리면서도, 어느 누가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유키의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장면들은 예민하고 날카롭지만, 동시에 각자의 입장이 이해가 가도록 동등하게 구성되어 있고, 니나가 엄마와 설전을 벌이는 장면 또한 마찬가지이다. 결국 유키와 니나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갈등과 이별의 과정들은 씁쓸하고 서글프지만, 결코 비극이 되지 않는다. “넌 잘못이 없다”고 유키를 위로하는 아빠의 대사는 사실 등장인물 모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즉, 여기에는 옳고 그름의 윤리적 잣대와 신파적 비극의 관습 대신, 돌이킬 수 없는 관계, 돌아갈 수 없는 장소, 되돌릴 수 없는 사건들에 대한 진솔한 조망만이 있다. 유키는 이별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내 의지와 무관한 사건들이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것을 아파하고 있다. 유키는 누구보다 현실적인 자리에서 이 외로운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겨운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유키와 니나>가 무엇보다도 집중하는 지점은 이러한 외로움과 좌절을 감내하는 ‘아이’의 모습이다. 걱정이 없는 듯 보이는 평범한 9살 소녀의 삶은 사실 조용하게 흔들리며 요동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동시에 유키를 사정없이 흔드는 이 상황의 아이러니는 ‘아이’의 삶 속에 있는 혼란스러움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면서도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인간관계의 끈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운명이라고 말해지기도 하는 이러한 ‘어쩔 수 없는 힘’은 노부히로의 영화가 세상을 인식하는 하나의 통로 같은 것이다.

 

죽음에 대하여

 

이러한 맥락의 연장에서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2017)를 살펴보자. 영화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한다. 주인공인 장은 ‘죽음’을 연기(演技)하는 것이 고민이다. 그는 죽는다는 것이 무엇이며, 죽음이 다가올 때 그것에 어떻게 대면해야 하느냐고 한탄하듯 묻는다. 그런데, 적잖이 원론적인 이 질문은 비단 배우로서 죽음을 어떻게 연기할 것인지 만을 묻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은 불안하면서도 어딘가 결연한, 그리고 노쇠하면서도 동시에 천진한 장의 클로즈업으로 시작하고 끝맺는다. 즉, 단순하고도 깊은 정서를 내재한 장의 이 얼굴은 영화의 중심인 것이다. 그리고 관객에게 영화 속 이러한 장의 얼굴은 단순히 한 극중 인물의 이미지로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영화 속에서 장이지만, 또한 동시에 수많은 영화를 경유해 여기에 다다른 장 피에르 레오이며, 동시에 황혼기에 접어든 한 노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영화 속에서 장의 얼굴에는 그러한 세 명의 인물이 겹쳐지듯이 나타난다. 단지 그가 영화 속에서 원로배우의 역할을 맡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엔딩에서 죽음을 거부하며 눈을 부릅뜬 장의 얼굴에는, 동시에 장 피에르 레오로서 자신이 일생동안 거쳐 온 영화의 얼굴들이 거짓 죽음으로 사라지기를 거부하는 숭고함이 서려있다. 즉 장(피에르 레오)의 얼굴에는 영화의 안과 밖에 존재하고 쌓여왔던 여러 가지 시간들이 겹쳐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복합적 역사를 경유한 죽음에의 질문은 결국엔 장의 얼굴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로 수렴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렇게 하나의 이미지를 통해 영화의 역사를 지나친 후 서두의 언급한, 의도하지 않았지만 불가피 한 것, 즉 ‘죽음’에 매우 입체적으로 다가가고 있다.

 

작품으로 들어가 보자. 장은 ‘죽음의 위험’이라는 팻말이 세워진 쥘리엣의 집에서 계속해서 잠이 든다. 그리고 잠에서 깨면 죽은 쥘리엣의 유령을 만난다. 여전히 고풍스럽고 우아한 모습을 간직한 쥘리엣의 집은 한편으론 어딘가 스산하고 쓸쓸하기도 하다. 반복적으로 잠에 빠지는 행위, 그리고 그 뒤에 찾아오는 유령(혹은 환영)과의 대화, 그리고 그것을 감싸고 있는 묘하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속해 있는 장은 7-80대의 나이가 죽음을 이야기하기 적절하다는 그의 대사처럼 죽음 속으로 아주 조금씩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집에는 정반대의 존재들도 있다. 갑자기 우르르 몰려와 공포영화를 찍겠다는 아이들은 활기에 차있다. 아이들은 죽음을 궁금해 할뿐 두려워하지 않으며, 귀신을 찍고 싶어 할뿐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귀신인줄 알았던 장에게 오히려 호기심을 보이며 다가가고, 이내 소란스럽게 영화를 만들며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노래를 합창한다. 여기에는 통제할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생(生)의 활력이 있다.

즉, 이 집에는 삶의 생동감과 죽음의 고요함이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이에 있는 장(그리고 장 피에르 레오)의 존재이다. 이렇게 말해보자. 배우로서 장 피에르 레오의 신체는 죽지 않는다. 그의 이미지는 누벨바그를 비롯한 여러 영화에 박제처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 장 피에르 레오는 죽는다. 실제 삶 속의 그는 과거 영화 속 모습과 달리 늙고 병들어간다. 죽음은 이제 추상적인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질병과 신체의 노화로 체험되는 구체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 속 장을 본다. 장의 얼굴은 늙어가는 인간 레오의 그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장의 얼굴에서 배우 레오를 본다. 그는 누벨바그의 현신이자, 영화의 위대한 산증인이기도 하다. 노부히로에게 장은 존경하는 배우 레오이겠지만, 아이들에게 장은 우연히 만난 인간 레오일 것이다. 그리고 장은 노부히로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동시에 아이들의 영화에 출연한다. 여기에는 배우 레오와 인간 레오, 그리고 영화 속 장이 공존해 있으며, 결정적으로 그는 지금 살아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한 연결의 끈이 바로 장의 이미지 속에 스며있는 것이다. 언젠가 죽을 것이지만, 지금 여기서 삶이 움직이는 한 순간을 노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쥘리엣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장과 아이들이 만든 영화가 해낸 일이다.

장이 아이들과의 시간을 보낸 뒤에도 딱히 죽음에 대한 해답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장과 레오, 혹은 영화의 안과 밖을 오가는 한 배우의 얼굴을 통해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순간을 경험한다. 우발성과 우연성이 켜켜이 쌓인 장과 아이들의 영화 만들기 속에는 누벨바그의 영화와 지금의 영화, 혹은 과거와 현재가 있고, 소란스러움과 고요함이 함께 있다. 삶이 있어 영화가 있고, 아름다움이 있으며, 또 죽음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죽음이라는 질문으로 출발하지만 이내 요란하면서 진중한 소동을 통해 죽음의 이면에 있는 삶을 비추고, 그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비춘다.

 

삶의 순간에 속한 아이들

 

이런 맥락으로 거칠게 요약하자면 ‘의도하지 않았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사건’이 노부히로의 영화가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별, 떠남, 죽음처럼 우리의 삶에 필연적으로 수반되지만, 동시에 항상 우리의 의도 바깥에서 발생하는 삶의 단면들을 조망하고 포착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매우 중요한 영화적 존재들이 있다. 바로 아이들이다. <유키와 니나>와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에 한해서 말해보자면, 아이들은 노부히로의 영화 속 세계를 구축하는 구심점이자, 영화가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추동력은 다분히 ‘아이’라는 존재가 가진 성질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노부히로의 영화가 ‘아이’스러워 질 때(혹은 ‘아이’스러움을 포착할 때), 이 ‘의도하지 않은 것’이 비로소 영화 속에서 삶의 한 형태로 명확하게 구조화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이’스러움은 정확히 무엇일까. 우리가 쉽게 생각해볼 수 있는 아이들의 특징이 있다. 아이들은 고도로 정제된 연기 보다는 덜 숙련되고 덜 통제된, 하지만 그렇기에 더 직관적이고 현실적인 연기를 한다. 물론 이것은 어떤 영화이냐에 따라 독이 될 수도, 득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노부히로의 영화에 한해서는 아이들의 이러한 특징이 빛을 발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가령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에서 레오와 아이들이 빚어내는 앙상블은 마치 베테랑 재즈 연주자의 잼(jam)연주를 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즉흥적이지만, 동시에 나무랄 데 없는 완전함을 지니고 있다. 이 영화가 가진 삶의 생동감은 상당 부분 이러한 아이들의 직관적인 즉흥성에서 빚지고 있다. 즉 이러한 ‘아이’스러움이 영화 속의 ‘삶’을 비췄고, 나아가 ‘죽음’ 또한 비추고 있는 것이다.

<유키와 니나>에서도 아이들의 직관적인 연기는 경이로운 순간을 빚어낸다. 얼핏 보면 유키는 거의 연기를 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항상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유키에게서는 격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유키의 담담한 연기는 오히려 유키가 겪는 외로움의 내적소용돌이를 은유적으로 내면화한다. 일상의 순간뿐만 아니라 숲 속을 배회할 때도, 환상 속에 들어가서 일본인 친구들과 놀 때도, 항상 똑같은 표정의 유키는 언제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동시의 유키의 내면은 시시각각 변하며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아이들의 통제 불가능성과 우발성, 우연성 그리고 정제되지 않은 연기가 빚어내는 ‘아이’스러움은 노부히로의 영화가 지닌 ‘의도하지 않은’ 상황들과 함께 만나고, 같이 합주되면서 소란스럽지만 고요하고, 일시적이지만 영원한 세계를 구축한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이별과 만남, 죽음과 삶을 동시에 존재하는 유기적인 것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레오가 아이들과 앙상블을 연주한 것처럼, 노부히로의 영화는 ‘아이’와 ‘의도하지 않음’의 앙상블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양면적인 것의 아름다움

 

어쩌면 노부히로의 이 두 영화가 자신의 세계를 직조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유키와 니나>는 철저히 영화 내부의 에너지와 분위기에 천착하는 반면,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매우 적극적으로 영화의 바깥에 형성된 (영화의)역사와 호흡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두 영화는 항상 우리의 옆에 존재하며, 언젠가는 우리를 송두리째 흔들어놓는, 거부할 수 없는 어떤 것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에 놓인다. 이러한 ‘거부할 수 없음’은 거부할 수 없다는 이유로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거부할 수 없고, 양면적인 것들로 가득 차있다. 죽음, 이별, 갈등, 떠남과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죽음이 있기에 약동할 수 있고, 추한 것이 있기에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으며, 이별이 있기에 만남이 존재한다. 또 영화도 끝이 있기에 시작할 수 있다. 간단한 진리이지만 자주 망각하곤 하는 삶의 원리를 노부히로는 진중하고 우아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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