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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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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메모리즈 2018 <어떤 여자들><더 파티><렛 더 선샤인 인>2018-02-27
Review 2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lost memories 로스트 메모리즈 2018 2018.2.27.(화) ~3.15.(목)


 

 

 

 

 

  

그녀들은 어떤 땅에 발을 딛는가.

-<어떤 여자들>, <더 파티>, <렛 더 선샤인 인>을 중심으로

 

이동윤 시민평론단

 

영화의전당 기획전인 로스트 메모리즈 2018’의 라인업에서 눈여겨 볼만한 것은 여성감독이 연출한 영화가 상당히 포진되어있다는 점이다. 그 중 소개하고 싶은 영화들은 켈리 레이차트의 <어떤 여자들>(2016), 샐리 포터의 <더 파티>(2017), 클레어 드니의 <렛 더 선샤인 인>(2017) 이다. 세 편의 영화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지점들은 각각의 영화 속의 여성들이 각자의 환경과 토양 안에서 내/외부의 세계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하며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 세 편의 영화 속 여성들이 어떻게 그들의 삶을 바라보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어떤 여자들>:공허한 풍경을 가로지르는 어떤 힘들 

 

레이차트의 영화 속 풍경들은 웨스턴 장르의 자장 아래에서 형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더 정확히 얘기하여 숲, 대지, 고원과 강물 등 자연의 원초적인 힘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그녀의 영화들은 미국의 풍경이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현재의 미국을 표상하는 장치들을 우회하여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예컨대 <믹의 지름길>(2010)의 광활한 풍경들은 남성이 자리매김하던 서부의 풍광과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카우보이와 폭력, 모래밭을 내달리던 거침없는 질주는 여기에 없다. 대신 서부는 자신들의 수용 범위 아래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버텨나가는지를 탐색하는 장소로서 자리매김한다. 그렇기에 달려 나가거나 쫓아가기보단 기어가는 듯, 끊임없이 걷는 행위가 집중적으로 반복된다. <어떤 여자들>(2017)<믹의 지름길>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인물과 카메라의 거리를 늘 유지하며 숏과 숏의 만남이 천천히 오고가는 이 영화에서 세 명의 여인을 연결할 만한 뚜렷한 연결고리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주목해야할 것은 풍경을 가로지르는 원초적이면서도 웨스턴적인 힘들이 곳곳에 배치되어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영화 속 세 인물들이 풍경을 바라보는 방식에 관해서다. 첫째로 지금 로라는 중년 남성인 고객과 차 안에 있다. 그녀는 운전 중이고, 어떠한 법적 도움도 받을 수 없는 남성은 처지를 한탄하며 울기까지 한다. 그녀에게 이 남성은 매우 성가시다. 하지만 로라는 창 밖 너머의 바깥세상을 전혀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는 지금 당장 이 앞에 놓인 남성을 어떻게 달래느냐를 고민하고 있다. 그 순간 영화는 다음 쇼트로 전환되고, 텅 빈 도로를 중심으로 지평선 끝을 향해 내달리는 자동차가 소실점처럼 사라진다. 로라의 감정을 공허하고 쓸쓸한 몬태나 주의 광야로 치환하는 방식은 그녀의 현재 상황과 교묘히 중첩되기에 이른다. 반면에 두 번째로 등장하는 인물 지나는 차창 너머의 풍경을 응시한다. 그녀의 시점 숏은 처연한 갈대밭과 앙상한 나뭇가지들 뒤로 자그마한 주거지역에 가닿는다. 로라의 최근의 목표는 이웃 집 노인의 사암(砂岩)으로 집을 짓는 것이며, 그렇기에 그녀의 시선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지난 수백 년간 열망한, 개척지로서의 서부 되기와 유사하게 느껴진다. 최종적으로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농장을 관리하는 여성은 서부라는 역사적인 장소를 보존하는 존재로서 등장한다. 영화는 말에게 모이를 주고, 청소를 하며, 농장을 관리하는 여성을 지속적이고도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나는 이 여인의 이름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잠시 로라의 에피소드로 우회하면 그녀가 건물 안으로 들어설 때, 그녀의 시선과 마주하는 곳엔 인디언 부족들이 춤을 추고 있다. 영화사적으로 웨스턴 영화들에서 이들은 대게 이름 없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돌아와서, 세 단락에서 전혀 연결성이 잡히지 않던 여성들의 행적에서 유일한 연결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바로 로라와 농장여성이 마주하는 잠깐의 순간이다. 레이차트가 이 이름 없는 농장여성을 마치 과거의 인디언들처럼 웨스턴의 현재를 보존하려는 역할로서 등장시키고 있다고 하면 다소 과장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선 두 여인들이 그 풍경에 거의 관심이 없거나, 실낱같은 열망이 남겨진 공간으로서 묘사하고 있던 것과는 달리 농장여성은 인물자체가 풍경 안으로 흡수되어있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 그렇기에 영화의 농장여성이 말에게 건초를 주는 마지막 장면에 도달하게 된다. 그녀는 이름 없는 존재인 동시에 이제 이 프레임 안에는 사람도 없으며, 그 곳을 지키는 개와 창문 밖의 지평선만이 쇼트를 지탱하고 있다. 몬태나 주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과거의 미개척지인 서부가 현재 얼마나 쓸쓸하고 처연하게, 그렇지만 이곳이 얼마나 굳건히 버티고 있는지를 바라보고 있다. 그 풍경에서 오는 직관적인 이미지도 그러하지만 이 곳 대지에 발을 딛고 있는 어떤 여인들의 상태도 그러하다. 먹고 살아가는 의식주, 자신 앞에 놓인 불편한 관계들을 처리하는 것, 호감을 느끼지만 끝내 포기하며 돌아서는 것. 그렇기에 레이차드의 영화들은 우리를 잠시 멈춰 세우게 하는 힘이 있다.

 

<렛 더 선샤인 인>:잡히지 않는, 실체가 없는 말들

  

클레어 드니의 <렛 더 선샤인 인>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가면(假面)으로서의 얼굴에 대한 시선이 담겨져 있는 영화다. 화가인 이자벨은 끊임없이 외로움을 느끼는 여성이다. 애인을 바꿔가며 만나고 섹스를 해도 이 외로움은 종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늘 피곤해하며 진짜 사랑을 하고 싶다고 중얼거리면서 스스로를 자책한다. 또 이 영화는 말의 영화이기도 하기 때문에 말과 말이 오고가며 발생되는 균열들이 영화를 지배한다. 두 장면을 언급하고 싶다. 이자벨은 지금 나체로 침대에 누운 채 공허한 표정을 지으며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다음 쇼트에서 그녀는 한 남성과 섹스를 시작하는데 그녀는 시종일관 남자에게 웃어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남성은 그 말을 들으면서도 앞에 남자랑은 금방 느꼈어?”라고 질문한다. 이자벨은 그의 뺨을 때리고 섹스는 종료된다. 또 다른 장면 역시 공교롭게도 섹스 장면이다. 몇몇의 남자에 싫증을 느낀 이자벨은 이혼한 남편 프랑수아를 집으로 다시 불러들인다. 그리고 섹스를 하기 직전, 이자벨은 프랑수아의 행동을 보고 말한다. “그 행동은 뭐야? 자연스럽지 못하고 거짓이었어.” 그녀는 또 다시 등을 돌린 채, 하지도 못한 섹스를 종료시킨다. 두 장면을 타고 흐르는 말의 요체는 진실과 거짓에 관한 것인데 전자는 상대의 행위가 설사 거짓이라도 가장하기를 요구하고, 후자는 경험으로 축적되지 못한 상대의 행위에 대해 거짓임을 주장한다. 이 여성에게 진실됨은 자신의 기분대로 춤추는 것처럼 불쑥 불쑥, 변화하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하다. 실재(實在)가 없는 가면놀이는 손쉽게 벗겨지고, 사랑의 실체(實體)에 다가갈수록 서로에게 상흔을 내며 상처를 입힌다. 종반부엔 이자벨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영화가 한 남성의 시점으로 전환된다. 이 중년의 남성은 방금 자신의 애인과 헤어졌다. 그도 왜 그런 것을 믿었을까.”라고 중얼거리며 자책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씬의 그 다음 장면에 있다. 이자벨이 그를 찾아온 것이다. 그는 아마도 점술가나 상담사처럼 보인다. 그녀는 그의 말에 구구절절 맞장구를 치고 마치 오랜 동료를 만난 것처럼 좋아하며, 복합적인 감정에 복받쳐 울기까지 한다. 그녀는 정말로 자신의 사랑과 삶에 대한 진실을 깨우친 것일까. 이 오고가는 말에 대한 진실 판단은 유보되어 도돌이표를 예고한 채 끝을 맺는다.

 

<더 파티>:기만과 거짓의 실내극

  

샐리 포터의 <더 파티>는 앞선 두 영화보다는 조금 급진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시각을 구축해낸다. 영화는 로만 폴란스키의 <대학살의 신>(2011)과 유사하게 실내극으로 진행된다. 자넷이 영국 최초의 여성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선출된 것을 축하하는 파티를 연다. 그녀의 파티에 초대된 사람들이 각자 숨겨놓은 비밀을 하나 둘 씩 꺼내기 시작하면서 <더 파티>는 곳곳에 배치된 요소들을 통해 블랙코미디 장르를 작동시킨다. 예컨대 남성들은 하나같이 무기력하거나 불안감에 쌓여있으며 주된 플롯에서 배제되는 존재로 묘사된다. 자넷의 남편 빌은 마루 중앙 소파에 앉은 채 자넷의 지시 없이는 거의 아무 것도 못하는 불구자처럼 보이고, 갓프리드는 소심하고 이상을 좇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청년인 탐 역시 마약에 찌들고 정신이 불안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들은 사건의 핵심처럼 여겨지는 복선들을 간직하고 있긴 하지만 단순히 도화선으로 작용할 뿐,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거의 없다. 반면에 이 소동극에서 더욱 강력하게 의견을 주장하고 사태를 해결하려는 쪽은 여성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이 영화가 남성-여성 권력관계의 역전에서 출발하여, 여성의 힘이 강조된 영화라고 보기엔 망설여지는 구석이 있다. 이 이야기가 향해 나아가는 목적지엔 복지부 장관으로 내정되었지만 정작 자신의 남편의 병은 알지 못하는 자넷의 아이러니한 상황,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기만과 거짓의 과정들, 엘리트주의의 민낯과 허상을 일곱 명의 배우들을 통해 웅변적으로 제시된다. 이를테면 빌이 친구 마사의 집에서 탐의 약혼녀인 마리안느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실토하는 시퀀스가 그러하다. 이 시퀀스에서 자넷은 마사에게 불륜의 상황을 알고 있었는지 질문한다. 동시에 마사는 정치 말고는 아무 것도 자넷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다고 응답한다. 이해관계와 기만, 거짓말이 오가는 정치판이 개개인에게 동일한 형태로 재현되는 순간, 이들은 정치적 관계에서 벗어난다. 그들은 동료로서도 균열되었기에 다가올 파국이 예상된다. 종국에는 인물들의 이성적 판단이 중단되고 분노와 증오로 변질된다. 'The Party'라는 제목의 뜻이 함께 모여 즐기는 파티와 동시에 정당을 뜻함을 생각해본다면, 이 작법은 꽤나 의미심장하게 들려온다. 허위와 기만의 소동극은 집 외부에서 당선이라는 의미로 성공하였을지라도, 집 내부에선 완전히 실패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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