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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 크리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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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오즈 '나루세 미키오 감독론'2018-02-14
Review 2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나루세+오즈 2018.02.11(일) ~ 02.25(일)


 

 

 

 

 

 

  

비정하고 고단한 삶의 소리들

김지연 시민평론단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속에서 들을 수 있는 몇 가지 소리가 있다.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골목에는 안마사의 낭랑한 피리소리와, 아마도 행상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반복적인 타격음이 주로 머문다. 이따금 국수를 배달하는 자전거도 지나간다. 광대나 악사들이 나타나 요란하게 연주를 하면서 유랑극단의 공연을 알리기도 한다. 비슷하게는 약장수도 있다. 그러면 아이들이 몰려와 조르르 그 뒤를 따르거나 구경꾼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라지는 소리도 있겠으나 새로운 소리도 더해진다. 확성기가 달린 트럭이 광고를 외치면서 번화가와 신작로를 누빈다. 근대화와 도시화는 기차 소리와 자동차 경적, 사이렌 소리도 가져온다. 모두 디제시스 공간 안에서 유별난 데 없는 그저 당대의 일상적인 소리들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것들이 종종 마을의 풍경에 정취를 더하는 효과음이나 사람살이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소음 이상으로 작동할 때가 있다. 다시 말해 소리들이 사건과 서사, 혹은 인물과 관계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평범한 삶의 소리들이 한산한 골목을 울리거나 담장을 넘어와서 집 안까지 파고들면 지금 여기에 있는 인물()의 삶, 또는 그 상황에서 발생하는 감정들은 격동한다. 그 형태는 고양(高揚)일수도 전환일수도 있다. <만국>(1954)에서 행상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타격음은 세 신에 걸쳐 흘러나온다. 그 중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다. 게이샤였다가 은퇴한 뒤에 부동산과 사채업 덕분에 부유하게 사는 오킨(스기무라 하루코), 어느 날 그에게 옛 남자 세키(미야케 본타로)가 찾아온다. 그는 오킨이 동의하지 않은 동반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다. 당연히 세키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다. 아침 댓바람부터 요란하게 문을 두드려서 어쩔 수 없이 오킨은 그를 집에 들인다. 타격음은 두 사람 사이에 젊은 시절 이야기가 오갈 때 잠깐 끊겼다가, 세키가 돈을 빌려달라고 본론을 꺼낼 때 다시 이어진다. 왜 내가 돈을 빌려줘야 되죠? 당신에게 줄 돈 없어요. 그는 차갑게 거절한다. 세키는 간절히 오킨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더 이상 대화는 없다. 세키의 시선을 따라 말없는 쇼트만 이어진다. 초라한 그의 얼굴이 오킨을 바라보고, 오킨은 외면으로 일관한다. 세키는 고개를 떨어뜨리다가, 이 광경을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식모 아가씨와 별안간 눈이 마주치게 된다. , , , , . 실내는 타격음으로 가득하다. 세키는 그 순간 오킨의 싸늘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일면식 없는 식모 아가씨 앞에서도 창피를 당했으며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작별인사를 남기고 일어나 휘적휘적 골목을 빠져나간다. 오킨은 그가 떠난 뒤에도 진정할 수 없는지 물을 마신다. 식모 아가씨는 나부시 미닫이문을 하나씩 닫은 뒤에 청소를 시작한다. 신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말이 없다. 소리만이 계속될 뿐이다. 한 시절이 누군가에게는 게이샤와 어울리며 그나마 잘 나가던 때로 기억되고,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잃을 뻔 했던 데다 남자를 믿지 못하게 된 끔찍한 계기로 기억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옛 여자에게 돈을 부탁할 만큼 나락으로 떨어진 삶 앞에서 참담함을 느끼고, 누군가는 목숨도 모자라 돈까지 빌리러 온 데 노여움을 느낀다. 그 순간 타격음은 사람들 각자의 들끓는 마음이 뒤섞인 용광로이자, 태연하게 이어지는 속되고 비정하고 고단한 어떤 삶들의 현장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소리가 좀 더 서사에 밀착하는 경우는 <흐트러지다>(1964)에 있다. 이렇게 작용할 수 있는 까닭을 엄밀하게 따지자면, 이 때의 소리는 일종의 이동광고로서 그 자체가 슈퍼마켓의 존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중반까지 트럭에서 내보내는 광고와 슈퍼마켓에서 흘러나오는 (광고에도 쓰이는) 음악소리는 다섯 차례로 확인된다. 앞서 타격음 때와는 다르게 발신자는 자신의 존재를 마음껏 과시하고 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우리가 보는 것이 시미즈야 슈퍼마켓의 광고다. 트럭이 현수막과 장식을 달고 기세 좋게 큰길에서부터 작은 골목에 이르기까지 동네를 한 바퀴 돈다. 확성기를 통해서 요란한 음악소리와 함께 짐칸에 탄 사람이 슈퍼마켓의 슈퍼세일과 같은 문구를 읊는 것이다. 이 때 소리는 비슷한 품목을 취급하는 소상공인들에게 내린 날벼락과도 같다. 그들은 근처에서 광고가 들려올 때 앞으로 먹고 살 일을 근심하고, 지나가는 트럭을 바라보거나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슈퍼마켓에 슬쩍 기웃거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소리는 작은 마을의 상권을 위협하는 공격적인 마케팅의 괴수에 그치는 게 아니다. 전근대적인 세계에 울리는 근대화의 알림음이기도 하다. 동네를 흔드는 슈퍼마켓의 광고 소리에 약이 오른 것처럼 괜히 오토바이 소리를 돋워보지만 그것으로 소리를 묻어버리기엔 역부족이다. 이 때의 소리는 시대의 변화란 불가항력이며 일상에 침투해서 종국에는 사람들의 삶을 바꿔버릴 거라고, 누군가의 입을 빌리지 않으면서도 드러나는 선언과 같다. 이 작은 동네에도 슈퍼마켓이 들어섰고, 앞으로도 계속 생겨날 것이다. 아니,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마작을 하고 파친코를 하고 국수를 먹는다. 그렇지만 동네 어딘가에는 바(bar)가 있고 카페도 있으며 그들은 자유연애를 하고 재혼을 하지 않는가. 배달 청년도 이제는 마을을 벗어나 선원이 되어서 세계를 보고 싶다고 했을 지경이다. 주인공들의 삶 또한 예외 없이 흔들린다. 코지(가야마 유조)는 슈퍼마켓의 출현에 맞서 지금 운영하고 있는 가게를 슈퍼마켓으로 만들어 보려고 알아보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누나들과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형수인 레이코(다카미네 히데코)가 일궈낸 가게니까 슈퍼마켓이 되면 중역으로 모셨으면 좋겠는데, 누나들은 새언니를 내보내거나 사원으로 쓰자고 한다. 남편이 일찍 죽고 집안의 살림과 가게를 도맡았던 레이코의 자리에도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레이코는 당연한 줄 알고 가족을 위해 살아왔던 자신의 지나온 삶이, 이제는 희생으로 보이는 시대가 되어버렸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래서 레이코가 훗날 이 집안을 떠날 때 그것들을 표면적인 이유로 지목하는 것이다.

 

고도의 가공과 정제를 거친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서 소리들이 그 세계를 생동하는 것으로 만드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는 이유는 현실 인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루세 미키오가 내보이는 그 현실 감각이 이 땅에 발 딛고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의 것에 가까워서 좋다. 이를테면 가족드라마 혹은 멜로드라마가 주를 이루는 그의 영화 속 사람들은 사랑에 살고 죽는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이 사랑만으로 연명할 수 없어서 일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더 정확히, 나는 영화가 안배하는 이상과 현실 간의 비율이 좋다고 말해야겠다. 생계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돈에 대한 이야기는 그 비중이 크든 작든 영화마다 빠지지 않는다. 주인공이 경제적으로 가장 고초를 겪는 영화라고 할 만한 <방랑기>(1962)에서 후미코(다카미네 히데코)는 버스 차장을 (월급) ‘45엔짜리’, 증권회사 직원을 점심도 제공하는 35엔짜리라고 지칭한다. 그가 좋아하는 글쓰기 역시 배고픔 앞에서 페이지 당 얼마짜리로 환산된다. 이 반찬은 얼마, 저 반찬은 얼마, 그래서 이 밥상은 얼마짜리. 굶기를 남들 밥 먹듯 하는 후미코의 계산은 얼마나 천연한지. 하지만 그보다 형편이 훨씬 나은 <흐트러진 구름>(1967)의 경우에도 이와 같은 감각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유미코(츠카사 요코)는 교통사고로 남편 히로시(츠지야 요시오)를 잃었다. 홀로 서고 싶다, 남편의 사망 보상금에 의지해서 살고 싶지 않다고 하는 유미코에 대해서 형부는 이렇게 응수한다. 돈은 다 똑같은 돈이야. 오즈 야스지로의 고결한 인물들은 결코 하지 않을 말이다. 뿐만 아니라 <흐트러진 구름>이 히로시의 죽음 이후를 다루는 방식 역시 빠르고 건조하게 전개되는 양상을 보인다. 마치 그런 것이 세상이라는 듯, 슬픔의 당사자를 제외하고 장례식장 바깥에서 애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심지어 자식을 잃은 히로시의 부모님까지도 유미코를 호적에서 제외시키는 편지 한 장 보내는 것 이외에 일체의 감정표현이 없다. 뜻하지 않게 사망사고를 낸 미시마(가야마 유조)도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장례식장 앞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풍경은 가해 측과 피해 측 사람들의 징계조치나 죽은 사람의 후임 등 업무의 향방에 대한 것들이다. 그리고 영화는 미시마의 인사이동, 지방발령에 따른 연인과의 결별, 무죄라는 재판결과로 신속하게 이어진다. 굳은 얼굴 속에 감추는 미시마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케 하는 것도 소리뿐이다. 문을 닫거나 열거나 관계없이 어느 집에선가 들려오는 피아노소리, 그리고 이후 그를 놓아주지 않는 과거를 소환할, 그의 운명에 대한 경보 같은,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이별이 가까워졌다는 것 정도를 뜻하는 사이렌소리. 그리고 영화의 종반부에 유미코에게 불러주는 노래가 있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는 쉽게 삶을 긍정하거나 위로하지 않는다. 자조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 세상은 기본적으로 고통과 슬픔과 불행으로 조성된 화합물이다. 그래서 인물들은 절망하거나 비탄에 잠겨도 무기력하지는 않고 대체로 멈추지도 않는다. 그런 것이 세상이니까 새삼스러울 것 없다는 듯이, 사람들은 파란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넘어졌으면 넘어진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그저 할 수 있는 만큼 나아갈 뿐이다. 그 원천은 그들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데 있다. 그렇게 자기의 실존을 직시하고 분연히 사는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속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모두 존엄하다. 그 태도에 경배를 보낸다.

 

* <흐트러지다>의 레이코는 여기서 예외일 수 있겠다. 레이코만은 코지의 죽음 이후 살아간다고 확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른 영화에서는 마지막 장면을 길 위에서 끝이라고 알리거나(<방랑기>), 속도가 다르지만 대부분 페이드아웃으로 마무리되는 반면에 이 영화는 레이코의 형형한 눈빛을 바라보는 클로즈업에 이어 검은 무지화면으로 끝난다. 거기에서 오는 단절감이 한 세계의 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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