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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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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안 클래식 <철도원>2019-06-28
Review 6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이탈리안 클래식 2019.6.29.(토) - 7.7.(일)

 

<철도원> : 이미지와 정서

 

이광호 (부산영화평론가협회)

 

    피에트로 제르미의 <철도원>(1956)은 널리 알려진 편은 아니지만 엄연히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계보를 따르는 영화다. 물론 네오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개별 작가의 인장을 희석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네오리얼리즘 사조가 택하고 있는 방식, 이를테면 세트가 없는 로케이션 촬영, 비전문 배우의 기용, 자연광을 활용한 촬영이라는 몇 가지 특징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철도원>이 비토리오 데 시카,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같은 감독들의 작품처럼 자주 회자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통상적으로 알려진 네오리얼리즘의 계보로부터 <철도원>이 살짝 선로를 이탈한다고 느끼고, 거기서 오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철도원>이 지적인 구조와 복선을 동원하는 플롯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 문장으로 정리될만한 단순한 서사도 아닌 것 같다. 이 말에는 부연이 필요하다. <철도원>은 이야기가 아주 복잡하거나 심층적이고 철학적인 탐구를 시도한다기보다는, 철도원 가족을 중심으로 사소한 일상의 드라마를 비교적 긴 시간에 걸쳐 펼쳐내고 있다.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1948)'가족 부양을 위해 자전거를 훔친다'라는 아주 단순하고 짧은 이야기를 선택한 후 그 표현방식에 골몰한 것에 비하면, <철도원>은 서민들의 이야기를 다루긴 하지만 우선적으로 기존의 관습적인 내러티브에 입각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쪽에 가깝다. 네오리얼리즘의 인장이라 불릴 만한 잉여적 사건, 중심 서사로부터 떨어져 어떠한 의미도 전달하지 않으면서 그저 현재성 혹은 시간성을 발현하는, 비경제적인 미학의 내러티브도 <철도원>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에 더해 <철도원>에는 카메라가 거리로 나서는 장면이 많지만, 의외로 실내 장면이 많은 편이며 그조차도 인물의 감정에 걸맞은 대단히 강한 조명의 대비를 활용하여 네오리얼리즘의 사실적인 표현과는 거리를 두는 장면이 상당하다. 거기다가 이 영화의 감독이자 주연인 피에트로 제르미는 비전문 배우가 아니라 실력 있는 배우가 아니었던가.

 

    이런 방식으로 <철도원>은 예술적이라고 평가받는 네오리얼리즘의 몇몇 영화들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이 영화가 그저 대중친화적인 영화로 인식되거나, 비평적 영역에서의 심층적 탐구가 미미한 것은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철도원>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대중영화이자, 부담 없이 감상할 수 있는 영화라고 해서 그것을 영화의 수준에 대한 은근한 비판이나 무시의 표현으로 이용하고 싶지는 않다.

 

비교적 탄탄한 드라마인 <철도원>에서 아마도 유일하게,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기억될만한 사물이 있다. 그것은 제목인 <철도원>에서 즉각적으로 연상할 수 있는 기차다. 왜 이 영화는 기차를 소재로 삼은 것일까. 사실 생각해보면 안드레아의 직업이 굳이 철도원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 영화에서는 철도에 대한 다른 구체적인 사건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당시 이탈리아 안에서 철도의 역사와 관련한 어떠한 이야기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열차가 안드레아의 일터이지만, 초반부 묘사되는 그곳에서는 고단한 삶이나 애처로운 서민의 애환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열차는 빠른 속력으로 달리면서 하나의 활기로운 운동으로 자리 잡는다. (창을 통해 보이는) 끊임없이 이동하는 기차의 외부와 달리 마치 정지된 것처럼 안락한 내부라는 두 가지 물리 상태의 대비가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느낌 때문일까. <철도원>에서 초반부 기차는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가기 위한 목적을 지닌 것도 아니고, 고단한 노동이라기보다는 간이 휴식소에 가까워 보이는 긍정적 분위기를 뿜는다. 도입부, 환한 대낮의 도심을 달리는 열차의 시점 숏이 보이고 열차가 정차하면 귀여운 막내와 안드레아의 포옹이 이어진다. 그러나 극이 진행되면서 안드레아의 딸 줄리아가 유산을 하자, 가정의 문제는 안드레아의 신경으로 전이되고, 그 감정적 동요는 맹렬히 전진하는 열차의 운동 시점 숏으로 구현된다. 전진의 맹렬한 운동은 변함없지만, 곧잘 불안을 내재하는 긴장의 움직임으로 변모한다. 요컨대 외견상으로 지각되는 움직임은 전진이라는 모티브를 공유하지만, 그 정서는 명확하게 변주되는 것이다.

 

    하지만 감정과 이미지는 일방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상호적인 관계다. 불안의 열차 운동은 자살자를 치이고 마는 또 다른 죽음의 결과를 낳으며(이미지가 서사에 영향을 준다), 뒤이어 비극은 안드레아를 '투쟁하지 않는 배신자'로 만든다. 승객이 없는 화물차 운전석에 들어앉은 안드레아에게는 어색한 조수가 동행하고, 내내 반복되던 열차 시점 숏에는 그간 없던 칠흑의 어둠이 기다린다(극 중 정서가 이미지에 영향을 준다).

 

    그런데 중심 사건인 열차 사고는 조금 더 복잡해 보인다. 구체적으로 복기해보면, 열차는 너무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으며 자살자는 하필 커브길에 위치하여 결국 죽음을 맞는다. 안드레아가 운행 도중 자살자를 치일 때, 그것은 그의 부주의라고 말할 수 있지만 철로 위의 인물은 아무리 숙련된 철도원이라 할지라도 어찌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치 숙명과도 같은 이 곤란함은 결코 개선되지 않는 철도 노동자 근무환경의 실체이기도 하다. 서사에서 개인을 억누르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은 세계에 실재하지만 결코 파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철로의 커브길에 숨어 있던 자살자라는 시각적 인지 불가능의 운명론과 맥락을 함께 한다.

 

    그러니 열차의 움직임이 멈추는 것은 서사에서 안정과 낭만의 작동이 정지하고 비극과 불확실성이 태동하는 일에 대한 일종의 예고다. 빠르게 전진하며 철도를 가르는 열차의 시점 쇼트는 이 영화의 모든 관습적 드라마로부터 멀어져 오로지 현재성으로 빛나는 짧은 순간이지만, 열차 사고 이후로 영화는 안드레아에게서 열차를 떼어두고 그를 고립시킨다. 그것을 서사를 비껴가는 영화적 순간과 자태로부터 인물을 거리 두게 하는 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철도원>은 다소 독특한 방식으로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탐구하는 네오리얼리즘의 계보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가능케 한 것은 서사에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완전한 현재성으로 실재하며 종종 변주되는 열차의 시점 숏이다. 물론 그것은 영화 전체로 보자면 아주 짧은 순간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아하고 귀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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