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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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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시네마 2020 - 세계영화사 오디세이 <욜>2020-05-18
세계영화사의 위대한 유산, 월드시네마 2020 2020.5.19.화~6.10.수 매주 월요일 상영없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와 떠나는 '세계영화사 오디세이'

 

 

 

<욜>

김필남 (부산영화평론가협회)

 

  그들이 그곳에 갇혔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들은 죄수의 번호가 아니라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일마즈 귀니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의도적으로 이름으로 불릴 수 없는 그들에게 이름을 부여한다. 귀니는 분명 이름으로 불렸을 그들을, 하지만 현재는 이름이 삭제된 채 번호로 살고 있는 그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영화 <>(1982)의 거대한 여정을 알린다. 귀니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그 이름들을 역설적이게도 영화의 오프닝에서 또박또박 불러 준 것이다. 이후 한 번도 제대로 불리지 못하거나, 사라지는 그 이름들을 말이다.

 

  터키의 서북 지역에 있는 이무랄리 섬. 폭력과 고문이 난무하고, 재소자는 쏟아져서 발 디딜 틈 없는 교도소에 5명의 사내가 있다. 유서프, 메흐메트, 오메르, 메브르트, 세이트는 일주일 동안의 가출옥을 허가 받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기대에 찬 그들의 예상과 달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 험난하기만 하다.

 

  살인죄로 수감된 유서프는 키우던 카나리아를 아내에게 선물하기 위해 새장을 들고 감옥을 나서지만 허가증을 잃어버리면서 짧은 여정을 마무리하고 다시 교도소로 돌아간다. 메흐메트는 아내와 아이를 만나러 디야르바키르로 향한다. 그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 처남 아자르와 보석상을 털었고, 경찰이 출동하자 겁이나 혼자 도망쳤다. 처남은 그 자리에서 경찰 총에 맞아 죽었고, 그 일로 처가 식구들은 메흐메트를 원수로 생각하게 되었다. 메흐메트의 아내 에미네는 동생을 죽인 남편을 버리라는 가족의 등쌀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 쿠르드인으로 시리아 접경의 고향 우르파로 돌아온 오메르. 그는 교도소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평화로웠던 마을은 이제 쿠르드 반군과 정부군 사이의 피 튀기는 전투로 치열하기에 그 또한 싸움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알아 온 쿨바하르에게 마음이 끌리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삶에서 그는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다. 그저 순응하며 사는 것 말고는 말이다. 비교적 여유로워 보이는 죄수 메브르트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약혼녀를 만나러 간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약혼녀와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낼 거라 예상하지만, 그녀의 집에서는 결혼을 하기 전까지 만남을 제한한다. 금기와 체면으로 가득 찬 위선의 사회에서 메브르트는 체념한 듯 창녀에게 몸을 맡긴다. 세이트의 아내 지네는 생계 때문에 매춘을 했으나, 오빠의 손에 잡혀 집으로 돌아왔다. 지네는 8개월째 쇠사슬에 묶여서 마른 빵과 물만 먹으며 겨우 버티고 있다. 지네의 아버지는 세이트가 이슬람 율법에 입각해 명예 살인으로 딸을 단죄하리라 믿고 있다.

 

  부르고 싶었던 이름, 보고 싶었던 누군가의 얼굴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고향의 비루함과 속박과 억압, 비참한 현실뿐이다. 터키의 모습은 교도소와 다를 바 없어 고통스럽다. 전통과 관습이라는 이름 아래 용납되는 뿌리 깊은 악습과 편협한 종교와 국가. 가부장제의 폐해와 가난, 뼈아픈 민족주의, 권위와 제도, 차별받고 방치된 여성과 노인, 아이에 이르기까지 터키의 현실은 비참하고 처연해서 슬프기 짝이 없다. 오랜만에 만난 부부가 기차 화장실에서 사랑을 나누다 행인들에게 들켜 모욕당하는 현실. 가족을 살해하는 것을 명예로 아는 사람들. “내가 이제 형수의 남편이 되었다.”고 선언해야 하는 서러운 남자. 딸의 죽음이 신()의 명령이라고 생각하는 어느 아버지. 귀니는 그들을 비난하거나 무지하다고 단언하지 않는다. 마치 감독의 숙명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묵묵히 담아낸다.

 

  일주일간의 여정을 통해 다섯 사내들이 만나는 사람들은 군사 정권 하에서 고통받았던 민중 그 자체이며,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희생당한 우리들의 얼굴임을 감독은 묵묵히 전달한다. 이를 위해 귀니는 섬이라는 고립된 장소에서 시작해 도시와 산, 국경 지역, 폐허가 된 마을까지 터키의 전국을 두루 훑는다. 그리고 끝끝내 살고 싶다고 소리쳤던 지네, 군인, 아내, 아버지, 아이, 매음녀, 노인, 여성의 작은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인다. 아마도 그래서 터키 정부는 그토록 영화 <>을 매몰차게 거부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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