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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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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 카잔 특별전 <혁명아 자파타>2017-05-29

 


정치는 영화를 잠식한다

영화 <혁명아 자파타>

 

신종민 부산시민평론단


Review 캐릭터 드라마의 제왕 엘리아 카잔 특별전 2017.5.19금~5.31수 / 6.8목~6.11일


멕시코 배경의 서부극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으로 만나게 된 <혁명아 자파타>(1952)는 서부극이 많이 사용하던 2.35:1의 화면비 대신 1.37:1의 화면비를 택함으로써 시작부터 이 영화가 스펙터클은 아닐 것임을 예고한다. 멕시코 농민혁명의 영웅인 실존 인물을 다루는 이 영화는 영웅이 이끄는 혁명의 성공적 쾌감이나 몰락의 비애보다는 화면을 꽉 채운 인물들과 그들의 답답한 상황에 초점을 맞춘다. 배경과 로케이션 장소는 야외로 바뀌었지만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신사협정>(1947)<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 같은 이전 영화의 성공 요소를 따른다. 말하자면 황야에서 보는 연극적인 장면화와 역사적 사건이나 액션보다는 인물 묘사에 치중하는 영화를 보는 느낌이랄까. 이 영화의 대다수 장면은 바스트 숏으로 이루어진 대화신이다. 광야와 무장 투쟁의 현장에서 지내온 영웅의 일대기를 그리는 방식치고는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영웅으로 거듭나는 장면과 투쟁을 보여주는 군중신과 전투신도 있다. 하지만 그 신들을 한 시퀀스로 구성하기 때문에 서사의 구조를 놓고 볼 때 변화된 상황에 대한 대화의 도구처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50년대 초 반공주의, 반사회주의 시대 분위기를 통과하는 혁명영웅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던 감독은 연출 도중 혹은 영화 제작의 전후로 매카시즘의 영향을 받은 반미행위특별위원회에서 밀고를 했으며 뉴욕타임즈에 공산주의자 색출에 협력할 뜻을 밝히는 기고까지 청탁받으며 의도치 않은 자신의 변절과 작품 활동 보장 사이에 관한 갈등을 겪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갈등이 이 영화를 혁명의 성취나 쾌감보다는 영웅의 답답함으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는 도시와 실내를 벗어나 자신을 따르는 이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진정으로 사랑한 지도자상을 반공의 기치를 내건 마녀사냥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 웨스턴 스타일의 쓸쓸한 영웅담으로 그려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대적 물결을 헤쳐 나가지 못하고 오히려 휩쓸리며 그가 내세운 영웅은 길을 잃고 쫒기면서 정치적 프레임에 갇히는 인물이 되지 않았나 싶다.


역사적으로나 영화적으로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혁명을 그리다보니까 영화의 내러티브는 승리를 쟁취하는데도 상황은 끝이 보이지 않는 쳇바퀴처럼 점점 답답해지고, 위에서 말한 군중신, 전투신은 기능적으로 잠깐 등장할 뿐 고민과 대화가 길어지는 서사구조를 보여주게 된다. 연극 무대의 성공을 거쳐 아카데미까지 석권한 사회파 감독, 액터스 스튜디오를 설립한 배우들의 감독으로 탄탄일로에 서 있던 엘리아 카잔이 농민혁명 영웅을 그리는데 있어 확신 없이 머뭇거리고, 자신감 없어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건 결국 영화란 시대와 조응해서 만들어지고 이해될 수밖에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론 브란도가 연기한 이 불행한 영웅 자파타의 몇몇 모습은 영화가 끝나고도 꽤 마음을 흔든다. 엘리야 카잔의 특기라고도 할 수 있는 선택의 기로와 번민에 빠져있는 주인공에게 힘들게 다가온 사랑(호세파(진 피터스))이 마지막엔 도리어 외면을 받음으로써 슬픔을 더한다. 또한 자파타가 마데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구체제로의 회귀를 꿈꾸는 군부 우에르타 장군의 침공에 맞서 나갈 때 권총을 떨어뜨리는/집어던지는 장면은 항상 전쟁을 해야 하지만 평화를 희구하는 혁명영웅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줘 여운을 오래 남긴다. 혁명과 저항을 위한 마지막 순간은 또 어떤가. 자신들의 영웅이 죽을 운명에 처해있음을 알고 잔뜩 긴장한 인디오들과 운명에 체념하듯, 기도하듯 넋을 놓은 표정으로 계단에 앉아 있던 노파들의 모습이 자파타의 백마와 교차 편집되고 포위 총격신은 <내일을 향해 쏴라> 마지막 장면을 능가하는 비애미와 해방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교회 첨탑을 가슴에 꽂은 채 광장 무대에 누워 있는 말론 브란도의 마지막 등장신은 감독의 전후 영화-<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워터프론트>-에 모두 주연으로 출연해 메소드 연기로 칭송받던 배우가 숨을 참지 못하고 배를 볼록거리는 인간미까지 발산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이 영화를 일정부분 순수의 열정과 정치에 희생된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하지만 감독이 2년 뒤에 내어놓은, 그의 최고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워터프론트>(1954)에 이르면 이러한 순수와 동정의 시선을 거둬들이게 만든다. 동조와 밀고가 어쩔 수 없었다는 주인공 테리(말론 브란도)의 변명과 비둘기와 부두 노동자들의 눈빛 등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교묘한 신과 숏 사이에는 자신의 정신적 피해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의 폭력 행위에 대한 부당함만을 발견하게 될 뿐 영화적 완성도와는 달리 마음을 붙드는 장면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이 영화 이후 엘리야 카잔 감독의 영화를 아무런 필터 없이 본다는 건 (적어도 내겐) 불가능하다. 밀고가 어쩔 수 없는 정치적 폭압의 결과였다고 해도 사라진 동료들로 인해 더 늘어난 기회,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더욱더 확고한 지지...달콤한 변절의 열매를 따먹은 그의 영화를 순수하게 영화로만 바라보는 건 어려운 일이다. 밀고를 거부해 미국을 떠나고 영화계를 떠나야만 했던 이들이 만들어 내지 못한 영화들 대신에 번민과 자기반성 없이 변명과 도피의 그늘만을 드리우는 그의 영화를 어쩔 수 없이 봐야 한다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심지어는 메소드 연기가 어쩔 수 없었음과 변명을 증폭시켜 전달하는 굉장히 가식적이며 영화적이지 못한, 영혼을 갉아먹는 연기 기법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를 보는 것이든 만드는 것이든 태도의 문제, 윤리의 문제는 그 어떤 예술적인, 기술적인 문제보다 우선한다는 점을 그의 영화를 대하며 느끼게 된다.


영화를 향유하는데 있어 생각보다 정치가 가까이서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이번 엘리야 카잔 특별전이 경험케 하는 것 같다. 우리 역시 오랫동안, 또한 지금도 겪고 있는 정치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또는 자기 검열이라는 더 무서운 프레임으로 영화를, 영화인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매카시가 일으킨 반공 광풍과 블랙리스트의 검열도 5년을 넘기진 못했다. 견고한 패러다임과 프레임 그리고 영원할 것 같은 시스템도 결국은 변한다. 하지만 내 마음과 태도는 아직까진 변화를 거부하고 세상을 떠난 감독에게 <혁명아 자파타>의 머뭇거림과 비장미 같은 솔직함을 계속 요구하고 있는 것만 같다. 정치가 영화에 개입하면 결국 피해자만 남게 되는 걸 스크린 앞에서 직접 확인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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